컬트 영화계의 전설인 칠레 감독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76)가 한국을 방문했다. 이번 방한은 디지털로 리마스터링되어 30년만에 개봉을 앞두고 있는 컬트영화의 고전 <엘 토포>(1971)와 <홀리 마운틴>(1973)을 홍보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3월6일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2시간에 걸쳐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여기있는 모두가 지칠때까지 한번 질문을 받아보겠다"며 일흔여섯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열정을 드러냈다. 아래는 기자회견 전문 요약.
한국을 방문하게 된 소감은
이 자리에 있게 되어 영광이다. 내 영화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으나 영화의 제작자이자 존 레논의 매니저였던 앨런 클라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저작권을 받아올 수 없었고, 새롭게 개봉하는데 30년이 걸렸다. 싸우는데 질린 시점에서 앨런 클라인과는 이제 친구가 되어버렸다. 적과 친구가 되는 것만큼 좋은일도 없다. 영화는 완벽하게 리마스터링을 해서 새 영화처럼 변모했다. 내가 이 영화들을 처음 만들었을 땐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관객을 상대로 만든 영화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5일동안 한국에 머무를텐데. 계획은 무엇인가.
한국에는 한국 영화 때문에 오게 됐다. 미국 영화는 하향길에 접어들었다. 같은 철학, 같은 장면, 같은 것만 계속 반복된다. 13살짜리 어린애를 위한 영화에 불과하다. 여러분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영화에 있어서 새로운 것들은 모두 한국에 있다. 기존의 영화와는 매우 다르다. 이미 일본과 홍콩 영화를 초월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의 많은 감독들을 알고싶다. 당신들이 한국인이라 이런 공치사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한국 영화들을 보았나.
<왕의 남자> <괴물> <음란서생>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JSA> <한반도> <섬>등...다양한 테마가 놀랍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상업화할 줄 안다는 것도 매우 좋은 방식이라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자국의 영화가 중요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한국 작가와도 꼭 한번 작업해보고 싶다. 한국 영화의 기술적 발전에 대해 관심이 크다.
10여년전에 이 영화를 봤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어떤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는가.
미드나잇 무비로 미국에서 개봉했던 당시에도 사람들은 이해를 잘 못했다. 그건 내 영화가 서구영화인데도 동양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첫번째 영화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동양영화를 좋아했고, 다오(道)이즘과 융의 사상을 접합해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홀리 마운틴>에는 그래서 다오(道)이즘, 카발리즘, 불교. 연금술 사상 등등이 녹아있다. 나중에 한국말을 더 잘하게 되면 더 설명해드리겠다.(웃음)
10년전에 당신의 데뷔작으로 알려져있는 <환도와 리스>(Fando et lis)를 봤다. 원래 연극을 위해 쓰여진 대본이 아닌가.
맞다. 극작가 페르난도 아라발(Fernando Arrabal)의 대본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그러나 연극과는 다르기도 하다. 영화는 산업이다. 자본을 필요로 한다. <환도와 리스>를 만들때는 돈이 부족해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영화를 찍었다. 주중에는 제작비를 직업 벌어야 했으니까. 여하튼 영화는 당시 제작되던 멕시코 영화와는 너무나도 달랐는데, 아카풀코에서 상영했을 때는 관객들이 흥분해 나를 죽이려 들었다. 소녀가 돼지를 낳는 장면이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나는 연어같은 존재다. 모든 흐름을 거꾸로 타고 올라간다. 나의 모든 영화들은 당대에 상영되었던 영화들과는 언제나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당신의 영화는 집단적 광기, 상부구조가 대중을 기만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당신이 러시아계 유태인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가.
나는 러시아 사람도 아니고 유태인도 아니고 (주:이후 인터뷰에서 그는 멕시코 감독도 아니라고 말했다) 칠레 사람이다. 칠레 북부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고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자랐다. 본인은 라티노(Latino)다. 물론 칠레는 멕시코처럼 라틴색을 많이 띈 나라는 아니다. 멕시코에는 인디오가 많고 칠레는 대부분이 유럽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 영화에서 사회적 문제들은 <홀리 마운틴>에서 특히 많이 등장한다. 지금 다시 보라. 그 시대에 내가 표현한 많은 것들이 현실이 됐다. 종교간의 전쟁, 남성을 위한 성형수술 등, 30년전에는 없었던 영화속 일들이 지금은 벌어지고 있지않나.
외면적으로는, 늙었다.(웃음)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더 젊어졌다. 그때가 더 의식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죽지않을 영생의 존재라도 된 양 살면서 모든 인생을 경멸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보석같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존재에 무관심했으나 지금은 한명 한명이 여행에서 마주친 사람처럼 소중하다.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 개인적 고통을 하나하나 끝내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알게됐다. 물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여전히 있으나 숙제는 크다. 아마 영영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바꾸기 시작할 수는 있다. 지구를 인류가 죽이고 있다는 의식을 사람들로 하여금 갖게 만들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잘못된 것이 너무도 많다. 인간의 스승인 동물을 우리는 먹고있다. 인간은 점점 로봇으로 변해가고 있다. 정치가는 모조리 마리오네트다. 도시는 시멘트 덩어리다. 인생은 결코 돈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되며 우리는 우주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 예술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것이다. 영화는 마약이 아니라 의식을 깨우치는 도구다. 의식을 찾는 수단. 그것이 바로 영화다.
나는 당신을 감독이라기 보다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당신 영화들은 장면이 모두 그림처럼 느껴진다. 기존의 미술사조와 작가의 영향은 얼마나 받았는가.
나는 영화가 그림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다.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감독 에이젠슈타인은 영화를 그림처럼 한장면 한장면 모방하라고 했었는데, 그건 오류다. 내 영화의 어떤 장면도 미술의 모방이 될 수는 없다. 또 다른 장르의 예술일뿐이다.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 <듄>을 영화화하려던 계획이 좌절된 후, 근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더 이상은 아쉽지 않다. 뭔가를 할 수 없으면 대산 다른 걸 하면 된다. <듄>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은 지금까지 써온 그래픽 노블(주-그는 현재 프랑스에서 그래픽 노블 작가로 활동중이다)들로 다 해왔다. 내 만화 중에서도 한국에서 번역된 것이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것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영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예술로 변환하는 것이다. 좌절은 길을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듄>에서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주-작가인 댄 오바논과 디자이너 H.R.기거)이 이후 다른 SF 영화들에서 훌륭하게 작업해내지 않았나.
후속작인 <엘 토포>의 속편은 만들 것인가. 그렇다면 아들들도 거기에 출연하나.
나의 세 아들들은 이미 40대다. 연극을 하는 첫째는 역시 연극을 하는 딸이 둘이나 있고, 나머지 두 아들도 연극을 한다. 하나는 화가이기도 하고, 막내는 재즈록 그룹을 하고 있기도 하다. 모두가 예술가라니. 재앙이다.(웃음) 내 아내 역시 베트남과 프랑스 혼혈이며 프랑스에서는 잘 알려진 화가다. 후속작에는 세명의 아들을 모두 등장시킬거다. 작년에는 집안 식구 모두가 모여서 가족 연극을 했다. 집안 전통인가보다. 사실 예술가가 되는건 끔찍한 일이다. 나는 아들들이 모조리 산업에 종사하길 바랬는데.(웃음) 내 할아버지는 신발을 만드는 구두공이었다. 만약 내가 구두공이 되었다면 공중을 떠다니는 신발도 만들고 싶어했겠지. 나에게 신발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7년전부터 딱 한 켤레의 신발만 신고있다. 칠레에서 떠났을 때가 23살이었고 40년뒤에야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40년동안 가지고 있던 본국의 물건은 오로지 신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