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이전에는 보지 못한 기묘한 영화 <엘 토포>
2007-03-14
글 : 이창우 (영화평론가)
서부극이자 팝아트이기도 한 기묘한 영화. 잔혹하고 저항적이며 수행(修行)적이다.

멕시코 말로 두더지인 엘 토포는 벌거벗은 아들과 동행하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총잡이의 이름이다. 그는 마을 주민을 몰살시킨 산적을 응징한 뒤, 자신보다 강한 현자-총잡이들을 쓰러뜨리고 중원(?)을 평정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는 네명의 현자로부터 한 가지씩을 깨닫고 결투에서 이긴다. 그러나 “이긴다 해도 진 것과 같아”라며 자책감에 곧 빠진다. 영화는 내용상 두 부분으로 나뉜다. ‘광야’의 선지자처럼 자기 내부의 악과 싸우는 부분과 집단화된 악에 둘러싸여 민중을 위해 깨달음을 실천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성스러운 피>(1989)로 잘 알려진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엘 토포>의 감독·각본·주연· 음악·미술을 맡았다. 이 작품에서 그가 발휘한 ‘파괴적인’ 상상력 덕에 관객은 이전에는 보지 못한 기묘한 영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의 한축에는 약탈당하고 기형이 되어버린 삶에 대한 묘사가 그득하다.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잔혹함, 사도마조히즘적 코드,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한 무자비한 학살, 땅속에 갇혀 사는 두더지 같은 기형아들. 하지만 어느 현자가 주인공에게 충고한 “더 깊이 타락하면 할수록 진정한 고귀함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대사는 영화 자체에도 적용된다. 즉, 그 모든 피비린내 나는 화면들은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사색을 향하여 나선형을 따라 수렴된다. 주인공은 니체의 초인을 추구하고 모세처럼 광야에서 방황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자아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사실 반대로 말해서 이 정도의 균형추가 없었다면, 불쌍한 양민들이 강자의 오락거리로 죽어가는 장면을 경쾌하게 담아낸 감독의 방식이 불쾌할 뻔했다.

영화에서 ‘여성’이 다루어지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의 연인은 남성의 타락을 부추기는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으로 나타난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남성 내부의 떼어내야 할 덩어리다. 또한 모든 힘없는 남성은 여성으로, 힘 가진 여성은 남성으로 희화화한다.

초현실주의적인 미장센과 주인공들의 마임적인 연기, 그리고 생생한 정치적 메시지는 이 영화의 장점이다. 이 점은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기이한 이력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는 23살에 서커스 극단을 조직하고 유명한 마이미스트 록셀 록스트의 제자로 순회 공연을 했으며 만화가로 활동했다. 대학생 때 목격했다는 멕시코 군사정권의 양민학살 장면과 1968년 청년운동의 대항문화 경험은 작품 안에 생생하게 스며들어 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