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3월18일(일) 오후 2시20분
세기의 걸작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게 민망하기는 하지만, <소매치기>는 제대로 된 ‘소매치기’의 교본처럼 보인다(기차역에서 소매치기 일당이 벌이는 치밀하고 조직적인 행위의 연쇄를 보라!). 로베르 브레송은 그렇게 찍었다. 브레송은 소매치기를 소매치기로 만든 환경의 필연성, 이를테면 빈곤이나 외적 결핍 따위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소매치기의 요동치는 심리를 재현하는 데도 그리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매치기 행위를 멋진 갱들이 대낮에 총싸움을 벌일 때처럼 드라마틱하게 미화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소매치기의 주체가 되는 ‘어떤’ 손들만을 끈질기게 응시한다. <소매치기>는 손에서 시작해 손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인물의 손이 아닌 ‘어떤 손’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 손은 익명적이며 아무런 감정도 싣고 있지 않지만, 매우 섬세한 촉수를 지니고 우아하게 움직인다. 정교한 소매치기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마치 손으로 발레를 하듯, 타인의 은밀한 부위를 미끄러지듯 스쳐지나가는 것임을 입증한다. 브레송은 이 손들을 몸이나 얼굴과 분리된 독립적인 신체의 일부처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처럼 클로즈업한다. 얼굴과 손의 움직임이 함께 포착된 숏은 거의 없다. 소매치기의 얼굴이 나오는 숏에서는 그의 현란한 손이 부재하고, 재빠른 손이 화면을 채울 때는 그의 얼굴이 사라진다. 더욱이 이 얼굴들은 대부분, 별다른 표정의 흐트러짐 없이 지극히 고요하다. 얼굴과 손의 분열 혹은 손의 세속적인 움직임과 얼굴의 금욕적인 이미지의 공존, 그 사이의 어딘가에 브레송의 세계가 있고 어쩌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소매치기> 역시 브레송만의 화법이 부각된 작품이다. 극적인 대사를 대신한 내레이션과 편지와 같은 기록물, 영상에 침입하는 음향, 세속적인 세계와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 비전문적인 배우들의 연기, 폐쇄된 공간 속의 우연과 반복 등을 볼 수 있다. 60년대 중반 이후 그가 만든 영화들은 <아마도 악마가>(1977)나 <돈>(1983)에서처럼 악과 고통의 순환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비관적으로 절망한다. 그러나 <소매치기>에서는 아직 구원의 빛이 살아 있다. <사형수 탈옥하다>(1956)의 마지막, 감옥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퐁텐느와 동료가 포옹할 때처럼, <소매치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감옥 창살을 사이에 두고 미셸과 잔느가 서로를 바라볼 때, 희망은 고통을 잠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