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는 보는 이의 몸 구석구석을 움찔거리게 만드는 영화다. 귀가 뜯기고, 눈알이 뽑히고, 목이 베이고, 어깨가 찢어진다. <수>의 프로듀서를 맡은 신창길 PD 또한 촬영기간 내내 그에 비견할 만한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50억원대의 제작비를 운영해야 한다는 부담감, 크고 작은 사건들은 연이어 터졌고, 시간은 빠듯했다. 게다가 독불장군인 감독은 속타는 마음은 몰라준 채 끝까지 자신의 스타일만을 고집했다. 칼에 찔리고, 총에 맞을지라도 끝까지 구양원을 향해 전진하던 태수의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 “스케일이 클수록 사전작업이 철저해야 하는데, 최양일 감독님은 원래 당일 아침에 콘티를 만드는 스타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스탭들의 순발력이 강해야 했고, 그러는 한편 퀄리티도 신경써야 하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시원함보다도 아쉬운 마음이 크다.”
신창길 PD가 <수>의 프로덕션에 투입된 건 지난해 7월 말이었다. 한때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영화프로듀서 과정을 강의하기도 했던 그는 그때의 인연으로 알게 된 영화사 대표에게 프로듀서 역할을 부탁받았다. “최양일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서 뚝심있게 밀어붙이는 힘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런 점들이 함께 일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했지만. (웃음)” 당시 <수>는 15% 정도의 일정을 소화한 채 촬영을 중단한 상태. 약 50회차의 촬영이 남아 있었고, 최양일 감독은 일본의 일정을 앞두고 있었으며 남은 시간은 단 3개월이었다. 당연히 신창길 PD에게 떨어진 가장 큰 미션은 “정해진 일정 안에 정해진 예산을 맞추는 것”과 “제작과정의 시스템을 복구하고 재건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은 50회차의 촬영은 50개의 게임 스테이지처럼 각기 다른 미션을 덧붙이곤 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카체이싱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억이다. 섭외된 주차장의 이곳저곳에서 20cm 두께의 고무판을 붙이고 도색하는 일은 체력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연출, 촬영, 조명 등 기본적인 인력을 빼고서도 50명 이상에 달하는 인원들을 통제하며 단 3일 동안 수백개의 컷을 찍어야 한다는 건, 아침에 눈뜨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연이어 속출하는 스탭들의 사고까지. “특수효과 스탭들이 차 안에 숨어서 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스턴트맨보다 꼭 그런 스탭들에게 더 많은 사고가 나더라.” 여의도에서 있었던 외부 촬영 때는 조명이 달린 크레인에서 화재까지 발생해 의도치 않은 현장공개를 해야 할 뻔하기도 했다. “소방차들이 와서 불을 진압하고 있었는데, 방송사에서 뉴스 취재를 왔다. 영화가 안 좋은 이미지로 비쳐질까봐 제작실장과 함께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웃음)”
신창길 PD가 영화와 첫 인연을 맺은 건 제작부가 아닌 연출부였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당시 강의를 맡은 홍상수 감독의 제안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참여했던 그는 한때 방송사 외주프로덕션에 들어가 ENG카메라를 들고 맛집기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를 다시 영화로 불러들인 건, 함께 영화를 공부하던 이들이 설립한 청년필름. 영화는 <해피엔드>였다. “연출은 정지우가 할 건데, 너는 뭐 할 거냐고 하더라. 엉겁결에 제작부장을 맡게 됐다. (웃음)” 이후 <질투는 나의 힘> <분홍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프로듀서를 거친 그는 <수>에 이르면서 3억원부터 50억원까지 다양한 예산의 영화를 경험하게 됐다. “덕분에 프로덕션 과정에서 어떤 걸 빼고, 쥐고, 더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름의 노하우가 쌓인 것 같다. (웃음)” 프로듀서로서 그의 가장 큰 소망은 “좋은 감독과 함께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꾸준히 만드는 것”이다. “제작사를 차려서 주목을 받고, 우회상장으로 돈을 벌 재주는 없다.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이 흥미있고, 재미있을 뿐이다.” <수>의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투입된 다음 작품은 북한 미녀응원단을 소재로 한 <반갑습니다>(가제). 북한 미녀응원단이 응원을 마치고 돌아가던 도중 태풍을 만나 남한의 어느 섬에 머물게 되면서 주민들과 벌이는 소동극이라고 한다. 일정대로라면 올 가을쯤에는 그의 새로운 고생담이 쓰이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