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로버트 드 니로] 위대한 배우, 믿음직한 아버지, 투철한 감독
2007-04-10
글 : 오정연

알 파치노,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 니로의 공통점은? 역대 최고의 배우를 꼽을 때 주저없이 떠올릴 만한 이름.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미국영화의 질풍노도를 고스란히 담아온 얼굴. 한편 이상씩 연출작을 만든 바 있음. 그러나 이 대배우들의,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살펴봤을 때 단연 우세를 보이는 것이 로버트 드 니로다. 첫 번째 연출작 <브롱크스 테일>은 좋은 평을 받았고, 오는 4월19일 국내 개봉을 앞둔 두 번째 영화 <굿 셰퍼드>는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됐다(잭 니콜슨의 두 번째 연출작 <Drive, He Said>가 칸 경쟁부문에 초청된 바 있으나 36년 전 일이다). 앞서 언급한 이름들에 비해 드 니로가 독보적으로 앞서는 분야가 있다면, 대언론기피증이다. 그러나 그 역시 연출작에 한해서는 적어도 인터뷰 횟수 면에서는 관용을 베풀어왔다. 영화제 기간 중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각국에서 몰려든 15명의 기자가 25분 동안 전쟁을 치르듯 질문을 던져댔지만, (역시나) 그 진귀한 만남을 전하기엔 다소 뻔한 결과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짧지만 소중했던 시간, 일견 불친절한 듯 보이지만 예의를 잃지 않았던 인터뷰이의 매력을 옮기기 위한 방법으로, 현지에서 이뤄진 인터뷰와 함께 그의 연출작을 통해 인간, 로버트 드 니로를 돌아봤다. 5년 전, 그를 일대일로 인터뷰하는 행운을 누렸던 한 영화전문기자가 들뜬 회고를 보내왔다.

Q.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훌륭한 배우로 추앙한다. 어떻게 그런 것을 받아들이나.
A. 그냥 극복하게 되더라.

- 2007년 베를린영화제에서의 인터뷰 중에서

<굿 셰퍼드>

42년간 71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의 경력을 살핌에 있어, 나열법이 아니면 방도가 없다. <대부2>(1974)로 오스카 남우조연상 수상, 2년 뒤 <택시 드라이버>로 주연상 노미네이션, 다시 2년 뒤 <분노의 주먹>으로 남우주연상 수상, 이후 <디어헌터> <케이프 피어> <사랑의 기적>으로 아카데미 주연상 노미네이션. 25살에 브라이언 드 팔마(<그리팅스>), 27살에 로저 코먼(<블러디 마마>), 30살에 마틴 스코시즈(<비열한 거리>), 31살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대부2>), 33살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1900>)와 엘리아 카잔(<마지막 쇼군>), 41살에 세르지오 레오네(<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만났음. 1997년 그를 시대를 초월한 최고의 영화스타 100인 중 5위로 선정했던 <엠파이어>는 2004년에 그를 생존한 배우 중 최고로 치켜세웠고, 영국의 <채널4>와 <엔너테인먼트 위클리>는 그를 각각 시대를 초월한 최고 배우 2위(1위는 근소한 차로 앞선 알 파치노)와 34위로 꼽았다. 1983년에는 3인조 여성댄스그룹이 <로버트 드 니로가 기다리고 있어>라는 팝송을 히트시켰고, 이 밖에도 그의 이름을 언급한 팝송은 두곡이 더 존재한다. 명배우, 혹은 유명인사의 대명사이자 흥행과 비평, 상복에서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걸어온 64살 노배우에 대한 첨언은, 그 자체로 새삼스럽다.

그런데 신기하다. 창간 12주년을 맞는 <씨네21>은 여지껏 로버트 드 니로에 대한 인물 기획기사를 한번도 게재한 적이 없다. 새삼스러워서일 수도 있고, 그 많은 전작을 챙겨보는 것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96년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에 있다. 12년간 출연한 25편 중 대부분에서 그는 <재키 브라운> <슬리퍼스>처럼 카메오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고, 눈에 띄는 흥행작은 <애널라이즈 디스>와 <애널라이즈 댓> <미트 패어런츠1, 2> 등 코미디였으며, <숨바꼭질> <15분> <갓센드> 등의 스릴러에서는 매너리즘이 엿보였다. 그는 나이를 먹었고, 세상과 영화는 더이상 날것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드 니로 자신은 “정말로 즐길 만한 일을 하는 건 멋진 일이다. 코미디든 드라마든 상관없다”며 심드렁하다. 과연 그럴까. 정답을 알아낼 도리는 없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창조적이며 성능좋은 ’인간 복사기’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가족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재능을 낭비하지 말아라.”
-<브롱크스 테일>에서 로렌조가 아들에게

1960년대, 뉴욕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성장기를 보내는 소년과 그의 두 아버지, 강직하고 성실한 친아버지 로렌조와 소년이 동경한 갱단 두목 소니의 이야기를 담은 <브롱크스 테일>(1993)은 채즈 팔민테리가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완성한 연극을 영화로 옮긴 결과물이다. 팔민테리는 영화화의 조건으로 자신이 소니를 연기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드 니로는 이를 수락했으며, 좀더 효율적인 영화제작을 위해 드 니로는 로렌조를 직접 연기했다. 그는 팔민테리로부터 자신이 연기할 인물의 모델이 된 버스운전기사 아버지를 소개받았다. 애초 그저 보통 사람에 불과한 아버지를 만날 필요없다며 만류했던 팔민테리는 이후 “촬영을 시작하자 밥은 아버지가 했던 대로 버스를 운전하고 아버지처럼 기어를 바꾸고 핸들을 닦았다. 아버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억했다가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라며 감탄했다.

요컨대 그는 성능 좋은 ‘인간 복사기’다. 그것도 아주 창조적인. <굿 셰퍼드>의 맷 데이먼은 “밥(드 니로의 애칭)은 인간 행동의 연구자다. 멀찍이 앉아서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머리에 입력한다. 그의 작품이 그처럼 좋고, 그를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드 니로가 자신의 모델과 닮기 위해 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대부2>의 비토 콜레오네를 소화하려고 시실리로 떠나 사투리를 채집했고, 결국 1편에서 말론 브랜도가 보여준 모든 것을 복사했다. <택시 드라이버>를 위해 실제 택시 운전기사로 손님을 태운 채 뉴욕 시내를 질주했다. 촬영을 위해 스파링 상대였던 조 페시의 옆구리를 가격하여 실제 갈비뼈를 부러뜨렸던 <분노의 주먹>에서 선보였던 살인적인 몸무게 늘리기는 이미 유명하다. 자신의 실제 모델인 라 모타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라 모타와 그의 부인이 결별하는 이유가 드 니로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아무리 사소한 소품이어도 스스로 고르고 늘 몸에 지녔다. <폴링 인 러브>에서는 한번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주인공의 명함을 만들어서 가지고 다녔다.

<대부 2>
<택시 드라이버>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인 “나한테 하는 말이야? 나한테 지껄이는 거냐고!”(<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가 거울 앞에서 총쏘는 연습을 하는 장면에서 중얼거리는 혼잣말)를 리허설 중 만들어낸 그의 능력은 자신의 인물 안에 투철하게 빠져든 결과물이었다. 연출작 <굿 셰퍼드>라고 다를 리 없다. 1939년부터 61년까지 지금의 CIA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한 남자와 그 가족의 파멸을 그린 이 영화는 드 니로가 8년 동안 품었던 프로젝트다. CIA에서 30년간 근무한 전직 요원을 초빙하여 현장에서도 옆에 둔 것은 물론이고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방문하며 생생한 소재를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주요 인물이 실제 모델을 지니고 있는 영화였고, CIA를 실질적으로 창립한 인물로 그가 연기한 설리반 장군도 모델이 있었다. 불행히도 장군의 모델은 1970년대 중반 사망하여 드 니로는 그를 직접 만날 수 없었고, 이를 매우 애석해했다고 한다.

철저한 사생활 보호, 단답형의 인터뷰이

“누군가가 나에게, ‘다른 배우들은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실제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바비는 대체 평소 뭘하는지 알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 무조건 동의했다. 그를 표현하는 아주 적절한 말이라고.”
-맷 데이먼

만일 드 니로가 파파라치와 폰카와 UCC가 성행하는 오늘날 스타로서의 전성기를 누렸다면, 차라리 배우의 길을 포기했을 것이다. <택시 드라이버>가 칸에서 큰 호응을 얻을 무렵. 싸구려 언론이 횡행하는 미국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유럽에서는 TV 출연도 마다않는 그를 향해 미디어는 ‘가르보의 오만함’을 지녔다며 삐딱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LA에 가지 않을 것” “사람들은 뉴욕이 놀기는 좋아도 살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는 뉴욕 외의 다른 곳이 그렇다”는 등 그의 극단적인 뉴욕 사랑은 할리우드에 몰려드는 미디어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반영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모두가 인정하는 전성기를 훌쩍 넘겨버린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여전히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그는 단답으로 일관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인터뷰이의 자포자기한 심정이 드러나는 듯한 기사도 눈에 띄며, 그를 일대일로 대면한 뒤 작성된 글의 도입부에는 그가 얼마나 악명 높은 인터뷰이인지를 설명함으로써 자신이 실패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애절함이 묻어난다. 그와의 만남을 위해 정치, 종교, 가족 등 질문해서는 안 될 항목이 나열된 목록에 동의해야만 했다는 증언도 있다. 드 니로가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고, 오로지 그가 언론을 상대한 빈약한 인터뷰와 주변 취재를 통해 완성한 전기 <언터처블 로버트 드 니로 전기>(Untouchable, 앤디 더간 지음)의 제목은 꽤나 잘 어울린다. 손을 댈 수도 없고,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는. 주변인들은 그를 일컬어 “스스로를 사라지게 만드는 데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할리우드 스타의 반열에 오른 뒤에도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그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등의 신기한 일화가 인구에 회자되기 일쑤였다.

<숨바꼭질>
<미트 페어런츠>

철두철미하게 사생활을 지키는 이 사내도 40여년간의 할리우드 생활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었다. 12년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배우 겸 가수 다이앤 에보트, 그녀와의 결혼이 유지되고 있던 중에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가수 헬레나 리잔드렐로, 이후 모델 질리언 드터빌과 도로시 투키 스미스, 나오미 캠벨, 그리고 1997년부터 현재까지 함께하고 있는 부인 그레이스 하이타워 정도가 그간 밝혀진 드 니로의 여인들이다. 이중 두명으로부터 각각 한명의 아들을 얻었고, 또 다른 한명이 자신의 딸을 드 니로의 자식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또 다른 한명과는 쌍둥이 딸을 낳았다. 팬들에게 과도한 반응을 보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어쩔 수 없는 염문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긴 하다.

그의 사생활과 관련해서 언론이 촉각을 곤두세웠던 부분은 유년 시절이다. 초기작에서 연기한 불안하고 자기 파멸적인 캐릭터들은, 평소 그의 연기방식을 생각할 때, 어떤 식으로든 본인의 실제 유년기와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추측 때문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알려진 그의 성장배경은 미술가였던 부모가 두살 때 이혼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유복하고 평범한 편이다. 그에게 풀네임을 물려준 로버트 마리오 드 니로 1세는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추상표현주의 화가였고, 이혼 뒤에도 아버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풍부한 문화적 소양을 쌓고 많은 문화인사를 만날 수 있었다. 병적인 그의 완벽주의는 드 니로 부자가 공유한 유전자라고 한다. 그 역시 아버지의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조만간 포르투갈, 베니스 등지에서 아버지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 계획을 밝히기도 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그가 경영하는 레스토랑에는 아버지의 작품이 걸려 있다.

투철한 완벽주의가 드러나는 연출방식

“이탈리아인에겐 가족과 신앙이 있소. 아일랜드인에겐 고국, 유대인에겐 전통, 흑인에겐 음악이 있지. 당신들에겐 뭐가 있소?”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오. 이민자에겐 없는.”

-<굿 셰퍼드> 중에서

조디 포스터 등 함께 공연한 어린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로버트 드 니로를 친절하고 자상한 보호자로 회상한다. 그는 첫 번째 부인과는 다른 관계를 맺으면서도 결혼관계를 유지하려 했고, 결혼하지 않았지만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여인과는 시험관 시술을 통해서라도 아이를 얻었으며, 부인이 전남편과 가진 딸을 입양하여 차이없이 보살피기도 했다. 깊은 곳에 감춰진 뿌리깊은 책임감, 혹은 자신의 울타리를 끝내 지키려는 욕망. 이는 그의 비밀스런 사생활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대중에게 스스로를 각인시킨 <대부2>에서의 모습, 투철하고 완벽한 가부장의 이미지는 썩 잘 어울린다.

두편에 달하는 드 니로의 연출작은 이를 뒷받침한다. 변명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고, 갈등하는 아들이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심지어 드 니로의 연출 방식 역시 이와 통하는 면이 있다. 절대적인 사실성을 우선시하는 그는 <브롱크스 테일>의 캐스팅 조건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 가능하다면 실제 그곳에서 생활하는 비전문 배우를 내걸었다. <굿 셰퍼드>에서는 가족과 소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잃게 되는 주인공 에드워드를 연기한 맷 데이먼이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일반인의 그것과 같아져야 함을 강조했다. <대부2>를 연상시키는 비장한 주제가 담긴 167분짜리 대작이 밋밋하고 단순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아마도 감독의 그러한 완벽주의, 모든 디테일과 모든 장면을 포기하지 못하는 지나친 세심함이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브롱크스 테일>과 <굿 셰퍼드>의 소재며 주제,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전자의 주인공 소년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성장하지만, 후자의 주인공 아버지는 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 홀로 남는다. 전자의 인물들은 서로에게 감사하지만, 후자의 인물들은 죽거나, 미워하거나, 자신을 지탱하던 애초의 그 무엇인가로 회귀하지 못한 채 살아남기 위해 냉혈한이 된다. 그러나 두 영화는 공히 가족멜로드라마를 표방한다. 많은 이들은 9·11을 경유하여, 만들어진 <굿 셰퍼드>를 통해 드 니로의 정치적 발언을 유추하려 애쓰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에 대한 대답을 유보하고, 미국의 가치를 옹호한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위에 인용한 부분을 꼽는다.

<굿 셰퍼드>
<굿 셰퍼드>

90년대 중반 이후 그의 행보에 대해 호사가들은 그가 통장잔고에만 신경을 쓴다며 볼멘소리를 일삼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통장잔고는 본인의 화려한 생활이 아니라, 또 다른 영화제작을 위한 것이었다. 1990년 뉴욕 트라이베카 지역을 지키기 위해 구입한 건물에서 출발한 제작사 트라이베카 프로덕션은 1991년부터 37편의 영화제작에 관여해왔다. 그는 두편의 연출작을 알뜰하게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굿 셰퍼드>에서는 연출료를 받지 않았다. 드 니로는 <굿 셰퍼드>를 연출하기 위해 30년지기 마틴 스코시즈의 <디파티드>에 프랭크 코스텔로로 출연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여전히 마티(스코시즈의 애칭)와 함께 적어도 두편의 영화를 함께하여 둘의 공동 필모를 10편까지 채우겠다고 말하지만, 죽을 때까지 다섯 편의 연출작을 만든다면 행복할 거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남은 연출작 중 한편은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무너지기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굿 셰퍼드2>가 될 것이 유력하다. 유난히 말주변이 없었던 청년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을 익혔고, 모든 것을 감독과 논의하며 결정하는 작업이 익숙하여 한때 몇몇 감독(베르톨로치, 레오네 등)과 불화를 빚기도 했다는 노배우는 이제 카메라 뒤에 서는 것으로 대중에게 말을 거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신화로 박제되는 것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성실한 가장이자 현실적인 책임자가 되는 것을 택한 이 남자. 앞으로 그에게 더이상의 <택시 드라이버>나 <분노의 주먹>이 없더라도, 걸작으로 인정받는 연출작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그의 노년은 행복하게 유지될 듯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참고 <언터처블 로버트 드 니로 전기>(앤디 더간 지음, 이찬복 옮김, 예니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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