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숨>을 보고 시사회장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씨네21>의 정한석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적이라기보다는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숨>의 스토리 라인은 비교적 간명했다. 한 여자가 있다. 남편의 외도에 상처받은 여자. 이 상처가 여인으로 하여금 유년 시절 익사 직전의 몽롱했던 5분간의 죽음의 기억을 되살린다. 외적 상처가 내적 죽음의식으로 치환되고, 그것이 다시 가족을 죽였으나 이제 자신이 죽을 처지에 있는 사형수에의 관심과 몰입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어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여자의 사계 퍼포먼스는 시간을 압축하는데, 그것이 사형수의 입장에서는 상징적인 형태로 삶을 연장시키고 재생시키는 희생제의처럼 보였다. 사실 영화의 끝에서 그 사형수는 한 어린 죄수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재생하는 것은 사형수만이 아니다. 여자 역시 그랬다고 나는 생각했다.
앞에서 나는 이 영화가 연극적이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영화라는 장르예술을 둘러싼 표준문법에 대해 김기덕이 최대한 저항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적으로 이 영화는 ‘감정이입’으로 요약되는 다채로운 영화적 효과들을 대거 생략했다. 현란한 카메라 워크와 특히 관객의 정념을 어떤 식으로든 자극하고야 말겠다는 음향 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완벽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 김기덕은 지루할 정도의 고정 카메라를 통해 상황을 장면화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고정된 프레임의 안과 밖을 지친 물고기처럼 드나든다. 사각의 격자에 갇힌 인물들의 내적 정념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이지만, 그것이 몰입을 통한 감정의 승화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배우들, 특히 여자의 사계 퍼포먼스 역시 그것이 감독의 의식적인 주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서늘한 동조를 하게 만들지 않는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자고 여자가 노래 부를 때, 현실적으로 갈 수도 없거니와 배우의 장식없는 생소리는 계속해서 관객의 ‘감정이입’을 훼방놓는 것처럼 느껴진다. 옥사 안의 사형수와 그의 곁에서 질투의 정념을 다만 눈빛으로 뿜어내는 어린 죄수, 또 칫솔을 분질러 여인의 누드화를 드리고 있는 수형자들의 양태 역시 옥사의 살아 있는 생태라기보다는, 그것의 비현실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상황을 감시하고 조율하는 초월적 시점으로서의 보안과장의 카메라가 있다. 그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전개되고 있는 여자와 사형수, 또 그런 둘의 관계를 질투의 정념으로 바라보고 있는 감옥의 안과 밖의 사람들의 행태의 리얼리티를 감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자와 사형수의 사계 퍼포먼스는 오직 이 초월자의 눈-카메라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가능해지는, 승인된 퍼포먼스의 일부이지만 피사체가 되어버린 여자와 사형수는 외부의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계의 시간을 압축적으로 살아내는 두 남녀의 호흡과 삶의 리듬은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카메라 바깥의 초월자로서의 보안과장의 희극적인 승안 아래서 간신히 허용되는 운명인 것이다.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영화적인 모든 것을 낯설게 하고 있다. 그는 관객조차도 배우들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에 몰입하는 것을 금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관객은 보안과장-초월자의 눈이 선택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인생의 국면을, 지금 나른한 쇼파 위에서 하나의 허구로서 바라보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영화에 대해 기대하는 관객의 수동적 기대지평 모두를 낯설게 하면서, 또 영화 장르의 진화에 따라 발전된 공감각적 테크놀러지를 최소화함으로써, <숨>은 영화의 미니멀리즘을 실현하고 있다. 내 판단에 그것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영화적으로 실현하면서, 비관도 낙관도 없이 지속되는 시간과 현실의 부조리를 연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사무엘 베케트의 세계를 닮아 있다.
나는 이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 물 밖으로 던져진 헐떡거리는 물고기의 아가미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가까울수록 숨은 깊어지고 격렬해지지만, 그러한 과정 자체가 임박한 죽음에 대한 아득한 경련이기도 한 것이다. <숨> 역시 그렇게 한국영화 현실에 대한 김기덕의 아가미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