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극락도 살인사건> 신토불이 호러영화
2007-04-26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추리극이 아니라 호러영화로서 장점이 많은 <극락도 살인사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극락도 살인사건>이라는 모범적인 제목과 ‘미스터리 추리극’이라는 (다소 쓸데없는)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있는 영화라면 당연히 장르적인 검증을 받아야 한다. 최종 결과가 전형적인 장르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고 해도 태생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단 이 작품이 추리물이라는 건 분명하니 그건 넘어가자. 그렇다면 이 작품은 무슨 추리물일까? 한번 선배들을 살펴보자.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건 메리 셀레스트(19세기에 선원 전원이 사라진 채 표류한 배의 이름) 미스터리다. 물론 메리 셀레스트 사건은 실화지만 오래전부터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으니 하나의 소장르라고 해도 될 듯하다.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는 선원들이 모두 사라진 배를 17명의 주민들이 사라진 섬으로 옮겨놓고 있는데, 메리 셀레스트 미스터리로 본다면 솔직히 실망스럽다. 이 장르의 최대 장점인 호기심 당기는 미스터리를 전혀 부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사건의 신비함을 미처 느끼지 못한 채 본론으로 들어가고 막판엔 요란한 권선징악과 함께 거의 모든 비밀들이 폭로된다. 그러면서 마케팅에서는 여전히 신비주의로 몰아가고 있으니 한마디로 손발이 맞지 않는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영향을 받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식 추리학살극으로는 어떨까? 추리물로서의 한계는 여기서도 보인다. 이건 탐정들이자 희생자들인 섬 주민들이 야무진 추리를 할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다. 관객에게 제시되는 단서들이 이끄는 해답이 다소 민숭민숭하며 지나치게 편리하다는 게 문제다. 가장 대표적인 결점은 ‘이장이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여놨다’라는 쪽지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쪽지의 존재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엔 이 쪽지가 거의 ‘모든 게 꿈이었어’ 수준의 막연한 해답을 제시하는 별다른 의미없는 맥거핀임이 밝혀지는데, 히치콕식 서스펜스물이라면 몰라도 나름 머리를 써야 하는 추리물에서 이러면 영화가 싱거워진다. 주인공들의 탐정 능력이 달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게 작가가 미스터리를 엉성하게 다루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의미없다는 것 자체가 의미라고 해도 그 무의미를 의미있게 삽입하는 방법은 연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극락도 살인사건>이라는 영화가 가장 그럴싸하게 도달한 소장르는 무엇일까? 아무리 봐도 그건 지알로(Giallo) 같다. 야한 옷을 입은 여자 희생자를 뒤쫓는 가죽 장갑을 낀 살인마는 등장하지 않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은 좋은 지알로 영화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모두 담고 있다. 과도한 폭력과 살인, 그들을 지배하는 통제 불능의 광기, 그들을 느슨하게 연결하는 다소 어색한 논리. 지알로 장르는 피투성이 살육의 비주얼에 비해 시시한 시나리오와 어색한 연기로 유명했으니 이는 꼭 칭찬은 아니겠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이 그 단점들까지 물려받은 건 아니니 너무 예민할 필요는 없겠다. 적어도 <극락도 살인사건>은 평균적인 60, 70년대 이탈리아 호러영화보다 더 나은 각본을 가지고 있고 연기도 상대적으로 낫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추리물보다 호러물로서 더 잘 읽힌다. 가볍게 등장하는 열녀귀신만 해도 최근 몇년 동안 우르르 등장했던 사다코 짝퉁들을 합친 것보다 더 낫다. 이 귀신은 분명한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관객의 기시감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고립된 마을에서 연달아 발생하는 난도질 학살도 기본적으로는 관객의 논리와 이성보다는 신경에 호소한다. 관객이 자극장면을 접할 때마다 비명을 질러대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관객에게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전달하는 건 불안과 공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극락도 살인사건>이 호러영화로서 자의식을 갖추지 않은 건 아쉬운 일이다. 이건 이 영화가 다리오 아르젠토나 마리오 바바처럼 피투성이 난도질 장면을 더 넣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이 영화의 유머와 서스펜스, 호러의 비율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마지막 한방이 모자란다. 그리고 그건 영화의 배합문제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다소 장황하고 해설투인 결말 탓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 빈 공간은 영화가 장르 영역에 놓여 있는 위치와 관련있다.

어떤 영화가 호러영화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내용보다는 그 내용을 다루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아주 능숙하게 호러영화를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주변을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쉬운 일이다. 이 전라도 지알로 영화는 최근 몇년 동안 나온 한국영화 중 가장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호러영화에 가까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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