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처절하게_ 이영애
그에게 <친절한 금자씨>는 배우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같았다.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 등의 국제적 인지도는 덤이었다. “연극적인 데가 있는 작품이었다, 브레히트적인 ‘거리두기’가 두드러지는.” 금자는 낯선 인물이었다. 자신의 감각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도전해야 했다. “너나 잘하세요” 같은 짧은 대사에도 고민이 많았다. “솔로 해도 되고, 파나 미로 해도 되는 연기 아닌가. 그래서 더 어려웠다.” 감독으로부터 ‘한번 더’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복수를 끝낸 금자의 일그러진 미소 장면에 이르러서는 “100% 금자에 가장 가까워진 상태”로 편하게 찍을 수 있게 됐다.
<친절한 금자씨>는 이미지의 장벽을 높게 쌓아올린 CF의 여신이란 대중의 편견에 분명한 균열을 냈다. 하지만 이날의 힘든 사진촬영 내내 범접하기 힘든 미소를 유지하던 그는 여전히 신비스런 아우라에 몸을 숨긴 까다로운 여배우로 보이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은 그런 모호함을 그의 재산으로 꼽는다. “때론 아주 얇은 표면만 있는 사람 같고, 때론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 같다. 그게 매력이다.” 이날 이영애는 3부작 중 <복수는 나의 것>의 신하균의 처절함을 연기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직도 알 수 없는 이 배우, 다음 변신이 기다려질 수밖에.
복수는 영원히 나의 것_ 박찬욱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던 당시, 박찬욱 감독의 머릿속엔 3부작은커녕 <올드보이>에 대한 구체적인 상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복수’라는 키워드로 3부작을 만들어낸 것은 즉흥적인 오기의 발로라고 보는 편이 맞다. <올드보이> 제작발표회장에서 한 기자로부터 ‘복수에 관한 영화를 연달아 만드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순간 기분이 상했다. “그 말은 마치 <복수는 나의 것>이 흥행에 참패한 마당에 뭐 좋은 아이템이라고 복수 영화를 또 만드느냐, 라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그야말로 홧김에 ‘10편도 만들 수 있다. 실제로 3부작에 대한 계획이 있다’고 말해버렸다.
그러니 <친절한 금자씨>는 ‘홧김에 프로젝트’라 말해도 변명거리가 없을 듯 보인다. “아니다. 뱉은 말에 대한 책임보다는 나에게 이미 내적 동기가 충분히 주어져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해 있던 여자주인공을 내세우는 영화는 묘하게도 ‘복수’라는 키워드와 결합됐고 마침내 <친절한 금자씨>로 합체한 것이다. 결국 그는 <친절한 금자씨>의 결말을 통해 ‘복수 3부작’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박찬욱 인터뷰
“신하균의 아킬레스건이
끊기는 장면을 1초만 줄이고 싶다”-복수 3부작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올드보이>를 만들면서 세 번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나조차도 <올드보이> 이후 곧바로 세 번째 복수 시리즈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리고 홧김에 3부작에 대한 말은 했지만, 실제로 만들어질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세 번째 영화는 언제 찍냐고 물어보면 나중에, 라고 말하면서 계속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웃음), 어찌하다보니 이어서 만들게 됐다. 하여간 내 입장에서는 다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복수극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저토록 다를 수 있단 말인가’라는 반응을 받기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 비슷하던데’라고 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웃음) 그런 반응이 섭섭하긴 한데, 내가 계속 우기고 싶은 것은 그건 선입견이 많이 작용한 결과라는 거다. 내가 이 3부작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딱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세편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굳이 복수에 관한 영화 세편을 잇따라 만들 필요까지 있었을까.
=따지고보면 세상에는 복수심이라는 감정을 다루는 영화가 무수히 많다. 서부극이 다 그렇고, 심지어 사랑 이야기 중에도 상대방에게 배신당한 뒤 복수심이 동력이 되는 이야기가 많다. <스타워즈> 또한 결국엔 복수극 아니냐.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복수극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복수, 복수심이 특별한 영화적 소재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연거푸 만든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토록 특별해 보인다면 그런 것을 특징으로 묶어서 하나의 패키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친절한 금자씨>가 가장 어려웠을 것 같다. 여기에서 3부작을 완결지어야 했을 테니까.
=결국에는 완결이 됐다고 생각한다. <친절한 금자씨>의 결말에 이르러 복수라는 행위가 끝나고 난 뒤의 회한과 후회, 그리고 그럼에도 구원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보인다. 금자씨가 눈내리는 하늘을 보는 행위 등이 시리즈를 정리하는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그리고 폐교 시퀀스 전체가 복수극에 대한 메타영화 같은 의도를 갖고 있었다. 처형장면을 지켜보는 금자씨의 입장이 이 복수극의 관객과 동일시되면서 이런 종류의 드라마를 만드는 것,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제기하려 했다.-3부작을 통틀어 개인적인 기억이 담긴 장면 하나만 꼽는다면.
=힘들지만 굳이 고른다면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 선생을 매장하고 나서 금자씨가 짓는 복잡한 표정의 클로즈업이 시리즈를 가장 대표하는 이미지가 아닐까. 복수 행위에 대해서 갖게 되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표현된 장면 같다. 복수를 하는 사람이자 남들에게 복수의 장을 마련해주는 연출자이자 관객이기도 한 금자씨가 모든 행동을 마무리짓고 나서 갖는 감정이 감독으로서 내가 갖는 감정과 어느 정도 닮았다고 생각한다.-캐스팅과 관련된 비화가 있다면.
=송강호가 <복수는 나의 것> 때 여러 차례 사양해서 다른 많은 배우를 찾아갔고, 또 딱지 맞았던 일이나 <올드보이>의 우진 역을 많은 배우가 거절했던 점? 송강호가 거절했을 때는 최민식, 설경구, 한석규, 안성기, 이병헌 등에게 제의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그래도 고마웠던 게 모두가 ‘아니 왜 이런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거야’라면서 나를 염려해줬다. (웃음) <올드보이> 때는 한석규씨가 가장 근접했는데 무산됐고, 최민식씨가 유지태를 기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배우의 물리적인 나이 차이를 무시하자고 생각했다.-만약 복수 시리즈의 4부를 만든다면 어떤 영화가 될까.
=더 만들 수도 있겠지만, 만약 4번째가 나온다면 이전 3부작과 구별되는 무언가가 될 것 같다. 일단 당장 잡혀 있는 영화들이 있어 시간적으로 한참 뒤에 만들어질 것이니 나도 변하지 않겠나. 지난번 최양일 감독님과 나눴던 얘기지만 나도 하나의 시기가 종료된 기분이 든다. 그래선지 지금은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기다. 그래서 이후에 만들어질 영화는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3부작을 통틀어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장면이 있다면.
=너무 많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모르는 와중에 굳이 내가 얘기할 필요가 있나. (웃음) 한 가지 생각 난다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신하균의 아킬레스건이 끊기는 장면을 1초만 줄이고 싶다.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 (웃음)-<박쥐>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하지만 당분간 작업을 못할 것 같은데, 5월까지 영화제 일정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동안 책 읽고, 영화 보고, 음악 듣는 일을 너무 못했는데 그런 시간을 좀 갖고 싶다. 지금 읽는 것은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만화도 있는데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다.-<씨네21>이 창간 12주년을 맞았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좀더 도발적이고 논쟁적이 돼다오, 다. 만약 <씨네21>이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기사를 즐겨 쓴다면 내 입장에선 독자로서의 재미보다 업계 종사자로서의 피해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다뤄질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고보니 이 얘기를 괜히 했나. (웃음) 선정주의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진정한 프로라면 그런 비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영화계는 산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활력을 잃은 것 같은데, 부디 활력을 자극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