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개그가 연기에 물들다
2007-05-03
글 : 최하나
사진 : 오계옥
<이대근, 이댁은>의 안선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 안선영은 개그맨이다. <결정! 맛대맛> <TV 종합병원> <스타 골든벨> 등 쇼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이자 드라마나 영화에서 코믹한 감초 역할을 주로 맡아온 ‘웃기는’ 연예인이다. 그렇다면 <이대근, 이댁은>의 안선영은 어떨까. 늙고 지친 노인 이대근의 딸 경숙은 아버지를 가정 파탄의 주범으로 맹렬하게 몰아붙이고,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들어 어머니 제사상에 절 바치길 끝내 거부하는 극악스러운 여자다. 수다스런 웃음을 지우고, 대신 짙은 생활의 피로를 그려넣은 안선영의 얼굴. 의외라는 표현은, 이럴 때 적합하다. “남자들이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뭐 감동받겠지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애가 나오면 다 운다고 하잖아요. 영화를 보는 제 마음이 그랬어요. 정말 바보같이 펑펑 울었어요.”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실. 안선영은 개그보다 연기를 먼저 시작했다.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시절 워크숍 공연 주인공 자리를 꿰차던 “카리스마 선배”였고, 이윤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의 아그네스>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반년 가까이 지속되던 극단 생활을 접은 뒤에는 뮤지컬을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훌쩍 영국 유학을 떠났다. “혼자 바게트 하나 가방에 꽂고, 거리 공연을 보러 다녔어요. 김치 담가서 돈 벌고. (웃음) 대학 준비과정을 밟으면서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IMF가 터지는 바람에 결국 한국에 돌아오게 됐죠.” 유학 자금을 마련해 다시 떠나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고, 졸업과 동시에 케이블 방송 아나운서 자리를 얻었다. 그러던 중 개그맨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에게서 함께 공채를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월차를 내고 3일 동안 아이디어를 짰어요. 근데 친구가 1차에서 떨어지고 저만 올라가게 된 거예요. 그래서 과감하게 한다는 것이 장애인 흉내를 냈는데, 원래 방송용으로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개그였죠. 근데 심사를 보던 당시 MBC 국장님이 웃다가 의자에서 떨어지신 거예요. (웃음) 얘 정말 골 때린다, 또라이 하나 들어왔구나, 생각을 하셨대요. (웃음)”

얼결에 연예인이 된 셈이지만, 역으로 “뿌리가 없어” 더욱 거리낌없이 대찬 성미에 이곳저곳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는 어느새 쇼 프로그램, 드라마, 영화를 오가는 이른바 “만능 엔터테이너” 대열에 합류했다. 함께 연극을 하던 사람들로부터는 “쉽게 돈 벌려 한다”는 비난을, 개그맨 선배들로부터는 “네가 무슨 개그맨이냐” 하는 핀잔을 들었지만, 다시 연기에 발을 담그기 위해 마음고생은 기꺼이 감수했다. <애정만세> <장밋빛 인생> <미스터 굿바이> 등 드라마, <어린 신부> <작업의 정석> 등 영화를 거치며 작은 역할부터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찾아나갔다. 물론, 개그맨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속된 말로, 까인 적이 정말 많아요.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어요. 두고 봐라. 나중에는 네가 나를 꼭 찾게 해주겠다, 하면서. (웃음)” <이대근, 이댁은>을 선택한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었다. 정극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과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주고 말리라는 집념. “영화사에서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더라고요. 제 기존 이미지가 있으니까. 그래서 화장도 안 하고 영화사로 직접 찾아가고 그랬어요. (웃음) 조금 이기적인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가 흥행이 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제 연기를 보고 안선영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려준다면, 그것으로 저는 만족해요.”

안선영이 말하고 싶은 사실. 연극을 하다가 개그맨으로, 다시 배우로 먼 길을 걸어 연기로 돌아왔지만, 후회는 없다. “만약 연극을 하다가 바로 영화로 왔다면 좀 자만했을 것 같아요. 다시 단역부터, 말하자면 양념 역할부터 시작해서 건더기로 서서히 몸을 부풀리면서 그만큼 강해진 것 같아요.” 연기에 대한 욕망과 열정이 누구보다 강한 그이지만, 난 이제 연기자야, 보란 듯 선언을 하거나 일시에 변신을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의 희망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관객에게 다가서는 것. “시무라 겐을 보면, 평소엔 막 웃기다가 영화에서 심각하게 나와도 사람들이 아무런 어색함없이 받아들이잖아요. 그렇게 되는 것이 지금 제 목표예요. 스타가 되고 싶은 건 아니고요. 코미디, 영화, 방송하는 게 다 어색하지 않은 한 부류, 그런 새로운 문화의 대표주자가 되는 게 제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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