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영화 작가 하룬 파로키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회 저변의 많은 이슈들을 자기만의 독창적 영화 방식으로 분석해왔다. 노동, 역사, 포르노산업, 테크놀러지 등에 관한 주제를 다뤄왔고 그 주제를 둘러싼 이미지 생산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더불어 풍성한 영화 구조의 탄생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시종일관 심각하고 무거운 어투의 소유자이지나 않을까 조금 걱정 했는데 의외로 명랑한 그는 진지하지만 여유로웠다. 디지털 삼인삼색 중 <베스터보르크 수용소>를 만들었고 특별전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를 만났다.
-철학이나 사회학 연구를 했어도 꽤 석학이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잡지 편집장도 오래 했고.
=20대 초반부터 영화를 했다. 처음 관심 분야는 사유와 글쓰기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사유와 이미지의 상관관계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영화에 빠져들게 됐다. 내가 남의 영화를 사유하는 것과 내 영화를 새롭게 고안해내는 것 양쪽이 다 중요한 일이다. 문학에서도 창작과 비평이 같이 있지 않나. 내 영화를 예로 들면 나는 영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내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의 영화에 대해 사고하기도 한다. 그것으로 나의 영화를 다시 또 발전시킬 수도 있는 거고.
-당신의 영화를 볼 때면 어떤 이미지 교육학 수업을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누군가를 훈계하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 단지 제안하는 건 결과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과정을 보여줄 때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교육학이라면 훈계조의 교육학이 아니라 단지 보여주기의 교육학일 거다. 내가 언제나 우선시하는 건 의문을 던져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의문을 통해 인간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 그 생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영화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만약 교육이라면 그 구성을 반복하고 변주하여 사유를 유도하는 교육이겠지. 음악적으로 비유하자면 중요한 마디를 여러 번 변주 반복하는 것이랄까. 하지만 다시 말해도 그게 훈계의 뜻은 아니다.
-당신이 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에게 영향 받았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지금에 와서 보면 좀 과장인 것 같기도 하고, 초창기를 보면 배운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스트라우브-위예와 나를 연결하여 말하는 평은 나도 들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페드로 코스타가 정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내 경우에는 내가 찍지 않은 자료들만 모아 만드는 식의 영화도 있지 않나. 굳이 그들과 연결점을 찾자면 아마 영화의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한 태도일거다.
-요즘 당신의 흥미를 끄는 사회적 이슈는 어떤 것들인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가 항상 질문하는 것. 이 사회를 지탱해나가는 원동력이 무엇이고 그 목적지가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 둘째는 도저히 풀리지 않을 난제들. 가령 전쟁 같은 매우 야만적이고 끔찍하고 원초적인 부분들. 이런 게 우리의 문명이나 일상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경우들.
-삼인삼색 중 하나인 <베스터보르크 수용소> 역시 그런 연장선상이다.
=2년 전 어떤 회의 차 출장을 가게 됐는데 거기서 유태인 학살을 주제로 한 토론을 하면서 사진과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를 다시 보게 됐는데 흥미로운 장면들이 있었다.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에 내리는 장면 등이다. 그걸 계기로 아우슈비츠 영상 기록에 마음이 끌렸고 그 뒤에 거기에 관한 영상자료가 많다는 네덜란드까지 가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그게 발단이었다. 영상 기록 자료들을 보면서 나는 유태인들의 학살 장면을 이렇게 우리가 다시 이미지로 봄으로써 우리는 이미 죽은 저들을 두 번 학살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영화 형식의 고통을 깨닫게 된 거다. 그런데 마침 이런 끔찍한 자료들 중에서도 학살당하기 직전의 유태인들이 마치 일반적인 사회나 가정에서처럼 그 수용소 안에서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걸 보게 됐고 그게 매우 흥미로웠다. 어떤 중요치 않은 장면인 듯 하지만 그게 갑자기 큰 의미로 다가오는 현상이랄까. 일상에서 불현듯 보이는 긴장감 말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내 식대로 조합하여 만든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냥 커피마시는 장면에서도 그런 의미와 긴장은 생기기 마련이다. 사소함 속의 새로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