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의 중간쯤에 보면 오래간만에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나러 프랑스에 온 요제프 2세가 동생의 방에 있는 과자를 먹는 장면이 있다. 한입 베어 문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외친다. “도대체 넌 이런 걸 어떻게 먹니?”
그러게 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나오는 케이크들과 과자들은 결코 먹음직스럽지 않다. 그것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핑크색이며 한입 삼켜도 슈거 러시로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달아 보인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고 나온 관객 때문에 극장 주변 케이크 가게의 매출이 오르지 않았다는 건 거의 확신해도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과자들은 어른들의 음식이 아니다. 당도에서부터 모양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해 영화 내내 이 케이크와 과자들을 꾸역꾸역 먹어대는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코 성인 수준의 정신연령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화에 나오는 케이크 같은 영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짝지근하고 파스텔조로 예쁘다. 하지만 그건 관객의 감각적인 쾌락과 대리 충족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이 영화의 모양새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슈거 러시와 같은 가벼운 두통과 불쾌함, 이질적인 거부감을 주기 위해 디자인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으로만 본다는 말은 아니다. 영화의 관점은 버릇없고 생각없는 부잣집 친척 아이를 바라보는 성인 여성의 시점에 더 가깝다. 영화는 주인공의 어리석음과 짧은 생각, 낭비벽과 무책임함을 정확히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주인공에 대한 애정을 버릴 생각까지는 없다. 어떻게 보면 그 무책임한 삶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묘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애정표현인 셈이다.
물론 우선순위에 대한 지적은 언제나 가능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베르사이유 궁 안에 폭 박혀 친구들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내다 목이 날아간 ‘부채 부인’보다야 이후 세계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다. 여러분이 진지한 역사광이라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 역시 이 거대한 역사적 이벤트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소피아 코폴라가 그 의견에 동의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영화의 소재를 고르는 건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구명보트에 탈 사람들을 고르는 것과는 다르다. 타이타닉의 구명보트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깡그리 무시하고 심지어 왕비의 목걸이 사건도 은근슬쩍 건너뛰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영화를 만드는 건 법률 위반이 아니며 그런다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꽤 정확한 기술이기도 하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이유 궁의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고 그에 대단한 관심도 없었다. 혁명 직전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개인적이었고 가벼웠으며 애들 같았다. 그렇다면 막판에 일을 완전히 망치기 직전까지 그 개인적이고 가벼우며 어린아이 같은 무책임한 삶을 보여주는 건 오히려 모두에게 공정하다. 심지어 왕비의 목걸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고 건너뛰는 것도 이렇게 보면 이치에 맞는다. 목걸이 스캔들은 분명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큰일이었다. 그러나 소피아 코폴라가 보여주고 싶어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생에서 그것은 충분히 지나쳐도 되는 문젯거리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가 가치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까?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이 영화가 아무런 감흥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증거도 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난 이 한없이 얄팍한 인물을 다룬 그만큼이나 얄팍한 내용의 전기영화의 뒷맛이 은근히 강하다고 말할 것이다. 기대치를 정확히 잡고 보는 관객에겐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말은 거의 비토리오 데 시카의 <핀지 콘티니스의 정원>의 결말과 같은 수준의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경박하고 어리석은 왕족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베르사이유궁의 작은 소꿉놀이 공간에서 평생 책임감없는 삶을 살다가 끝까지 어른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한 한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어울리지 않는 세상과 충돌해 목숨을 잃은 그 여성을 동정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누렸던 사치를 부러워할 수도 있지만, 그 어른의 몸 속에서 미성숙한 상태로 남아 천진난만하면서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소꿉놀이를 즐겼던 소녀로서는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의 천국을 향수 섞인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아마 코폴라가 노렸던 것은 후자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관객이 꼭 그 관점에 동참해야 한다는 법도 없으니, 이런 선택에서 강요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