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황진이> 배우들에 집중해서 봐줬으면 좋겠다
2007-06-07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황진이>의 장윤현 감독 인터뷰

“데뷔할 때보다 더 떨린다.” 스탭들과의 첫 시사를 끝내고 앉은 자리. 장윤현 감독은 지난 1년여의 시간이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치느라 “몇편의 영화를 찍은 것 같다. 영화공부를 새로 할 수 있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는 소회부터 털어놓는다. 스탭들이 갈빗집으로 몰려가 회포를 푸는 사이, 촬영에만 7개월이 걸린 <황진이>를 보듬느라 속이 시커멓게 탄 감독의 말을 들었다.

-원작을 처음 읽은 게 언제인가.
=그때가 언제더라. (웃음) 1996년 아니, 2006년 아니, 2005년 가을쯤인가? 시네마서비스에서 투자 결정을 한 다음에 읽었다. 투자했다고 해서 읽어봤는데, 책이 아주 좋아서 일단 회사가 투자를 잘했구나 그랬다. 그런데 김인수 대표님이 연출할 생각이 없냐고 해서 ‘하면 좋죠’ 하긴 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일단 발을 좀 뺐다가 언제 이런 작품을 만나겠느냐, 이게 기회라면 기회다 싶어서 받아들인 거다. 이춘연 씨네2000 대표님한테 제가 연출할 수 있을까요 했더니, ‘한다고 했으면 해야지’라고 하셔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원작을 읽었을 때 기대와 우려를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인물의 심리를 풀어내는 글의 문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드라마틱한 구조가 맘에 들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놈이를 등장시켜서 출생의 비밀을 반전으로 풀어내는 것도 좋았고. 반면 방대하고 큰 이야기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지는 굉장히 걱정스러웠다. 다 만들고 난 지금도 두렵고 무섭다. 내가 잘한 짓인가 싶다. (웃음)

-그동안 <접속>부터 <썸>까지 다양한 장르영화를 만들어왔다. 전작들을 보면 장르 자체를 즐긴다기보다 장르라는 그릇 안에 어떤 시대성을 담아내고 싶다는 욕구가 더 크게 보인다. 왜 <황진이>였는지 궁금하다.
=특별한 여자여서다. 조선시대는 역대 많은 왕조 중 여자들이 가장 많이 억눌렸던 시대 아닌가. 그 시대에 살았던 이들 중 후대에 알려진 이들은 궁에 있었거나 양반가에 있었던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장금이가 있긴 하지만. (웃음) 조선은 지식이든 권력이든 집중화된 시기였고, 여성은 남성의 벽을 뛰어넘기가 불가능한 시대였다. 그런데 황진이는 살아남았다. 특별한 여자였고, 혁명적인 여자였다. 내가 대학 다닐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가장 많이 달라진 게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다. 여성이 사회를 움직이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시대를 조롱했던 황진이를 보며 여성 관객도 내면의 동질감과 희열을 느낄 거라고 본다.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영화들은 갖고 있던 아이디어를 펼치는 것이었다. 반면 원작이 있는 <황진이>는 가지치기를 해야 했을 텐데.
=둘은 전혀 다르다. 감독으로서 이번 영화가 굉장히 고마운 경험이다. 이전까지는 내 머릿속에 갖고 있던 생각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니까 대단히 주관적인 게 있었다. 관객한테 어떻게 비칠지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다. 반면 이번 영화는 시나리오 쓰고 콘티 짜고 촬영장에서 찍고 편집하고 녹음할 때까지 계속 바꿨다. 다시 찍고, 대사 바꾸고, 편집 달리하고. 원래 콘티 쓰면 그대로 찍는 주의인데 이번엔 아니었다. 원작의 에피소드를 다 쓰지 못하기 때문에 각색에 각색을 하면서도 또 이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원작의 맛이나 힘이 떨어질까봐 걱정도 하고. 내가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것 아닌가 계속 생각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렇게 마지막까지 숙고해야 하는 것이 영화가 아닐까 싶더라. 지금까지는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거지.

-성장한 놈이와 진이의 첫 대면이 인상적이다.
=다시 찍은 장면이다. 놈이는 어릴 적 진이와의 기억을 품고 있는데 돌아와서 보니 놀랍게 변해 있고, 그러면서 신분도 다르고 근접하기 더 어려워져 있음을 깨닫는다. 처음에는 진이의 시점에서 풀었는데 최영택 촬영감독은 이 장면의 콘티를 놈이 시점에서 읽었더라. 그러면서 진이와 놈이의 공간을 좀 분리하자고 해서 발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했는데, 다음날 가서 보니까 관객한테도 진이의 모습이 처음 보이는 장면이고 놈이 시점으로 진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다시 찍었다. 희열과 진이가 만나는 장면도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던 것인데, 배경이 조선 중종 때니까 학문이나 권위가 강고하게 자리잡던 시기에 지금까지 남을 정도로 황진이가 시문에 능했다면 희열이라는 인물도 그녀의 미모나 거문고보다는 시문 실력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만들어 넣었다.

-원작과 비교하면 놈이의 비중이 크다. 남녀의 로맨스에 너무 집중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황진이의 사랑은 좀 특별하다. 그냥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다. 평등한 세상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이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자기 신념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그런 세상을 밝혀줄 사람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놈이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진이는 놈이에게 낙원을 만들며 살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인다. 진이의 계급적 변화는 놈이 때문에 만들어졌고, 진이가 그 변화에 해탈하고 사랑으로 정리하면 되겠다 싶었다. 여기에 희열이 덧붙여져서 삼각관계를 통해 계급적인 갈등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라고 봤고.

-화적의 우두머리가 된 놈이가 새로운 공동체를 도모하고, 관군과 싸우는 장면에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5·18이 떠오르더라.
=의도하고 찍은 건 아니다. (웃음) 다만 우리가 지나온 경험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화적들의 산채 장면은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다. 진이가 이곳에서 놈이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구나, 자신이 꿈꿨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엔딩에 이 공간이 침범당하는 장면이 진이가 안타까워하는 장면과 교차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 시간적인 여유 때문에 카메라에 그림을 많이 못 담았지만 미술감독이 그런 의도를 잘 재현해준 것 같다. 촬영하면서 정말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구나 싶었으니까.

-예인(藝人)으로서 황진이의 모습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예 안 찍었다. 관객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음악을 듣고 요즘 관객이 “야, 정말 좋다”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에 (송)혜교가 춤이나 가락을 배워야 하지 않느냐며 빨리 준비하겠다고 했는데, 하지 말라고 했다.

-배우들을 많이 믿고 따른 편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믿음 전에 감독으로서 시험 단계가 있었을 텐데. 송혜교는 어땠나.
=홍석중 선생이 그러더라. 진이는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울 때나 화낼 때 아름다운 인물로 그려졌으면 좋겠다고.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웃음) 나는 송혜교에게 진이가 울거나 화내는 장면에서 좀더 다중적인 느낌을 원했다. 그래서 출생의 비밀을 듣는 별당장면 촬영 때 일종의 테스트식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특히 아버지의 족자를 잡아 떼내는 장면은 별당 촬영 거의 마지막에 찍었는데, 저걸 잘해내면 뒷부분은 쭉 가겠구나 싶었다. 나도 굉장히 긴장했는데, 실제 촬영 때 단 한번의 테이크로 끝내더라. 배우에게 맡기고 가도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들었다. 놈이는 원작에서는 임꺽정 같은 인물이다. 부글부글하고 이글이글한. 그런데 배우가 그건 자기하고 정말 안 맞는다면서 차분하고 다정한 인물로 그려보겠다고 하더라. 결과적으로 배우를 믿고 따라간 것이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

-희열은 호방한 기질의 소유자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치졸한 인물로 그려진다.
=품이 넓은 인물에서 시작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좁아지는 인물로 보였으면 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계급적인 나쁜 습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지. 호탕하지만 진이에게 집착하고 놈이를 질투하면서 그런 습성이 드러나는 거다. 류승룡은 <박수칠 때 떠나라> 때 처음 알게 됐다. <한반도> 시사 갔다가 수염을 멋지게 기른 모습이 몹시 좋아서 술 마시면서 같이 하자고 했는데. 대사의 크기나 말의 속도, 딕션이 정말 좋았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처음 생각보다 클로즈업도 많이 잡았고. 해석이 굉장히 좋은 배우라 도움을 많이 받았다.

-황진이를 프레임의 한가운데에 배치한 까닭은 뭔가.
=관객의 시선을 잡아두고 싶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핵심 인물들을 주로 가운데로 몰았다. 인물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안 보였으면 했다. 지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연출자로선 배우들의 연기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일부러 더 그랬다. 비스타비전 사이즈를 쓸까 하다가 가로가 긴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를 쓴 것도 그런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고. 망원렌즈를 주로 쓴 것도 그렇고. 그러다보니 촬영팀이 고생을 많이 했다. 계속 이동하면서 포커스를 맞춰야 했으니까. 게다가 컷을 나눠서 찍은 게 아니라 한번에 쭉 찍은 터라 더 그랬을 것이다.

-대개 시네마스코프는 스펙터클을 기대하게 만든다. 한 화면에 좀더 많은 것을 담아두고 싶어하는 욕심이 애초부터 없었나. 인물에 집중하겠다는 건 제작여건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듯한데.
=황진이, 송도, 조선시대. 이 세 가지가 영화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게 시작할 때 컨셉이었다. 그런데 현실적인 조건과 거리가 있더라. 송도는 옛날 그림이나 문헌을 통해서 조사해보니 어마어마한 도시인데 재현할 방법이 없었다. CG로 하려고 해도 무슨 베이스가 있어야지. 조형물을 배경삼는 것도 북한 로케이션이 불가능해지면서 안 됐고. 주변 것들이 해결이 안 돼서 결국 시나리오를 다시 만졌고, 그러면서 인물에 초점을 더 맞추게 됐다.

-황진이라는 특정 인물을 다루는데 영화의 시점이 불균질한 것 같다. 그래서 일부 장면에선 순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원작이 그런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시점이 자유롭다. 개인의 시점에서 전지적 시점까지, 챕터마다 다르다. 다른 인물들을 통해 진이를 설명하기도 하고. 원작에는 정혼남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도 있으니까. 그런 방식이 진이라는 인물을 틀 안에 가두지도 않는다고 봤다. 처음에는 통일해서 갈까 하다가 희열이나 놈이가 (황진이에 대한) 정보나 감정의 폭이 제한될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무시하고 가자고 한 거다. 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가도 다시 쭉 빠져나오고.

-황진이와 서화담의 만남을 아주 짧게 처리했다. 세상을 비웃기만 하던 황진이가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는 대목이라고 봤는데.
=길게 가려고 했는데 밀도가 떨어져 보였다. 설명이 길게 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소설은 단순한 사건이라도 감정적인 흐름으로 연결되는데 영화는 아무래도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사건으로 끌고가야 한다. 전반부에 진이가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나 서화담을 만나기 전까지 양반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장면들이나 후반부에 진이가 놈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장면들도 그런 이유에서 쳐냈다. 영화를 1부, 2부 이런 식으로 만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코믹한 설정은 거의 없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준비하고 만든 영화를 보아도 코미디는 없다.
=또복이 친구들이 나오는 장면이나 놈이 몽타주를 그리는 장면을 좀 코믹하게 가보려고 했는데 찍어놓고 보니까 어색하더라. 괜히 욕심 부렸다가 영화 전체에 악영향을 줄 것 같고 그래서 포기했다. 코미디는 보는 건 좋아하지만 그건 다른 재주의 문제인 것 같다. 강우석 감독님이나 김상진 감독의 영화는 못 찍는 거지. 지금까지 영화들은 멜로나 인간의 심리를 장르를 바꿔가며 다뤄왔는데 앞으로도 코미디는 좀. (웃음) 웃기는데 그닥 재주가 없는 것 같다.

-촬영에만 7개월이 걸렸다.
=예상 못한 게 있다. 현대물이면 현장에 가서 뭐가 부족해도 즉시 해결이 된다. 장소가 맘에 안 들면 다시 섭외해서 다음날 찍으면 된다. 사극은 그게 전혀 불가능하다. 일정과 상황을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부안에 가서 찍는다고 하면 2, 3일 전부터 준비하러 내려가서 점검해야 한다. 다른 데로 이동해서도 마찬가지고. 일주일에 2회 이상 찍기가 어려웠다. 한달에 10회 많으면 15회 정도 찍을 수밖에 없었고, 촬영기간이 자연히 길어지더라. 여유로운 것 같지만 정말 촬영기간 내내 바빴다.

-감독이 아니라 제작자로선 이런 규모의 사극을 다시 할 수 있겠나.
=몰랐다면 했겠지만 알고 났으니까. 사극의 묘한 매력이 있어서 안 한다고는 못하겠고. 부담이 생기겠지.

-새로움과 익숙함을 기대하는 관객 사이에서 상반된 평가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문자화한 황진이를 실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인물을 보여주고 싶었으니 배우들에 집중해서 봐줬으면 좋겠고. 그래도 불만족스럽다면 내가 연출을 못한 거다.

-다음 작품은 뭔가.
=그걸 생각할 시간이 있었겠나. 요리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황진이> 전에 프랑스 요리를 하는 아기자기한 요리사 이야기를 준비하던 게 있다. 큰 공부했으니 뭘 해도 이젠 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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