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2월25일자 <경향신문>은 이봉래를 “예술의 ‘앙가쥬망’을 지론으로 삼고 있는” 감독으로 소개한다. 4·19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공간에서 이봉래는 유현목과 함께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대표적인 사회참여(engagement)형 감독이었다. 전쟁 이후의 엄혹한 반공주의 속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사위이기도 했던 그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희극 속에 진지함을 담아내는 ‘진경’(眞境)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유현목이 다소 직설적인 화법으로 부조리를 폭로했다면 이봉래가 선호한 방식은 “카리카튜어”를 만들어내면서 우습고도 쓴맛의 풍자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50년대에 모더니즘 시 운동에 동참한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민초들의 힘으로 열린 공간에서 유현목과는 무척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고발하는 실천을 감행했다. 이번에 소개되는 네편의 영화들은 그러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4·19 이듬해인 61년 5월에 개봉한 <삼등과장>의 ‘삼등’(三等)은 말 그대로 등급화된 사회 질서를 표현한 것이다. 언뜻 봐도 당대의 부조리한 권력에 대한 풍자로 보이는 이 작품은 “4·19가 있어도 변한 게 없어”, “정치가란 모두 도둑놈이란 말이오!” 같은 노골적인 대사가 놀라운 작품이다. 전무가 방귀를 뀌자 옆에 있던 직원이 “전무님! 속이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무너진 이승만 정권 당시 어느 장관이 행했던 아부를 그대로 인용한 것. 4·19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것이 분명한 이런 표현들은 개봉한 얼마 뒤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의 지시로 상영을 금지당하는 단초가 된다.
62년 7월에 개봉한 <월급쟁이> 역시 비슷한 맥락에 있는 가족 코미디이다. 날선 비판의 표현들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부조리 속에 갇힌 가부장의 위기는 더욱 극단화된다. 주인공은 사장이 부재중인 회사를 꿰차려는 상사들의 계략에 휘말려 실직으로 내몰린다. ‘사장이 없는 회사’에 대한 위태로운 묘사는 4·19에서 5·16, 5·16에서 개헌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한 반영으로 보이는데, 이 모든 위기를 타개하는 주체가 ‘돌아온 사장’과 ‘문학을 하는 젊은 후배’라는 설정 또한 흥미롭다. 그 둘은 아마도 정국을 바로잡을 강력한 국가권력 그리고 4·19의 주도세력이었던 젊은 지식인층을 각각 은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이는 당시 박정희 시대 초기에 진보적 지식인들이 보인 지지 경향과 연관지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같은 해에 제작되어 이듬해 ‘신정 푸로’로 개봉한 <새댁>은 62년에 대히트를 친 김영수 원작의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하여 만들어졌다. 서울의 대가족 막내며느리로 시집 온 시골 여인 ‘섭섭이’(도금봉)의 애환이 극복되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가족제도는 낡아빠진 유물”이라고 외치는 두 인텔리 동서들과 그녀를 대비시키고 있다. 지역과 학력, 재력의 격차 속에서 두 여성 집단을 대비시킨 것은 아마도 당시 이 연작의 주된 청취자-관객이었던 하층계급 여성들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겠지만, 다짜고짜 손찌검부터 하는 남편들은 그대로 둔 채 맏며느리가 회개함으로써 화목이 찾아온다는 결말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아마도 이번 회고전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일 <육체의 문>은 1965년에 만들어진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파격적이다. 70년대에 유행한 ‘호스티스 멜로영화’의 원형이라고도 할 만한 이 작품은 속칭 ‘터키탕’이라는 곳에서 일하는 여성의 비극적인 사연을 담고 있다. 시골에서 시집 온 ‘섭섭이’가 인텔리 동서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모와 다를 바 없는 순종형 며느리의 길을 택했다면, 돈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은숙’(김혜정)은 포주 노파의 꼬임에 빠져 성매매의 길로 빠져든다. 대가족의 남성연대를 지지했던 <새댁>에서와는 달리 이 작품의 남성들을 향해서는 긍정의 시선이 보이지 않으며, 세상과 타협하려는 주인공의 노력도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막연한 희망을 착각하게 하던 62년과 달리 65년에 이르면 더이상의 희망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카메라의 시선은 냉담하고 또 건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