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봅시다]
[알고 봅시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사살과 고문
2007-07-26
글 : 이영진
영화 <화려한 휴가>가 재현한 1980년 5월 그날, 광주의 실제 비극

“난 <실미도> 안 봤는데 잘 됐다.” <화려한 휴가> 일반시사에서 엿들었던 한 10대 관객의 말이다. <씨네21> 독자편집위원회 막내인 중3 전영랑씨도 영화 예고편을 보고서 엄마에게 물었다고 한다. “진짜 저렇게 총을 쐈단 말이지?” 1980년 5월 광주를 제2의 실미도로 받아들이거나, 계엄군의 집단 발포 사실에 설마 하고 고개젓는 이들, 여기 주목!(아래 내용은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과 5·18기념재단의 상황일지를 주로 참조)

1. 작전명 ‘화려한 휴가’

영화는 ‘화려한 휴가’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1980년 5월17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여론의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데,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 병력에 떨어진 작전명이 바로 ‘화려한 휴가’였다. 같은 해 2월부터 신군부는 특전사를 중심으로 ‘충정훈련’이라는 강력한 폭동진압 훈련을 시작했고, 군인들은 “외출과 외박이 전면금지된 상황에서”, “시위 군중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빨갱이를 때려잡기 위한”‘인간폭탄’이 되기를 강요받았다. 특히 광주로 내려오기 전 3일 동안 이들은 “식량 배급도 받지 못했고”, 총검을 휘두르기 직전 소주만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제2의 실미도에 갇혀 있던 셈이다. “전라도 새끼 40만은 전부 없애버려도 끄떡없다”는 명령을 받은 이들은 평생 찾아들 죄의식을 담보로 화려한 휴가를 즐겼고, 살육에 격려금을 아끼지 않으며 제2의 유신정권을 꿈꿨던 ‘군바리’들은 그 수혜를 톡톡히 얻었다.

2. 인간의 탈을 벗어젖힌 악귀들

“꽃잎처럼/금남로에/뿌려진/너의/붉은 피/두부처럼/잘리워진/어여쁜/너의 젖가슴/오월/그날이/다시오면/우리/가슴에/붉은/피 솟네.” 공수부대의 유린과 난자 속에서 살아남는 것 또한 고통이었다. <화려한 휴가>에선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으나 당시 지옥 광주를 경험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성 잃은 군인들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수부대가 아닌 “20사단 군인들조차” 포박당한 시민들을 상대로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들을 자행했다.

3. 폭도인가, 자위인가.

5월21일 오후 1시. 공수부대 철수 약속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술렁이던 10만명의 시위대를 향해 애국가가 울려퍼졌고, 이를 신호탄으로 군인들의 총구는 불을 뿜었다. 아스팔트에 쓰러진 이들을 확인사살하기까지 한 이 엄청난 집단발포로 54명이 죽고 무려 500명 이상의 총상자가 발생했다. 헬기 기총사격까지 가한 무지막지한 집단발포로 광주항쟁은 무장투쟁으로 변한다. 오후 4시부터 화순, 나주 등의 경찰서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민군이 시가전을 전개했는데, “그들의 직업은… 대부분 노동자, 목공, 공사장 인부 등 직접 노동에 종사하거나 구두닦이, 넝마주이, 술집 웨이터, 부랑아, 일용품팔이 등등이었”다. 시민군은 영화의 인봉과 용대처럼 ‘사회최하층’이 대부분이었는데, 신군부가 작전상 후퇴를 하면서 유포한 ‘폭도론’이 타 지역에서 기막히게 먹혀들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도부 없는 이 예외적 투쟁은 그러나 누구나 자발적으로 총을 든 예외적 항쟁이었다. 해방구가 된 5월22일 시민궐기대회에는 양대 폭력조직인 ‘오비파’와 ‘화신파’의 두목들까지 연단에 올라 협력을 다짐했다 .

4. 언론의 입에 재갈과 사탕을 물려라!

<화려한 휴가>

“고정간첩들과 불순분자들에 의해 현혹된 시민들이 시위 대열에 가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극렬한 폭도들을 진압하던 군경 30여명이 사상하였으며, 아직까지 시민의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영화에서 도청상황실에 있던 시민군들이 “똥물에 튀겨죽일 놈들”이라며 언론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던 것처럼, 칼을 물고서 펜과 카메라를 놓아야 했던 언론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5월20일 밤 9시50분에 광주MBC가 불타고, 이튿날 새벽 광주KBS 또한 화염에 휩싸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른 곳에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라는 한 외국인의 증언이 일러주듯이, 광주시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건 자신들이 총을 들고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진실에 대한 무지였고 왜곡이었다. 5월27일 도청 함락에 이어 적어도 1/6 수준으로 축소된 144명 민간인 사망이라는 어이없는 게엄사령부의 발표를 들었던 광주시민들이 침묵을 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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