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이 진입하던 그 새벽, 신애는 광주의 거리를 누비며 확성기로 시민에게 도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공포 앞에서는 분노도 힘을 잃는 걸까? 그 새벽에 도청에 고립된 시민군을 도와주러 올 사람들은 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죽음을 각오한 열사들은 영생을 찾아 시민들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광주 시민 여러분, 제발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신애의 애절한 호소는 물론 스크린 바깥에 앉은 관객을 향한 것이다.
문화적 기억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화려한 휴가>는 어떤 면에서 <메멘토>를 닮았다. 두 영화 모두 ‘기억’을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메멘토>가 레너드의 ‘개인적’ 기억을 다룬 반면, <화려한 휴가>는 한국사회의 ‘집단적’ 기억을 다룬다. 레너드는 개인적 기억의 단절을, 신애는 집단적 기억의 단절을 극복하려 한다. 이렇게 기억의 단절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기억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토라’라고 부르는 구약성서의 첫 다섯권(모세5경)이 바로 그들의 집단적 기억이다. 거기에는 유대민족이 신에게 선택받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문화적 기억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유대민족은 디아스포라의 운명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오래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사회는 이렇게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현재화한다. 기념일, 기념식, 기념비 등은 시간적 격리로 인한 망각을 극복하고 과거의 기억을 영원히 현재화하려는 제도적 장치다. 얀 아스만은 이를 ‘문화적 기억’이라 부른다. 기억이 집단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여….”
기억의 전쟁
문화적 기억은 한 사회의 대부분의 성원에게 공유된다. 하지만 기억을 수정하고픈 사람들도 있게 마련. 가령 <조선일보>가 건국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우리 헌법에 기입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사제(私製) 대한민국의 법통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승만 독재는 4·19 민주이념에, 박정희의 친일은 3·1 운동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의 옆차기는 가망없는 위헌적 망동에 불과하다.
최근 박근혜 대표는 5·16을 “구국혁명”이라 불렀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쿠데타의 정의 자체가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의 견해는 집단의 문화적 기억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의 사제(私製) 기억에 머물 뿐이다. 듣자하니 경북 구미에서는 길거리에 박정희의 이름을 붙이려 한단다. 한마디로 사제 기억을 공식화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유난히 애향심이 강한 그 지역에서조차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경남 합천에서는 전두환을 기리는 ‘일해공원’이라는 것을 짓는다고 한다. 그저 사투리로 웃어넘기기에는 도가 지나친 감이 있다. 자기들이 좋아서 기념하겠다는데 이 망발을 굳이 금지할 방법은 없고, 공원 짓는 돈도 결국 자기들이 낸 세금일 텐데, 고작 ‘우리 합천 사람들은 전두환 존경하는 변태예요’라고 고백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쓰는 게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기억 지우기와 고치기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가결됐다. 일본이 이 결의안의 통과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한 것은 그저 과거에 저지른 부끄러운 짓을 잊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들의 기억 지우기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우익적 정체성을 주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 반면 독일 정부는 기억에 관한 다른 정책을 갖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끝없이 홀로코스트의 부끄러운 기억을 현재화하려 한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한국과 일본은 각자 자기 버전의 역사를 가지면 된다”고 말했다. 일본과 한국이 따로 살아왔으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기억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한데 얽혀 있고, 그것도 가해자와 피해자로 관계가 맺혀 있다. 한마디로 그녀는 문화 상대주의의 어법으로 기억의 공유를 거부한 셈이다. 이는 물론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겠다는 얘기다.
한편,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민족의 축복이었다”는 고려대 한승조 교수의 발언, “일본 정부가 위안부를 동원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주장, 한일합방 직후 “민중의 목소리는 세상이 바뀌어서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라는 한양대 임지현 교수의 발언은 민족주의사학에 대한 반발에서 또 다른 민족주의, 일본 우익의 기억(식민지근대화론)으로 달려가버린 예라 할 수 있다.
동상을 둘러싼 싸움은 기억의 정치학이다. 가령 맥아더 동상에 덤벼드는 사람들은 6·25가 남침이라는 기억을 바꾸고 싶은 것이다. 역사학에서 ‘수정주의’라 부르는 입장은 대개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공적 기억을 바꾸어놓으려 한다. 독일의 수정주의는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고, 일본의 수정주의는 남경의 대학살을 부인하고, 남한의 수정주의는 6·25가 남침이라는 사실을 거부한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당시에 <조선일보>의 김대중 전 주필은 광주 시민을 ‘폭도’라 불렀고, 실제로 광주 시민은 오랫동안 공식적 기억 속에서 ‘폭도’로 지내야 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강요한 그 기억은 그저 단기기억에 불과했다. 오랜 싸움 끝에, 광주의 시민군은 오늘날 장기기억 속에 민주화 유공자로 기입됐다. 심지어 한나라당의 정치인들도 이제는 광주를 참배하는 것으로 정치일정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인터넷에 모인 ‘전사모’ 회원이 1만4천명이라 한다. 하지만 어느 사회나 제 분량의 또라이를 갖고 있게 마련이다. 독일사회에도 그 정도 분량의 네오 나치는 서식하고 있다. 문제는 이 소수의 얼빠진 이들이 아니다. 광주의 빛을 바래게 하는 것은 그 기억을 현실정치에서 정략의 수단으로 써먹는 이들이다. 벌써부터 “이 영화의 관객이 500만명을 넘으면 올 대선은 문제없다”는 한심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언젠가 강준만은 세상 다 산 현실주의자의 어조로 내게 “광주 사람들이 대단한 동기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광주가 고작 김대중을 대통령 만들기 위한 것이었던가? 광주의 모 구청에서는 문화수도 만들 재원으로 광주에 518m짜리 기념탑을 짓자고 주장한다. 광주의 피가 민주당과 결탁한 건설업자의 뱃살이 될 모양이다. 그래서 신애의 호소는 더 절절하게 들린다. “광주 시민 여러분, 제발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아르스 메모리아
문화적 기억을 안정화하는 데에는 다양한 수단이 있다. 토라와 같은 경전, 헌법과 같은 법률, 공동체의 역사를 다룬 교과서, 기념비나 기념관 같은 건축물, 세리머니와 같은 퍼포먼스. 하지만 기억을 현재화하는 데에 아마 영화만큼 탁월한 매체는 다시 없을 것이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의 격리를 뛰어넘어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시킨 근원적 사건을 눈앞에 다시 생생하게 현전시키기 때문이다.
약간의 가공을 거쳤으나, 영화에 재현된 모든 상황은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고, 당시에 광주에서 올라온 친구들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 들었던 것들이다. 27년이 흘렀어도, 그 기억을 다시 현재로 체험하는 것은 괴로운 일. 현실 자체의 무거움은 영화를 미학적 평론의 대상으로 삼는 것조차 죄스럽게 만든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도 그 엄청난 체험의 무게감에 그만 눌려버린 걸까?
영화를 기억의 매체로 선택했다면, 기억술을 미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렸어야 한다. 가령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촉각의 현상학을 이용해 관객으로 하여금 전쟁을 상처로 기념하게 한다. <아버지의 깃발>은 유치한 영웅주의를 넘어 전쟁을 기념하는 방식을 더 성숙하고 세련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화려한 휴가>는 어떤가? 도대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겠다는 것인지, 컨셉이 뚜렷하지 않다.
광주를 모르는 세대의 눈앞에 광주의 참상을 보여주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는 않은 것일까? <화려한 휴가>는 과거를 현재화하는 데 급급할 뿐,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을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물론 광주항쟁은 여전히 미학적 기준을 들이대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한 트라우마다. 하지만 27년 만에 다시 그 아픈 기억을 끄집어냈다면, 적어도 그것을 단순한 기억술을 넘어서는 기억의 예술(ars memoria)로 승화시켰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