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개인과 개인이라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라도 잘 지낼 수 있다”
2007-08-22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푸른눈의 평양시민>의 대니얼 고든 감독

그를 처음 안 것은 우리가 아니었고 그가 처음 사랑에 빠진 것은 우리가 아닌 그들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애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안 그는 그들의 마음을 열고, 맨 얼굴을 봤다. 우리에겐, 아무리 해도 닿을 수 없는 북한이나, 그 북한에 대해 무려 세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대니얼 고든이나, 생소하긴 매한가지다. 1966년 영국월드컵 당시 이탈리아를 누른 북한대표팀의 과거와 오늘을 보여준 <천리마 축구단>을 만들 당시, 그는 그저 불가능에 도전하는 광적인 축구팬일 뿐이었다. 매스게임에 임하는 두 소녀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어떤 나라>는 거대한 조직 안의 개인이 궁금했을 뿐이란다. 서양인 최초로 북한 당국의 절대적인 협조 속에서 그 누구도 담지 못했던 북한의 모습을 담았던 이 다큐멘터리스트는, 자신의 영화가 정치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한사코 부인한다. 1960년대 38선을 넘어 북으로 향한 미군 병사 네명 중 한명인 제임스 드레스녹의 현재를 궁금해할 때도, 논쟁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야심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드레스녹과 함께 북한에 머물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또 한명의 미군 병사 찰스 로버트 젠킨스가 고국에서 북한 생활을 폭로하는 일이 하필이면 촬영 중 벌어졌고, 이로 인해 드레스녹과 젠킨스의 엇갈리는 증언을 담게 된 <푸른눈의 평양시민>은 더할 나위없이 논쟁적인 소재를 담은 영화로 완성됐다. 그러나 고든은 여전히 천연덕스럽다. 늘 질문이 끝나기 전에 대답을 시작하고, 정치보다는 축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영양가있다고 믿는 그의 말은 그러나 엄연한 진심을 담고 있다. 자신이 택한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 하나하나의 소중함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지난 8년간 북한 사람에 대한 세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그 와중에 결혼을 두번이나 미뤘으며, <푸른눈…>의 개봉 때문에 넉달 된 딸을 영국에 둔 채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왔다. 그는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알려고 들지 않았던 그들의 어떤 모습을 전세계에 알렸다. 오직 이방인만이 견지할 수 있는, 북한을 향한 순수한 관심의 이면을 궁금해하기 전에, 이 푸른 눈의 영국 감독에게 우리가 어느 정도 빚지고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푸른눈의 평양시민>을 당신 영화 중 가장 처음 봤지만, 앞선 두 작품을 본 다른 사람은 이 영화가 가장 지루하다고 말하더라.
=그런 말을 듣긴 했다. 아마 두 작품을 미리 본 한국인들은 뭔가 색다른 영화를 원했던 것 같다. 북한의 또 다른 내면, 북한 사람들의 또 다른 일상 같은. 3부작에 속한 세편은 북한을 다루고 있다는 것만 빼면 굉장히 느슨하게 연결됐다.

-3부작은 매번 북한과 북한사회, 한국전쟁 등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북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매번 우리 모두 북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가정했다. 남한과 북한, 유럽과 미국 관객을 위해 서로 다른 버전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인상적인 것은, <어떤 나라>나 <푸른눈…>에서 ‘고난의 행군’이 굉장히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오프닝이 아니라 인터뷰를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고난의 행군’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시기였다. <어떤 나라>에서 소녀의 어머니의 인터뷰는, 북한 내부인이 카메라 앞에서 외부인에게 그걸 언급한 최초의 케이스였다. 그들이 그걸 직접 말하는 게 중요했다. 그러니 그걸 오프닝에 넣을 수는 없었다.

-그 말을 들을 때, 당신이 최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전에 오프 더 레코드로 우린 이미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우리에게 그 시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했고, 우리는 바깥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모른다고 알려줬다. 그러니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물론 강요한 건 아니다. 카메라 앞에서 말할 만한 준비가 됐냐고 물었더니, 이야기하겠다더라. 평양의 영국대사관 사람들이 그 화면을 보더니 북한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했다니 믿을 수 없다며 놀라더라. 그들이 우리를 믿었으니까 가능했다. 모두 합쳐 열달 정도를 함께했으니까.

-그 집에서 함께 잤나.
=아니. 호텔에서. 우리는 호텔이 좋았다. 언제나 뜨거운 물이 나오니까. (웃음) 그들과 백두산에 갔을 땐 아녔다. 호텔 사람이 방에 목욕탕이 있다기에, 좋네요, 그랬는데, 웬걸, 목욕탕 안에 물이 가득한 거다. 그 물을 퍼서 몸을 &#50492;었는데, 그게 7월이었음에도, 와, 정말 어마어마하게,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문질러댔다. 근데 그들은 늘 그러고 산다는 거다.

-통역이 항상 함께 있었나.
=그렇다. 평양에 사는 북한 여자로, 북한쪽 영화사에서 붙여준 사람이었다. 이름이 렴미화였는데, 처음 만나서 인사를 하는데 분명히 아는 얼굴인 거다. 그녀는 한사코 우릴 모른다고 하고. 알고보니 우리가 예전에 평양에 관광차 왔을 때 우리의 가이드가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3부작 전부를 통역한 렴미화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굉장히 유명한 촬영감독으로 그들은 일종의 영화 가족인 셈이다.

-그럼 당신은 한국말을 전혀 못하나.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북한에서 계속 지내고, 편집하면서 항상 한국어를 접했으니까. 하지만 최근 2년간은 전혀 한국어를 하지 못해서…. 북한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들을 알기도 한다. 이를테면 부산영화제 갔을 때 내가 (한국어 발음 그대로) 원주필이라고 말하니까….

-엥?
=딱 그런 반응을 보이더라. (웃음) 북한에선 볼펜을 그렇게 부른다.

-3부작을 보면 갈수록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만드는 동안에도 그걸 의식하고 있었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알겠지만, 난 그냥 매번 나름의 커다란 걸음을 내디디려 했을 뿐이다. 첫 번째 영화는 아무도 모르는 곳을 내가 제일 처음 방문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두 번째는 처음 매스게임을 보고는 그처럼 어마어마한 소재의 일상을 담고 싶었다. <푸른눈…>은 비주얼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다. HD를 사용하고, 비주얼적으로도 창조적이고 놀랄 만한 걸 만들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푸른 눈…>의 판문점은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느껴지더라.
=아마 그건 당신이 판문점 북쪽에서 남쪽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럴 거다. 나는 판문점 북쪽에 있는 게 더 익숙하다. 그곳을 통해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50년 전에 한국전쟁이 끝난 줄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담장도 없고 철조망도 없어서 위험해 보이지 않겠지만, 거기선 그걸 느낄 수 있다.

-<어떤 나라>의 이야기를 하자면, 매스게임을 처음 봤을 때, 이걸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나.
=TV나 사진이 아니라 직접 본 것이 2002년 5월이었다. 정말 대단한 구경거리였고, 마음을 빼앗길 만했다. 근데 20분이 지나니까, 금세 지루해지더라. 그저 ‘아, 또 다른 놀라운 구경거리군’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나중엔 뭘 봐도 심드렁하다. 사람은 안 보이고 덩어리만 보이니까. 그래서 나는 매스게임 때 플로어에서 움직이는 두 사람과 객석에서 카드를 들고 있는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왜 매스게임을 하는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그걸 하는지의 메커니즘에 대해. 일단 제일 잘하는 소녀를 소개해달라고 영화사에 부탁했다. 그래서 소개를 받았는데, 그 가족은 일종의 전시용 가족 같았다. 내가 원한 게 아니었지만 두고보자고 했다. 그 소녀를 소개한 것은 우리에게 일부러 보여주기 위해서냐고 렴미화에게 물었더니 아니라고, 제일 잘하는 소녀가 필요하다기에 추천을 받았을 뿐 가족 배경은 애초에 보지도 않았다는 거다. 그 가족도 우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현순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기억하고 있었고, 영국군은 그들을 도왔으니까. 근데 어느 날 현순이 방과 뒤에 두살 어린 동네 친구네집에 놀러간다기에 우리 모두 따라갔다. 그게 성연의 집이었다. 근데 그집은 마치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가족 같았다. 언제나 함께 노래를 부르고…. 세명을 주인공으로 하겠다는 설정을 바꿔 두 소녀에게 집중했다.

-<푸른눈…>에 대한 미국인의 반응은.
=대부분의 경우 드레스녹이 한 일에 대해서는 안 좋게 생각한다. 배신자라고 보니까. 우리가 그를 완전한 영웅이나 완벽한 악당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가 계속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걸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럽 특히나 영국에서는 내가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칭찬했고.

-일종의 유럽 다큐멘터리의 전통 같은 건가.
=그럴지도.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그들은 내가 어떤 식으로든지 입장을 정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어떤 사람들은 드레스녹과 젠킨스 중 누구의 말을 믿냐고 묻지만 내가 누굴 믿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난 그저 내가 찍은 사람들을 이해할 뿐이다.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나 나나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고, 그들 역시 영화를 찍으면서 나를 이해하게 됐다. 이해란 양 방향으로 이뤄진다. 일방적일 수는 없다. 나는 예전에는 북한에 대해 알지 못했고, 의견도 없었다. 하지만 이젠 보통의 북한 사람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 김일성 배지만 떼면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다 똑같다. 남한과 북한은 몇 천년 동안 한 나라였고, 고작 60년 동안 분단됐을 뿐이다. <천리마 축구단>의 북한 선수들이 영국을 다시 찾았을 때, 주위에 살던 남한 사람 몇이 할아버지들과 술을 마셨다. 그들이 말하길, “와, 북한 사람과 얘기하는 건 처음이다. 가까이서 보니, 뿔도 없고, 우리와 똑같이 생겼어. 게다가 한국말을 하잖아!” (웃음) 중요한 건 관계다. 스포츠 등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계속 교류하는 게 중요하다. <천리마 축구단> 때 내가 응원하는 영국 축구팀이 큰 경기에 진출했기 때문에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중국, 덴마크를 걸쳐 영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결국 우리팀이 이겼다. 그래서 북한에 팩스를 보냈다. 근데 답신이 뭐라고 왔는지 아나? “1966년 월드컵 북한 대표팀은 귀하의 팀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어쩌고저쩌고….” 그러고는 모두 사인까지 해서 보냈다. (웃음) 개인과 개인이라면, 심지어 미국인과 이라크인이라도 잘 지낼 수 있다.

-북한 사람들과 정치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나.
=<어떤 나라>를 촬영할 때 미국이 북한을 침략할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특히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뒤에 북한을 폭격할 거라는 의견이 팽배했을 때, 북한 사람들은 그랬다. 미국의 침략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한사코 그렇다는 거다. 근데 나중에 그러더라.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정말? 그런 대화는 왜 영화에 넣지 않았나.
=그들이 원하지 않았으니까.

-인터뷰이가 정말 진실만을 말했다고 믿나. 특히 드레스녹.
=음, 처음엔 아녔다. 그는 나에게 자신은 미국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면서 북한에 오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했지만 난 그저 40년 전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가 미국에서 자신을 알 만한 사람들의 명단을 줬고, 찾아봤더니 모두 실제 인물들이었고, 그들의 말은 드레스녹의 말과 일치했다. 그의 어린 시절 동네 친구도 발견했지만, 그중 단 두명만 살아 있었다. 미국인으로서 60살 이전에 죽는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그건 그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내레이터가 크리스천 슬레이터더라. 앞의 두 영화는….
=내가 직접했다. <푸른눈…>은 미국인의 이야기였고, 미국인의 목소리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배우였으면 했다. 목소리를 통해 뭔가를 표현할 수 있는. 몇명의 명단이 있었는데 가장 원했던 건 슬레이터였다. 상업적인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에 든다면 할 수 있다기에, LA에 찾아가서 녹음했다.

-그저 유명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좋게 작용한 점은 있지. 미국 관객은 영화 보는 내내 “누구 목소리지?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그러다가 누군지를 알고는 신기해했으니까. 그리고 슬레이터는 내레이션에 미묘한 뉘앙스를 집어넣을 줄 알았다. 어떤 장면에선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 톤을 통해서 “대체 이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그저 감정을 넣어달라고는 했을 뿐이다. 이야기와 너무 거리를 두지 말라고. 근데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걸 하더라.

-한국 언론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내 생각에 진짜 북한의 검열이 없었냐는 질문일 것 같다.
=그걸 납득하도록 만드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되도록 모든 배경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 친구가 그랬다. 평양에 오면 서양 사람들도 모두 일본인처럼 된다고. 모두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대는데, 그게 딱 일본인 관광객 같다는 거다. 거리도 찍고 동상도 찍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한번에 모든 걸 얻으려 하면 절대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 그곳에서 영화를 찍을 때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몇 개월 뒤에 돌아와서 다시 찍기도 했고. 그러면서 결국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당신은 어떤 면에서 우리보다 북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남한 사람에게 충고하고 싶은 점은.
=그 비용을 댈 수 없으니 통일은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통일이란 어느 한쪽이 나머지를 일방적으로 제압하거나 책임지는 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북한 사람들 역시 자선을 바라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북한 사람들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이젠 개인적인 질문을 던질 차례다. 예전에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아니아니. 한번도 공부한 적 없다. 역사와 철학을 전공했다. 영국에서 널널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싶으면 역사를 전공하면 된다. 1주일에 3, 4시간만 수업을 들으면 나머지 시간에는 맥주를 마시면서 놀 수 있다. (웃음) 졸업 뒤에는 내가 응원하는 축구팀에 대한 책을 썼고, 그리고는 주로 스포츠를 다루는 TV 방송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의 역사에 대한 시리즈를 만들기도 했다.

-현재 어떤 작업 중인가.
=영국에서 개경주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곧 완성된다. 영국에선 개를 데리고 경주를 하고 한국은 개를 먹는다. 아, 물론 농담이다. (웃음) 사라져가는 영국의 노동자 문화에 대한 것이다. 개경주는 노동자 문화에 속한 것이니까. 1970년대 우간다의 메달리스트 존 아키부아에 대한 다큐도 만드는 중이다. 내년 3월에 완성된다.

-여전히 스포츠에 대한 영화다.
=스포츠. 그리고 인간. 스포츠는 휴먼스토리에 대한 거대한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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