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워>에 관한 말은 이미 넘칠 만큼 많이 쏟아졌다. 네티즌의 댓글은 홍수를 이루었다. <디 워>의 흥행 질주가 가시화됐고 그전에 이미 이른바 ‘심빠’라 불리는 추종자들이 생겨났으며 저널은 그 현상을 퍼나르고 분석하느라 부산하다. 그런데 <디 워> 현상을 일으킨 몇 가지 논점과 그에 반박하는 논리들을 보면서 거기서 정작 <디 워>의 실체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디 워> 논란에 수정과 비판을 가하는 시도들을 접하면서 무언가 다른 해석법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나는 점점 굳히게 됐다. <디 워> 현상을 말할 때 영화의 내용물만 말하는 건 순진하고 불가능한 접속이 되겠지만, 지금의 양상처럼 전적으로 영화 바깥의 현상에만 매달리는 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디 워>는 어떤 영화인가? 그렇게 묻는 대신 ‘심형래’의 <디 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라고 원론적으로 묻는 사이 유령 같은 방어막이 심형래를 감싸고 다시 <디 워>를 감싼다. 방점이 ‘심형래’에 있는 것 같지만,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화 <디 워>’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 <디 워>와 코미디언 심형래
물론 그전에 인터넷을 도배하며 테러에 가까운 시도까지 마다않는 <디 워>의 어떤 지지자들의 논리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다 해도 내 식대로 다시 첨언할 필요를 느낀다. 심형래가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그를 무시했다는 평가는 알려진 바대로 거의 없다. 그가 코미디언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심형래 자신과 영화 스스로라는 사실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디 워>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이 영화가 지나온 과거를 들먹이며 ‘나는 코미디언이었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화법을 잊고 있다. 6분간의 에피소드, 그건 심형래가 영화에 넣은 것이지 비평가가 넣은 것이 아니다. 지금도 코미디언이며 심형래보다 더 오랜 코미디 생활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 직업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그런 에피소드가 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만약 인간 역정의 드라마, 7년 동안 한편의 영화에 목숨을 걸고 절치부심한 끝에 기술적인 발전을 이뤄낸 한 사람의 인생사가 경외할 그 아무것도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12년 동안 <송환>을 만들어온 김동원의 영화를 보았는지 물을 것이며, <디 워>를 만들면서 심형래가 받았던 설움과 심리적 고초를 제기한다면, 김동원이 <송환>을 만들며 겪은 정치적 탄압과 물리적 위험에 관해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CG의 기술적 성과가 영화의 성과와 등치된다고 설득하려 든다면 <300>이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이상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아니 그건 그렇다고 하면 끝날 일이지만, 그보다 CG의 성과가 한국의 어떤 우수성을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왜 한국의 전통적 미와 윤리에 관해 탐구하는 임권택의 영화에 관해서는 외면하였는지 물을 것이다. CG로 한국의 우수성을 말하는 누군가가 <천년학>을 지지했다고 나는 믿기 어렵다. 영화는 테크놀로지에 깊이 영향받지만, 그것에의 탐구가 아니며 더불어 정복의 전쟁이 아니다.
영화 바깥에서 벌어지는 이런 몇 가지 핵심적인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디 워> 현상이 영화 바깥의 기울기와 더불어 영화 안의 내용물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디 워>에 관해 말할 때 한 가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디 워>는 블록버스터다. 물론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이 말을 하고는 다시 댓글의 세계로 돌아간다. 정작 네티즌의 댓글 열광을 촉발시키고 흥행의 질주를 성사시킨 것의 핵심은 카니발의 기운이다. 일명 심빠들의 폭력적인 댓글 행진곡은 그들의 카니발이 망쳐질까 두려워 심지어 영화를 보기 전이나 영화를 보지 않고도 분연히 일어난 담론적 기현상이며(나는 심빠들 모두가 <디 워>를 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여 심형래와 <디 워>가 멸시당한 것으로 여겨 분노하는 착시의 현상까지 일으켰다. 그러고나서 사이버 테러가 일어났는데, 사실상 사이버 테러 이전에 자신들만의 축제를 변호하려는 순진한 경향이 먼저 있었다. 때문에 단숨에 이 행위를 사이버 테러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반드시 대중적 카니발의 추구가 오로지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영화에서만 일어난다는 사실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블록버스터가 여름 극장가 대중의 대규모 카니발을 조성한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그것이 할리우드의 전통적 블록버스터이건 한국형이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블록버스터는 여름 한철의 카니발을 위해 찾아오는 것이니 분석은 그만두고 즐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이 바로 <디 워>의 출현으로 입증된 것이다.
<디 워> 팬들에게 논리를 제공한 <트랜스포머>와 <화려한 휴가>
<디 워> 현상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추종을 통해 일관되게 주입되어온 그동안의 영화적 내용과 형식이 그걸 보고 훈련되어 성장한 관객에 의해 실제적 믿음으로 표출된 사례라고 봐야만 한다. 영화 바깥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영화 안의 재현 논리가 영화 바깥의 담론 논리를 제압하는 것이다. 그게 <디 워>의 논란과 욕망을 말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디 워>와 함께 올 여름 12세 관람가에 500만명을 넘은 <트랜스포머>와 <화려한 휴가>를 같이 말해야 하는 이유다. 너무 당연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놓치는 것인지, 관계가 없다고 무시하는 것인지, <트랜스포머>가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고, <화려한 휴가>는 일명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속하며, <디 워>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정복하려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사실에 대해 함께 말하지 않고 있다. 이 세편의 영화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서로 반추할 만한 지점이 있다.
<디 워>의 현상에 관해 쓴 글 중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건 <필름2.0>의 김영진의 글이다. 특히 “<디 워>는 충무로가 해왔던 블록버스터 담론을 더 공세적으로 몇배는 수위를 높여 취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말과 “<디 워>는 결국 충무로의 블록버스터 담론이 낳은 괴물인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는 충무로 영화 제작과 배급 및 마케팅 전략, 이번 정황을 다루는 언론들의 작태에 집중하여 전반적인 비판의 내용을 썼는데, 그러나 나는 그것과 더불어 근접한 세편의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와 <화려한 휴가>와 <디 워>의 영화적 상관성을 짚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다른 순서가 아닌 바로 이 순서대로 개봉된 것이 <디 워> 팬들의 대항 논리를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트랜스포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트랜스포머>의 이야기도 대수롭지 않은데 <디 워>의 이야기가 별로인 것이 문제가 되는가’라거나 ‘<디 워>의 CG가 <트랜스포머>보다 못하지 않으니 <디 워>도 평가해야 한다’는 양편의 논리 어느 것에도 동의하기 힘들다. 비교의 전제 자체가 문제이며, 둘 다 틀린 주장이다. 오히려 <트랜스포머>와 <디 워>는 생각보다 유사한 영화다. 그러나 네티즌이 주장하는 것처럼 볼 만한 서사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네티즌이 <디 워>를 말하기 위해 괜히 <트랜스포머>를 들먹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트랜스포머>와 <디 워>의 서사방식은 수준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이상할 만큼 같은 진행방식을 따른다. 따라서 이 둘을 비교하고 싶다면, 둘 다 같은 서사구조인데 어디서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 온당하다.
<트랜스포머>에서 로봇종족이 지구로 오게 된 경위에 대해 우리는 들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머나먼 행성에서 큐브를 찾아 지구에 도착하게 된 그들의 전설에 관해 미지의 목소리가 설명하고 있다. 우주의 로봇종족들은 그 목소리를 따라 지구에 안착했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디 워>에서 이무기의 전설을 처음 접한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이무기의 전설이 비롯된 바를 처음 알게 된다. 오래된 신화와 전설로서의 이야기, 그것은 우주에서 온 것과 150년 전 조선에서 태동한 것이지만 같은 영화적 방식으로 구전된다. 혹은 <트랜스포머>에서 로봇종족들의 사투가 벌어지고 <디 워>에서 주인공 이든과 악한 이무기 집단의 추적이 벌어질 때 핵심이 되는 것은 누가 우주의 에너지를 관할하는 ‘그것’을 갖게 될 것인가이다. 그건 큐브거나 여의주다. 그들은 같은 것을 좇아 지구에 그리고 미국에 왔다. 또한 그 싸움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든 사람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데 그들은 <트랜스포머>에서 윗위키 가문의 후예이며, <디 워>에서는 환생한 하람이다. 전설이 실현될 때 주인공은 같은 혈족의 후예이거나 같은 사람의 다른 모습이다.
<트랜스포머>의 CG에 사로잡힌 <디 워>
두 영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도시에서의 후반부 액션신을 빼놓을 수 없다. <트랜스포머>는 마치 <킹콩>의 패러디라도 하는 듯, 그러니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최근 경향 중 하나를 염두에 두면서 빌딩의 끝으로 주인공을 올려보낸다. <트랜스포머>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경향을 관성적으로 받아들일 때, <디 워> 역시 그 관성을 이중적으로 모방해 인물을 옥상으로 올려보낸 뒤 건물을 휘감고 올라가는 이무기를 보여준다. 그러고나서야 조선과 고대 서양의 이종 접합물로 꾸민 본편의 마지막 시퀀스에 도달하게 되고 거기서 영화 내내 나타나지 않던 선한 이무기가 나타나 악한 이무기를 제압한다.
차이가 있다면 <트랜스포머>가 영리하게 인간에 대한 페이소스를 로봇에 이입한다는 것이다. 로봇을 인간화하는 것이 이 영화의 재미다. 반면 <디 워>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알려준 모든 것을 따라하되 페이소스를 넣을 곳을 놓친다. 한 예로, 해변가에서 주인공 남녀는 갑자기 동기 부족한 키스를 하며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과 구원의 영웅 사이에 있을 만한 할리우드식 로맨스를 시기상조로 만든다.
그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면 <디 워>에서 이무기의 출현은 필요에 의해 등장하는 대신 그 이무기의 형상을 반복 관람시키기 위한 욕망에 의해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페이소스를 놓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무기는 주인공을 쫓아오지만 한신 안에서 그들을 힘껏 뒤쫓지 않는다. 이무기를 등장시켜 그들의 추적신을 좀더 유기적으로 관할할 신의 운용 능력이나 욕구가 심형래에게는 없어 보인다. 이 지점에 <디 워>의 욕망이 있고 심형래가 추구하는 영화의 이상이 있다.
심형래는 에필로그에서 말한다. “이제 <디 워>에서 나는 우리만의 기술을 이루었다. … 영화가 가진 무한한 가치를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공룡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 그 욕망은 스필버그의 영화를 좇는 것이 아니라 스필버그의 영화적 테크놀로지를 좇는 것이었다. 스필버그가 마이클 베이를 대동하여 <트랜스포머>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로봇종족에 인간적 페이소스를 넣는 동안(<트랜스포머>의 제작자는 스필버그다) 스필버그의 테크놀로지에 사로잡혀 있던 심형래는 이무기의 기술적 형상화에 급급하다. 그게 영화의 무한한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네티즌을 포함하여 영화를 본 누군가가 <디 워>를 방어하기 위해 <트랜스포머>를 거론한다면, 거기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원형적인 서사와 그것을 모방하는 <디 워>의 혈연관계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CG라는 변질된 화두는 바로 그 위에서 성립한 것이다. 이 모방의 욕망과 수용의 태도를 놓쳐서는 안 되며 그것이 <트랜스포머>와 <디 워> 사이의 관계다.
개인적으로 <디 워>에서 감정이 솟는 걸 느낀 유일한 곳은 두 이무기가 싸움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인데, 여기에 이르러서야 괴물을 통한 어떤 감정의 힘이 살아나고 있다. 이건 <디 워>의 훌륭한 점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의 에필로그, ‘나는 코미디언이었다’가 붙는다. 문제가 된 음악 <아리랑>이 어디에서부터 들려오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아리랑>은 두 이무기의 싸움이 끝나고 감정의 여진이 남아 있을 때, 미처 그 시퀀스가 다음 에필로그 시퀀스로 넘어가기 직전에 이미 들려온다. 영화 본편의 내용과 에필로그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는 게 이 <아리랑>이다. 선한 이무기의 힘겨운 승리라는 본편의 끝과 과거 코미디언에서 현재 영화감독이라는 심형래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리랑>으로 매듭지어질 때 <디 워>는 승천하는 용과 용이 문 여의주를 성공한 심형래와 그가 이룬 CG 기술이라는 자기 반영적 서사로 환치하여 우리의 감동을 요구하는 데까지 이른다. 거기에 다름 아닌 <아리랑>이 흐르면서 우리 민족의 승천이라는 착시까지 심어주게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심리적 보편성
이상하게도 <디 워>의 <아리랑>을 들으면서 <화려한 휴가>의 <님을 위한 행진곡>을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긴 하다. <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재현을 위해 노력한 영화다. 그리고 <님을 위한 행진곡>은 그들을 기리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위령곡이다. 그런데 노래가 흐를 때 나오는 이 마지막 에피소드는 <화려한 휴가>가 기억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가상의 보편성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영화 혹은 가상적 보편의 장치를 강화하지 않는 한 기억에 이를 수 없는 영화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광주민주화운동이 없었던 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김소영이 지적한 대로 <화려한 휴가>에는 정서의 힘이 있다. <디 워>를 못 만든 영화라고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화려한 휴가>를 가짜라고 평하는 건 망설여진다. 그러나 그 정서의 힘이 어디에 편승해 있는지를 말하는 건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질 때 우리는 영화 속 인물과 우리의 관계를 매우 폭넓게 동일시하여 매듭짓게 된다.
영화에는 두번의 사진장면이 나온다. 한번은 도청 전투가 일어나기 전 시민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고,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게 마지막 에피소드의 그 사진이다. 두 번째에는 사진을 찍는 행위가 등장하지 않지만 결혼식 사진이라 생각할 만한 장면이다. 영화는 처음 사진을 마지막에 다시 넣어 주의를 환기하는 대신 새로운 다른 장면을 삽입한다. 사진에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애, 살아남은 자뿐이고 나머지 즐겁게 웃는 사람들은 이미 사망한 사람들이다. 광주사태를 알고 있거나 그 참사를 느끼고 있거나 하는 것은 신애뿐이며 나머지는 지금 모르고 있다. 지금 이 사진을 찍는 건 미래의 일이어야 가능하겠지만, 그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고, 기운은 이미 과거를 담지하고 있으니 이건 정확하지 않은 어느 시기를 상정한 가상의 장면이다.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들을 기억하라는 장면이고 우리를 그들 안으로 포함시키는 가상의 재현 장치다.
전반적으로 <화려한 휴가>의 재현성은 공간에 있어 구체적이고 심리에 있어서는 보편적이다. 구체적인 것은 장소를 위해 지어진 세트이지 그들의 감정은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구체적인 심리를 위해서라면 총을 들고 싶지 않았던 시민들이 왜 총을 들게 되었을까를 스스로 고민하고 한탄하는 장면이 있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들은 그렇지 않다. 동생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강민우가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다짐하듯 말하는 건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우리에게 던져진 보편적 대사이지, 동생을 잃은 지 몇 시간 만에 형이 할 만한 구체적인 대사는 아니다. 여기서 화두는 가상과 보편성이 된다.
“우회적으로, 고급스럽게 포장할 수도 있지만 대중영화의 키워드는 보편성이다. 이전에 나왔던 한국적 블록버스터들이 가족주의를 다루는 게 이런 지점이 아닐까 싶다. 눈으로 즐거움이 와서 가슴으로 느껴지는 게 이 영화의 숙제였다”고 김지훈은 말한다. 그러니까 CG나 세트가 재현의 세부를 대신하는 동안 주요 장면에서 쓰인 음악과 사진과 그리고 순수하고 정의로우며 보편적인 인물은 우리를 향해 있다. 그리고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생겨난 이래 감정의 보편적 동일화와 CG 및 세트의 구체적 재현성이라는 이중 논리는 일관된 매뉴얼이 되었다. <화려한 휴가>도 여기서 자유롭지는 않다.
영화의 재현 논리가 현실의 담론 논리로 확장된 <디 워>
우리에게 <트랜스포머>는 구체와 보편 혹은 기억과 가상으로서 큰 의미가 없다. 그런 요소는 장르 안에서 싱겁게 증발해버린다. <트랜스포머>는 거대한 모방의 욕망을 낳는 모델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그런 문제는 큰 변수가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보편과 가상의 결연만 더 강조되어왔다. <화려한 휴가> 한편을 놓고 보았을 때 이 문제가 당장 크게 부각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 영화 역시 그동안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취해온 관점을 큰 수정없이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디 워>의 심빠들을 보면서 이미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학습효과에 젖은 관객의 부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닌지 싶다. 가령, 심빠들이 <화려한 휴가>를 볼 때 역사의 구체성과 인간의 육화를 볼 수 있을까? 혹은 오히려 그 보편적인 가상의 일체감이 주는 자/타의 효과에 끌려 실재에서 자/타의 이분을 실행하려 들지는 않을까. 그게 허튼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나쁜 일은 이미 벌어졌다. 심형래에 감정이입하며 일어난 <디 워>의 현상은 심형래/충무로 혹은 심형래/비평가, 한국/미국의 대당을 중심으로 전선을 그었고, 적을 찾아 나서 이곳저곳의 블로그를 헤집는다.
우리는 <디 워>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야만 한다. 심형래에 관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있다. 그걸 보편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옹호하고 싶어진다. 그건 인생사의 보편적 슬픔으로 치환되어 현실세계에서 이 영화를 옹호하는 논리가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본의 아니게 영화에서 강조해온 보편적 동일화의 과정이 빚어내는 착시다. 게다가 <디 워>에서처럼 한국/미국이라는 대당이 설정된다면 그건 또한 애국의 정조로까지 나아간다. 심형래의 영화를 보호하기 위한 애국의 몸부림과 울려퍼지는 <아리랑>에 대한 감동. 그때 영화적으로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게도 당장 눈에 보이는 CG와 세트를 통한 재현성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그토록 애닳아 했던 가치들, 그리고 <디 워>의 최상의 장점으로 옹호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재현성을 위한 세트의 견고함과 CG의 물리적 위용성, 이른바 블록버스터의 재현성. 이게 바로 덜도 더도 아닌 <디 워>를 옹호하는 화두로 탈바꿈되었다.
상징성을 띤 보편의 인간드라마, 단순한 동일화를 넘어서서 강조되는 일체감,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여겨지는 CG 혹은 세트의 재현성을 앞세웠던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관객에게 현실세계의 어떤 논리를 제공하고야 만 것이다. 그걸 받아들인 관객은 당연하게도 <디 워>를 옹호하는 실제 논리의 화두로 똑같은 근거를 제시했고, <디 워>에 대해 낙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공격적 사이버 테러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의 재현 논리가 현실의 담론 논리로 확장된 기이한 사례를 마침내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한발 뒤늦게 좇고 있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로서의 <디 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재현 논리가 가져온 부정적 양상을 현실에서 풀어놓는 역할을 하게 된 <디 워>. <디 워>는 이 두 양면성에 놓인 것이지 코미디언 심형래가 만든 영화이거나 비충무로 영화이거나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혹은 전적으로 네티즌의 수용 양식으로 돌릴 만한 문제도 아니고, 이 영화가 못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다. 차라리 <디 워>와 이를 둘러싸고 생겨난 담론은 지금 우리의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태어난 가장 무서운 변종의 출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