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황정민] “<행복>은 솔직히 까놓고 가는 이야기라 끌렸다”
2007-09-21
글 : 강병진
사진 : 오계옥

<행복>의 영수에게선 황정민의 몇 가지 얼굴이 겹쳐오른다. 영수는 <너는 내 운명>의 석중처럼 사랑에 기뻐하고,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만큼이나 여자에게 비겁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나두철만큼 소심한 한편, <사생결단>의 도경장처럼 거칠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잔인한 러브스토리의 악역인 영수는 그 누구보다도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처럼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라고 묻는 남자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행복을 꿈꾸는 은희에게 묻는 말이자, 사랑이 아름답다고 믿는 관객에게 일갈하는 질문이다. 아마도 황정민은 <행복>에 빠져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행복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너 사랑해도 되냐?”고 묻는 <로드무비>의 대식처럼.

-<행복>의 개봉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 어제 있었던 기술시사까지 영화를 볼 수도 없었을 텐데, 초조한 기분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개봉이야 하면 되는 거지 뭐. 물론, 나름 좋은 시기에 하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었다. 어쨌든 이게 우리만 잔치하자는 게 아니라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니까, 충분히 다듬을 수 있을 때까지 다듬었으면 했지. 가을에 개봉한다고 했을 때, 오히려 좋았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가을에 봐야 하지 않겠나.

-<행복>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봤나.
=허진호 감독님의 레테르가 있는 영화이면서도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영수라는 캐릭터가 특히 마음에 들었고. 사람들은 보통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을 좋아하지만 사실 그는 그리 매력적인 친구는 아니다. 그에 비해 영수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모습을 가진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 맞닿은 부분이 큰 남자다. 인물 자체로만 보면 석중은 매우 작위적인 인물이다. 현실에 있기 힘든 남자고. 물론 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행복>은 솔직히 까놓고 가는 이야기라 더욱 끌렸다.

-<행복>에서는 은희가 비현실적인 여자다. “헤어지자고 해달라”는 남자에게 “개새끼”라는 욕밖에 못하지 않나. 임수정은 은희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황정민은 영수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까 싶었다. 남자들이 보기에 영수는 매우 쪽팔린 캐릭터 아닌가. ‘그래, 남자들이 저렇지 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니까.
=하긴 그렇지. 남자들이 사실 영수 같은 부분이 있다. 어쨌든 영수는 자신이 먼저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니까. 그런 면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보시는 분들은 포장되고 미화된 사랑을 원하겠지만 나는 <행복>을 통해 다른 걸 보여주고 싶었다.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들은 전부 다 미화되어 있지 않나. 무조건 양보하고, 이해해야 하고, 영원해야 하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현실에서 그건 말만 쉬울 뿐인 이야기다.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게 사람이다. 또 현실에는 그런 모습이 없으니까 관객이 영화에서 미화된 사랑을 찾는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나는 <행복>이 더욱 솔직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했다.

-영수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어떤 면에서는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이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좀 연기를 잘 못한 건가? (웃음)

-그만큼 영수가 비겁하고 비열한 남자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웃으면서 기타치고 노래를 부르다가 은희가 같이 살자고 하니까 눈치를 보는 장면은 특히 웃기면서도 비겁해 보이더라.
=그럼 그걸 어쩌겠나. 누구나 눈치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지. 대단히 뻘쭘하면서도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으니까. 그 상황에서 ‘그래, 고맙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웃음) 나도 그 장면이 마음에 든다. 마음에는 온갖 동요와 계산들이 많은데, 얼굴에서는 아닌 척하는 그런 연기가 재밌더라.

-<행복>은 사랑의 맹세라는 게 찰나의 것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은희와 영수가 병실에 누워서 서로 “죽을 때 꼭 옆에 있어줄게”라고 말하는 장면은 애절해 보이면서도 허망하더라.
=사람들은 늘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맹세를 하고 산다. 만약 그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잘 지켜내면 좋겠지. 하지만 그러면 이 사회가 너무 재미없는 곳이 되지 않을까. 물론 사랑의 맹세는 매우 다른 것이다. 사랑의 맹세는 그 순간만큼은 중요한 것이겠지.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살다보면 그런 맹세들은 조금씩 빛을 바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평소에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였나.
=그동안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뭔가 ‘뜨뜻미지근한’ 여백을 남겨놓는 점이 좋았다. 물론 <행복>처럼 특정한 방점을 찍는 건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여백 때문에 ‘그래, 이게 사람사는 거지’ 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멜로영화들은 기승전결이 뚜렷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든 울면서 끝나든 하여튼 뭔가 정확하게 끝나지 않나. 나는 그런 걸 별로 재미없어라 했고, 그래서 감독님의 영화를 좋아했다. 단지,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의 캐릭터가 전부 감독님처럼 보이는 건 싫었다.

-그래서 <행복>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좀 특이한 작품이다. 일단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한석규, 유지태, 배용준과는 다른 이미지니까. 감독도 다른 욕심이 있었겠지만, 본인도 새로움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 것 같다.
=내 욕심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 차이점도 <행복>을 선택하게 만든 것 같다. 감독님과 처음 이야기할 때도 나는 대놓고 “감독님의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은 연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감독님이 가지고 있는 좋은 감성은 지니고 가되, 영수라는 인물 자체를 그들과 똑같이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그런 시도가 허진호 감독 영화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방점이 보이는 작품을 만들게 했을 거 같다.
=나도 원했고, 감독님도 원했던 부분이다. 영화 뒷부분에서는 내가 약간 노숙자필로 변한다. 사실 그게 처음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부분이다. 대본에서는 은희랑 살던 집을 나오면서 수연이한테 전화를 해서 결혼하자고 하고 끝나버린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감독님의 스타일 아닌가. 여전히 뜨뜻미지근하잖아. (웃음) 그래서 내가 이왕 처음부터 다르게 시작한 거, 끝도 다르게 해보자고 했다. 감독님도 고민을 많이 했었고, 결국에는 지금처럼 방점이 찍히게 된 거다.

-감정적으로 연기하기에 힘들었던 장면은 없었나.
=요양원 장면이 대부분 힘들었다. 줄곧 은희의 사랑을 받는 공간 아닌가. 사랑을 주는 건 참 쉽다. 그냥 몸과 마음을 바쳐서 열심히 주면 되니까. 그런데 이건 내가 사랑을 받는 입장이지 않나. 그것도 주는 대로 받는 것도 아니고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건데, 그게 힘들더라. 촬영을 하면서도 <너는 내 운명>을 찍을 때, 나는 정말 쉬웠던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도연이가 정말 힘들었겠구나 싶었지. 어떤 선을 넘어서지 않으면서 정확히 중용을 지킨 도연이가 정말 대단한 것 같더라.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들 중에서 나이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여배우와 연기했다. 혹시 그 점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는 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몰라, 어쩌면 수정이가 나를 부담스러워했겠지. (웃음) 뭐, 남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아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웃음)

-영화에서는 어느 순간 은희가 영수의 엄마처럼 보이더라.
=그건 수정이가 가지고 있는 매우 좋은 느낌이다. 나도 몰랐는데, 같이 작업을 하다보니까 그런 게 있더라.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근사한 느낌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 느낌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배우가 원래 가지고 있는, 거짓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인 거다. 그게 보인다는 점에서 임수정은 정말 좋은 배우인 것 같다.

-혹시 과거에 영수처럼 그렇게 망가진 적이 있었나. 일반적으로 황정민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중 하나는 술을 무척 좋아할 것 같은 남자인데.
=나는 없었다. 물론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마셔야 속내를 털어놓는 면은 없다. 나는 언제나 정확히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런 면에서는 주영작이랑 많이 다르지. 친구랑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실 수는 있지만, 완전 취해 상소리를 하고 그러지는 않는다. 사실, 평소에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다. 작품이 끝나면 마실 일이 별로 없다.

-<검은집>은 지금까지 본인이 연기한 캐릭터와는 또 다른 인물을 연기한 영화였다. 흥행에는 만족하나.
=당연히. 그나마 ‘감사합니다’ 할 정도지.

-황정민이라는 배우는 딱히 한 가지 이미지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검은집>의 전준오도 그런 맥락에서 시도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었다.
=이미지상으로는 당연히 작품에 따라서 변하는 거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는 일단 농촌총각이 제일 크다. (웃음) 아니면 무식하고, 센 남자.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생각인 거고 나는 나대로 작업을 하면 되는 거다. 이건 배우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도 같다.

-대부분의 관객은 황정민이라는 사람을 착하고 털털하고 수더분한 남자로 바라본다. 관객과는 영화로 만나지만, 평소에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도 그런 기대를 받을 것 같은데.
=그건 그분들의 기대일 뿐이다. 내가 그것에 맞춰서 쿵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내 쿵짝에 그들을 따라오게 만들어야지. (웃음) 그런 기대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혹시 TV드라마에서는 제의가 오지 않나. 요즘은 어떤 면에서는 영화보다도 드라마가 강세인 분위기다.
=글쎄, 나에게까지 온 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내가 드라마에 대해 흥미를 못 느낀다. 일단은 내가 좀 봐야 하는데, 잘 안 보게 되더라.

-그동안 영화를 개봉할 때마다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야심만만>에서는 처음으로 아내의 임신소식을 알리기도 했고. 나름 오락프로그램을 즐기는 모습도 보였는데, 방송이 체질에 잘 맞지 않는 것인가.
=그건 어쨌든 철저한 영화홍보 아닌가. 예를 들어, 이런 인터뷰를 하는 게 방송하는 것보다 좋다고 하면 나는 인터뷰를 천개, 수만개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방송에 한번 나오면 인터뷰보다 효과가 더 크지 않나. 영화 홍보를 하기 위해서 나가는 것이지만, 일단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재밌게 하려는 것뿐이다.

-차기작인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 맡은 캐릭터는.
=보통 동네에 사는 정신질환자 정도가 될까.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무척 착한 사람인데 주위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남자다. 어쨌든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실제로 슈퍼맨의 스판덱스 의상을 입는 건가.
=그거는 지금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웃음) 없다. 없을걸? 있나? 모르겠네. (웃음)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
=역할이 마음이 들었다기보다는 이야기가 좋았다.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방점을 찍어주지 않을까 싶더라. 위대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도 잘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고 할까.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좋아 보이지 않나? 우리는 평소 쉽게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통해 사회가 무르익는 것 같다. 영화가 그런 맥락의 이야기다. 하지만 달인 같은 능력은 없다. 그냥 무턱대고 지구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거지.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본격적인 영화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로 7년이 지났는데, 그때와 비교했을 때 연기할 때 느끼는 감정은 변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연기하는 게 재밌다.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고통이나 즐거움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어떤 게 가장 고통스럽나.
=뭐일 것 같나. 배우가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이런 인터뷰도 고통스러울 것 같지만, 그래도 하나의 캐릭터를 접신하듯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힘들지 않을까.
=그런 거다. 대본을 딱 받으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가 제일 먼저 시작이다. 기자들이 글을 쓸 때도 백지에다가 어떤 식으로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하는 게 가장 큰 고통 아닌가.

-매주 맨땅에 헤딩하며 산다.
=그러니까… (웃음) 나도 마찬가지다. 이걸 어떻게 연기해야 하나, 이게 가장 큰 고통인 거지. 경력이 늘어간다고 쉬워지는 것은 없다. 아마 만약에 그랬다면 처음부터 배우를 안 하려고 했을 것이다. 언제나 어렵고, 해도 안 된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고민하고 자책하는 게 연기의 즐거움이다.

스타일리스트 최경아, 구자숙·의상협찬 BON, Dienel, MARIO, CLUBMONACO, GANT, 에디하디, KENZO, 킨독투, 랄프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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