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홍콩 누아르의 장르적 기원에 대한 탐색이자 자기 유희를 즐기는 영화 <익사일>
2007-10-15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움직임이여

만일 <트랜트포머>와 <다이하드4.0>의 배틀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다이하드4.0>의 편에 서겠다. 물론 <다이하드4.0>이 더 심오해서가 아니다. <트랜스포머>의 이야기는 엉망이지만, 그렇다고 <다이하드4.0>의 이야기가 근사한 것도 아니다. 상부의 명령이라 해도 범인 하나를 잡으러 시가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조종사가 있다고 믿기는 힘들다. 신기한 일이지만 다행히 그가 폭격할 동안 민간인 사상자는 한 사람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이건 거의 세대의 문제다. 존 맥클레인은 관객인 나와 함께 늙어왔다. 늙어가며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진보로부터 낙오해버렸다.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맥클레인은 버틴다. 버틸 뿐 아니라 승리한다. 뻔한 거짓말이라 해도, 기계가 수호신/친구가 된다는 <트랜스포머>의 거짓말보다는 이 편이 더 사랑스럽다. 맥클레인은 피투성이가 되어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가 얻은 것은 딸의 신뢰뿐이다. 세상은 다시 그를 내버려두고 맹렬히 질주할 것이다. 딸도 오직 하루만 아버지의 성(姓)을 쓴다. 1편에서 맥클레인의 활약 뒤에 남편의 성으로 자신을 고쳐 불렀던 아내는, 4편에서 이혼하고 자신의 성으로 다시 돌아가 있다. 맥클레인은 도태될 운명의 영웅이다.

실은 영화세상의 영웅은 오래전부터 그랬다. 그들의 시대착오성은 영웅담 영화의 관습이며, 그 관습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 사라진 것을 그리워하듯 그들을 환대했다. 이산 에드워즈, 셰인, 닥 할러데이, 빌리 더 키드도 그랬다. 문제는 해결했지만 그들은 결국 죽거나 황량한 벌판으로 홀로 떠난다. <다이하드>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영화 체험에서 지울 수 없는 영웅들의 이름을 불러온다. <다이하드> 1편의 맥클레인은 스스로 <하이눈>의 외로운 보안관 게리 쿠퍼의 이름을 부른다. 맥클레인이 몇년 뒤에 더 늙은 몰골로 돌아온다 해도, 나는 그를 만나러 극장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유희의 길을 가는 <익사일>

무대에 <익사일>이 오른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이 영화는 7월5일 개봉했고 시쳇말로 망했다. 겨우 5개관에서 개봉했으니 잘됐어도 몇만이겠지만 1만명도 채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 첫 <다이하드>는 19년 전에 왔고, 홍콩액션의 첫 신화 <영웅본색>은 21년 전에 왔다. 홍콩 누아르라고도 불린 홍콩액션은 한때 <다이하드>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우리를 들뜨게 했으나 첫 만남 이후 20여년이 지나 도착한 그들의 후예는 이 땅에서 완전히 다른 계급이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운명이며, 부분적으로 그들의 선택이 빚은 결과다.

이를테면 <다이하드4.0>은 포스트로 이행하기를 끝내 거부하는 전통이다. <다이하드4.0>은 머리가 다 빠진 장년의 맥클레인을 다시 현실(처럼 보이는 공간) 안으로 밀어넣고 신화를 재탕한다. 적은 더 강해졌고 그는 더 힘겹게 싸워야 한다. 여기엔 세련화의 과정 대신 강화의 과정만 있다. <익사일>은 다른 길을 간다. 이것은 일종의 후일담이다. 영웅(들)은 추방된 곳에서 다시 추방된다. 신화로서의 장르는 진화하면서 자기를 비평하거나 유희한다. 수정주의 웨스턴, 예컨대 <수색자>가 웨스턴의 자기 비평이라면, 마카로니 웨스턴, 예컨대 <황야의 무법자>는 웨스턴의 자기 유희다. 홍콩 액션의 장에서 유위강의 <무간도> 혹은 두기봉의 다른 영화 <흑사회>가 자기 비평의 길을 갔다면, <익사일>은 자기 유희의 길을 간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이탈한 조직원 아화를 죽이기 위해 또 보호하기 위해 두명의 킬러와 두명의 보호자가 마카오의 한적한 주택가에 도착한다. 그들 다섯은 한 동네에서 자랐고 한때 같은 조직원이었지만 운명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짧은 결투 끝에 마음이 약해진 그들은 일단 청부살인으로 아화 가족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결합한다. 그러다 아화 살해를 지시한 두목을 만나 그와 맞서지만, 총격전 끝에 아화는 죽고 만다. 나머지 네명은 정처없이 길을 가다가 금괴를 운좋게 얻는다. 떠나려는 순간, 그들은 아화의 아내와 아들이 두목의 손에 잡혀 있음을 알고, 모자를 구하기 위해 두목이 있는 호텔로 돌아온다. 모자를 탈출시키고 네 사내와 두목 일당은 총격전 끝에 모두 죽는다.

<익사일>의 이야기는 너무 현실성이 없어 황당할 정도다. 아화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커튼 뒤에 있는 자신의 좁은 집에서 결투를 시작하는 첫 시퀀스에서부터 개연성은 두기봉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최소한의 심리적 개연성만 유지한 채, 상황의 개연성은 벗어던진다. 공간들도 모두 추상화되어 있다. 아화가 살고 있는 주택가에는 동네 주민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한층이 불에 타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는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아치형 식당과 호텔에는 다른 손님이 전혀 없다. 시가지는 잠깐 스쳐갈 뿐이며 가장 긴 실외장면은 들판과 산에서 이뤄진다.

이 엉성해 보이는 영화가 자기 유희라면, 무엇을 유희하는가. 홍콩 누아르에 유희할 고유한 자기가 있었던가. 홍콩 누아르야말로 혼성장르의 표본 아니었던가. <익사일>은 홍콩 누아르가 끌어들인 장르인 고전적 웨스턴, 마카로니 웨스턴, 그리고 홍콩 무협과 할리우드 갱스터를 횡단한다. 두기봉은 홍콩 누아르가 기원한 장르들의 도상학을 분리한 다음 그들을 재배열하며 변주하고 패러디하는 것이다. 하지만 홍콩 누아르를 최종적으로 성립시켰던 공간 즉 세기말적인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는 끝내 회피하며 실내와 들판을 오간다. 그 때문에 <익사일>은 마치 홍콩 누아르의 장르적 기원에 대한 탐색처럼 보인다. 이야기의 면에서 <익사일>은 포스트 홍콩 누아르지만 도상학적으로는 프리 홍콩 누아르다.

아름다운, 극히 아름다운 움직임

<익사일>의 추상화된 공간은 장르적으로 고안된 세트로 기능한다. 예컨대 첫 총격전이 벌어지는 아화의 집은 고전적 웨스턴의 결투가 벌어지는 벌판과 같은 무대다. 세 사내는 고전적 웨스턴의 명예율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총에 6발의 총알만 남기고 방아쇠를 당긴다. 금괴차량 탈취가 벌어지는 들판은 고스란히 <와일드 번치>류의 산적 웨스턴의 무대이며, 네 사내는 무법자 서부사나이들과는 달리 어부지리로 금괴를 얻는다. 마지막 총격전이 벌어지는 호텔은 홍콩 무협의 객잔과 흡사한 구조다. 경공하지 못하는 현대의 사내들은 2층에서 빗발치는 총탄에 모두 숨을 거둔다.

하지만 <익사일>을 뒤늦게 보는 순간 <다이하드4.0>을 까맣게 잊고 홀린 듯 빨려들어간 이유는 그것의 기발한 유희정신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극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퇴락한 갱스터 이야기이며 인물도 공간도 상황도 엉성하거나 지나치게 생략돼 있는데 영화 전체에는 쾌활함과 기품이 넘친다. 흐르는 물처럼 유연한 카메라 움직임, 사랑스럽게 혹은 불길하게 울려퍼지는 청명한 방울 소리, 인물의 좌우를 가리며 조금씩 흔들리는 커튼의 미묘한 움직임, 그리고 오랜 침묵 끝의 발작적인 총격과 인물들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동선. 그들의 어떤 배합이 이 비현실적인 상황과 공간에 리듬과 질서와 매혹적인 톤을 만들어낸다. <익사일>은 장르들을 횡단하며 유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움직임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지에 이른다.

개인 병원에서의 총격전 장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면의 촬영은 경이롭다. 한 사람을 겨우 가릴 만한 커튼들이 간이 칸막이 역할을 하는 트인 방에, 두목 일당 10여명이 진을 치고 있고, 네 사내는 각각의 커튼 뒤에 몸을 가리고 있다. 한쪽에는 병상에 누운 아화가 있다. 두목 일당은 방 중간에 내려진 커튼 뒤의 네 사내를 보지 못하고, 네 사내 역시 두목 일당을 보지 못한다. 아화는 두 그룹을 함께 볼 수 있다. 한 공간 안에서 서로를 보지 못하는 두 그룹의 시선, 그리고 양자를 함께 볼 수 있는 한 인물의 시선.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구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방 전체를 잡은 숏에서 그것이 가능해져 있다. 그리고 커튼들이 내려지고 총격전이 시작된다. 이 장면은 액션영화 사상 가장 뛰어난 장면의 하나일 것이다. 이 장면만으로도 <익사일>은 액션영화의 정전에 오를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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