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인질들, 남아시아의 이재민 문제가 염려스러운 습한 우기 속, 8월의 첫주다. 올해 한국영화에 대한 근심이 유난한 가운데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와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는 한편으로는 글로벌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간 협정인 FTA가 주도하려는 금융경제가 주조하는 세계 문화 속에서 한국영화의 자리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다.
소박한 화법의 <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의 역설은 두말할 필요없이 사실 화려하지 않다는 점이다. 100억원이 들긴 했지만 이 영화는 그 자본으로 분 치장을 보여줄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
나도 많은 사람들처럼 이 영화의 소박한 어법에 마음을 둔다. 서울이 아닌 지역의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다양한 계층의 관객과 함께 평일 오후에 이 영화를 보았다. 혼자 극장에 가면 대부분 모서리 의자에 앉아 본다. 영화가 시작되자 어둠 속에 두명의 아주머니가 좌석을 찾지 못하는 듯 복도에서 헤매다가 옆자리로 우기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떠들면서 영화를 본다고 생각해 성가시게만 느꼈다. 그러나 점차 이 두 사람의 반응에 관심이 갔다. 한 아주머니가 다른 아주머니에게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관객성은 구성되고 있었다.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구타하는 장면에선 “그땐 저렇게 해도 됐다니까”라는 설명. 이후 함께 눈물을 훔치다가 “저게 다 세트야. 다 새로 지은 것이라니까” 등등의 부연설명. 그러나 도청에서 공수부대와 광주 시민들이 총격전을 벌이기 전부터 영화 끝까지 설명 대신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그쯤 극장 전체가 흐느끼는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나는 이 영화를 전문인들을 위한 시사회에서 보지 않았던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나도 나름대로 근대사, 역사적 트라우마의 재현문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재현의 정치학, 그 윤리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그 매듭진 사유들을 풀어헤치는 어떤 정동의 힘을 보여준다. 즉 광주 민주항쟁에 관한 이제까지의 재현물의 양태를 슬그머니 질박하게 변화시킨다는 말이다. 파토스의 힘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눈물의 질료에 호소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눈물이 정치적 힘의 양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꽃잎>에서 시작된 광주에 대한 해체적 역사 기술과 <박하사탕>의 플래시백을 통한 재방문 그리고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의 당대적 개입에 이어 혹은 이 기존의 재현들과 은근한 결별을 나누며, 이 영화는 구조적 문제를 설명으로 처리해버리고- 군부의 정당성 획득 작업- 그러한 구조에 영향받는 인간관계의 비극을 희극을 곁들여 섞어낸다. 그러니까 많은 부분이 감정에 관계된 문제다. 사실 광주항쟁은 박정희의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배제되어왔던 호남 지역의 축적된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으나 영화는 복합적인 원인을 들추어내기보다는 명약관화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봉(박철민)은 주인공인 강민우(김상경)와 같은 택시회사에 근무하는 동료로 등장한다. 어이없고 처참한 시대 상황에서 희극을 담당해낸다. 최근 한국영화엔 그 장르에 관계없이 이런 광대 격의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지라 지루할까봐 마음이 아슬아슬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나, 광주의 상처가 워낙 큰지라 이 인물이 보이는 과잉성도 이해가 되긴 한다. 즉 <화려한 휴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래서 그때 도청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었는가의 문제에 집중해서 재구성하려는 마이크로 한 재현, 그에 대한 욕망이 있다. 영화에 광주 시민이 군부가 장악한 국가의 폭력과 관련해 역설, 배리, 안타까움, 억울함을 당하는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기 시작하는 장면은 민우와 그가 아끼는 동생 강진우(이준기) 그리고 민우가 연모의 마음을 품고 있는 박신애(이요원)가 함께 영화 구경을 갔을 때다. 택시기사 민우는 엉뚱하게도 당시 히트작이던 <라스트 콘서트>와 <록키> 속편을 놓아두고 이주일 주연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를 보기로 한다. 민우 혼자 웃다 울다 하며 보던 중 최루탄 가스가 터져, 모두 눈물을 터트린 채 밖으로 몰려나왔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부분이다. 일상의 기대와 즐거움이 군사적 국가 폭력으로 내몰리는 순간 구타를 당하는 사람의 피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포스터 위로 튀어오른다.
이유없이 폭도로 몰려 친구와 형제를 잃은 사람들이 총을 잡은 시민군이 되기까지 그리고 바로 그 ‘되기’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유사 형제애나 시민 저항의식, 핍박받는 광주에 대한 사랑 등을 다루면서 이 영화가 호소하는 것은 이러한 항쟁 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해달라는 것이다. 여러 분석에서 다루어졌듯이 광주항쟁은 이후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더불어 당대 민주화 과정의 시금석이다. 당시 시민군은 자신들을 고립시킨 뒤 폭도로 몰아간 군사정권에 대해 시민으로서의 인정, 승인 투쟁을 벌인 셈이고 이러한 측면은 강민우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잘 드러난다. 영화는 이 ‘살아남은 자’의 책무가 기억하는 것임을 도청이 함락되는 날 박신애의 방송을 통해 명확히 전달한다. 이렇게 광주항쟁을 끝까지 대변하고 재현하는 것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비단결 같은 박신애다. 그녀는 간호사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고 대령에서 명예퇴직해 택시운수업을 하는 박흥수(안성기)의 딸이며, 강민우가 사랑하고 강진우가 누나처럼 따르는 여자다. 그녀는 촉매제이며 대변자이고 전령이다. 박신애는 이 영화가 기억의 표상으로 삼으려는 광주의 목소리이자 이미지다. 중요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다. 아마도 국가 폭력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일어났을 법한 장면이 영화의 끝장면으로 구성된다. 진우도 민우도 박흥수도 그리고 인봉도 모두 즐겁다. 민우와 신애의 결혼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축제 분위기다. 그러나 신애의 얼굴은 이상한 불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신애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결혼은 유령의 축제임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장면은 사실 잘못 삽입된 것이다. 이 장면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영화적 허구 안에서는 신애밖에 없는데 이 장면의 신애는 이미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차리고 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유일한 담지자로서의 신애는 유령 신랑과 유령 가족, 친지들의 명랑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 그녀를 신부로 캐스팅한 것은 누구인가? 광주항쟁의 대변인이자 전령이며 생존자이고 기억의 담지자이고 보급자인 그녀는 아버지와 남자친구를 잃은 상황에서 왜 신부로 캐스팅되는가? 그녀가 이 그림에서 느끼는 불길함은 무엇인가? 죽은 자의 신부로 캐스팅됨으로써 사실 이 영화는 역사의 전령, 기억의 호소자인 그녀를 텍스트로부터 슬며시 무의식적으로 떨어뜨려낸다. 그래서 그녀는 불길함을 느낀다. 기억해달라고 자신이 호소했건만, 이 영화의 엔딩이 구성해내는 것은 가짜 미래다. 결코 올 수 없는 미래다. 그렇다고 이것이 역설적인 강렬한 소망 충족 이미지로 보이는 것도 아니다. ‘신부’로서의 그녀는 불안하다. 그리고 이 부분의 삽입은 이 영화의 다른 시퀀스들과 양태적, 질료적으로 너무 다르다. 마지막 양태 변화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퇴행적 변화가 일어난 셈이다.
이야기의 형식을 환골탈태시키는 <별빛 속으로>
이러한 기억의 정치학을 어떤 ‘환상특급’(twilight zone)으로 끌어낸 것이 <별빛 속으로>다. <화려한 휴가>가 1980년 5월 광주의 시간을 명시하고 있다면, <별빛 속으로>는 1979년의 어떤 시간대를 은하수마냥 풀어놓는다. 독일 낭만주의 시와 환상문학양식과 근대의 기담 그리고 70년대 말의 수상한 공기, 군사정권의 폭압을 뒤섞은 이 영화를 보고 있다가 내 옆의 사람들은 ‘근데 이 영화 장르가 뭐니?”라고 수군거린다.
하수상한 시절을 이제껏 너무 직설법으로 엄격하게 다룬 영화들에 비해 이 영화는 일종의 격자 구조를 가로지르면서 젊은 관객을 설복하려고 한다. 즉,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신의 첫사랑담을 전달하는데, 이 사랑 이야기에 그 시대의 어처구니없는 폭압이 묻어나오는 것이다. 꼭 호접몽 나비 CG의 등장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1978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독재시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청춘잔혹물인 김기영 감독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의 환상 구조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가 마음을 움직이는 점은 70년대 말을 겪은 40대 선생님이 20대와 연결 고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부분이다. 선생님은 자신의 직설법을 버리고 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장르적 공식을 개발한다. 공포와 로맨스가 그것이다. 낭만적이고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로 학생들의 귀를 유인한 뒤 어떻게 시대가 그 낭만적 사랑을 교합케 하거나 불화케 하는가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대공사격과 불꽃놀이가 혼동되던 시절의 이야기가 <별빛 속으로>에 융합된다. 난 대학생들이 아직도 선생님의 첫사랑 이야기에 귀를 솔깃해할 것인가에는 의문이 가나(그래서 이 영화의 전제 부분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야기의 형식, 영화의 형식을 환골탈태시켜 70년대 말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음산하면서도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