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그 <애국가>들은 누구를 호명하는가
2007-10-15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화려한 휴가> <디 워> <별빛 속으로>에서 울려퍼지는 <애국가>와 <아리랑>이 의미하는 것

햇볕이 사라진 여름의 서울에서 세편의 한국영화를 보았고 세번의 <애국가>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번의 <애국가>와 한번의 <아리랑>이다. 두번은 극장 밖으로 거대하게 울려퍼졌고, 한번은 극장 밖에선 들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은 이렇게 우렁찬 <애국가>가 막상 동포 20여명이 외국에서 인질로 억류돼 있는 현실의 사건을 둘러싸고는 울려퍼지지 않았으며 종종 그 반대로 냉혹한 비난이 그 인질들을 향해 가해졌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이것은 다수의 감성적 애국주의와 소수의 합리주의의 대립만은 아닐 것이다. 제도/비제도, 다수/소수, 주류/비주류, 기성질서/하위문화를 둘러싸고 새로운 분화와 대립이 형성되는 와중에 <애국가>는 불려지거나 불려지지 않았다. 비평의 일을 포기한 채, 영화 속에서 울려퍼진 <애국가>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가를 묻는 <애국가>

첫 <애국가>는 <화려한 휴가>에서 들었다.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는 이날 정오를 기해 공수부대가 철수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나온 10만여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맞은편 도청쪽에는 공수부대가 여전히 착검과 장전을 한 총을 들고 서 있다. 오후 1시, 건물 외곽의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시민들은 <애국가>를 합창한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계엄군은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다. 시민들은 계엄군마저 함께 부르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애국가>를 더욱 소리 높여 부른다. 화답은 끝내 오지 않는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마지막 소절이 끝나자마자, 계엄군의 총탄이 쏟아지고 잔혹한 살육이 시작된다.

실제 상황을 그대로 옮겨온 그리고 10여년 전 <꽃잎>에서도 재현된 이 장면은 여전히 강렬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를 때, 그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국가를 찬미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을 그 국가의 소속원인 국민으로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낯선 이들이 광장에 모여 어깨를 겯고 동일한 정체성으로 자신을 호명하는 동안, 그들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잠정적으로 벗어난다. 그러나 맞은편에 서 있는 계엄군이라는 더 낯설고 두려운 타자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들에게 <애국가>는 발포의 신호이다. 조국의 이름으로 저항하고, 조국의 이름으로 살육한다. 조국은 어디로 간 걸까. 애국은 양자의 행동의 기원이 아니라,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생활단위와 생활양식의 집적체로서의 국가 공동체는 존재하지만, 시민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한 조국은, 그리고 시민을 죽여서라도 지키려 한 군인들의 조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하는 조국, 부재한 국가, 텅 빈 의미로서의 애국. 켄 로치는 왜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만들었을까. 혹은 명민한 학자 박노자는 왜 자신의 조국 러시아를 버리고 한국을 선택했을까. 조국은 이들에게 질문될 수 있는 실체인가. 물론 <화려한 휴가>는 시민군을 선(善), 계엄군을 악(惡)의 위치에 고정시킨 뒤, 시민군에게 애국의 이름을 선사한다. 그러니까 이 <애국가> 학살 장면은,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가를 묻는 순박한 질문의 컨텍스트 위에 놓여 있다. 대답은 정해져 있다. 시민들은 <애국가>를 불렀고, 침묵하던 계엄군은 <애국가>를 부른 시민을 살해했다. 질문은 근본적인데, 대답은 순박하다. 나는 이 장면의 순박함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 장면은 실제 상황을 재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제 상황은, 선택된 실제 상황이다. 물론 누구도 전부를 말할 수 없다. 똑같이 사실에 충실하다 해도 다른 선택은 다른 영화를 낳았을 것이다.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한 무정부상태에서 치안이 완벽하게 지켜졌던 광주 공동체의 기적 같은 며칠간의 일상을 선택했다면, 이 장면이 함께 선택되었더라도 그 의미는 뒤바뀌었을 것이다. 혹은 <애국가>가 <아리랑>으로 바뀌어졌을지 모른다. “국민의 기억이 관계된 곳에서는 슬픔이 승리보다 더 가치있다. 슬픔은 의무를 부과하고 공동의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라는 에르네스트 르낭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나는 그 다른 선택이 정말로 궁금하다.

관객을 민족의 일원으로 소환시키는 <아리랑>

뜻밖의 장소에서 <아리랑>을 듣게 되었다. <디 워>가 끝날 무렵 신시사이저 연주로 <아리랑>이 흘러나온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한, ‘CG는 좋지만 이야기는 엉성하다’는 비판적 평가에 동의한다. 많이 말해졌고 많은 블록버스터들이 그러하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에 울려나오는 <아리랑>의 멜로디가 당황스러웠다. 주인공의 전생이 500년의 조선인이라 해도, <디 워>는 현재 미국인으로 환생해 인류를 구하려는 초국가적 초역사적 영웅의 이야기다. 고난의 역사를 버텨낸 한국 민초의 애가이며, 70, 80년대 저항운동의 현장에서 <아침이슬>만큼이나 많이 불린 민중의 <애국가>를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착한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비상하는 마지막 시퀀스에 이어 심형래 감독의 스틸 사진들과 함께 그의 영상편지를 담은 에필로그가 <아리랑>의 멜로디가 지속되며 시작될 때, 비로소 <아리랑>이 에필로그를 위한 전주임을 알게 되었다.

<디 워>의 열렬한 지지자인 김종철씨도 “나 역시 심형래 감독의 오랜 골수팬이지만 그건 정말 아니었다. 장르영화의 마지막에 갑자기 다큐멘터리가 나오는 모습은 정말…”(‘김봉석, 김종철, 달시 파켓, <디 워>를 말하다’ <씨네21> 615호)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 에필로그에 대해 더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형래 감독은 “이제 ‘D-WAR’에서 나는 우리만의 기술을 이루었다”, “영화가 가진 무한한 가치를 사람들은 모른다. 나는 세계시장에서 ‘D-WAR’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에필로그에 썼다. 세계영화계는 이미 기술적 성취와 산업적 성공만이 영화의 가치라고 믿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지배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한국의 영화자본이 더욱 차갑고 철저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시점에, 이젠 예술적 재능을 애물단지처럼 취급하는 시점에 그는 쇼박스라는 한국에서 두 번째 큰 메이저 영화사와 함께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만들어 세계시장을 공략하려 한다. 그는 그 길을 가면 된다. 성공하면 세상의 찬사가 쏟아질 테고 실패하더라도 그의 도전정신은 존중받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영화의 가치라고 말하면 안 된다.

아니 그렇게 믿고 말해도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라면 어쩔 수 없다.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 내게 영화 ‘안’에서부터 그 말들이 건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에필로그는 영화에 속한 것인가, 속하지 않은 것인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영화도 기꺼이 때로 즐겁게 봐왔지만, 자기선전의 신이 그리고 마케팅의 언어가 영화 텍스트의 일부가 되어 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한편의 영화는 극장 속의 어둠을 자청해 들어온 관객에게 온전히 그 자신으로 말을 건네야 한다.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아니 엔딩 크레딧이 끝나는 순간부터 혹은 오프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엄청난 돈으로 빚어낸 마케팅의 홍수 속에 살아가더라도,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그리고 거의 어겨지지 않았던 영화의 약속이다. 불과 두 시간 안팎의 시간 동안, 그것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영화이건 아니면 쓰레기통으로 처박힐 영화이건, 스크린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소리의 향연을 어둠 속에서 홀로 만난다는 것. 우리를 흥분시켰던 위대한 영화들의 가치는 오로지 그리고 온전히 이 극히 사적인 만남 안에 있다.

<디 워>의 에필로그가 그 사적인 만남의 마지막 장에서, 그러니까 이 텍스트 안으로 밀고들어와 텍스트의 산업적 가치를 메타적으로 주장할 때, <아리랑>의 멜로디는 감독 개인의 시련에 비극성을 부여하고 그 가치가 민족적 가치와 연관돼 있음을 설득하려 한다. 이때 <아리랑>은 관객 개인을 영화와 만나고 있는 단독자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구성원으로 호명한다. 그렇게 <아리랑>이 영화와 세상 사이의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끝내 <디 워>를 사적으로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비평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간청을 하고 있다. 영화와 극장의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세상에서 자본과 시장가치가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그리고 마케팅의 언어가 세상을 뒤덮어도, 이 사적 만남의 절대적 시간만은 보존해줄 것을 간청하고 있다.

수줍고 무력했던 청년의 고백

또 다른 <애국가>를 <별빛 속으로>에서 들었다. 황규덕 감독은 지금까지 세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네 번째 영화 <별빛 속으로>는 그의 가장 사적인 영화다. 영화의 시간은 현재에서 출발해 <화려한 휴가>보다 1년 전인 1979년 6월의 여전히 어두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대학교수인 현수영은 일요일의 강의실에서 28년 전 대학생 시절의 첫사랑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준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강의실에 없으며, 무너진 건물 더미 위에 깔려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고통받는 제자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수영은 그들의 환영을 초대해 말하지 못한 첫사랑 이야기를 독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행위 자체가 반쯤 꿈인 그 독백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들려지기를 소망하는 허망한 독백이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그는 수줍고 무력하다. 수줍고 무력한 자가 세상을 견뎌내는 방식은 꿈꾸는 것이다. 시로 혹은 이야기로 혹은 영화로 번안되는 꿈으로나마 사랑하는 혹은 연민하는 대상에게 다가가려는 것이다. 세상은 잔혹해 수줍은 자의 꿈에까지 틈입해 불길한 얼룩을 남긴다. 꿈에서조차 그는 세상을 흔들기는커녕 세상이 빚어내는 두려움과 설렘의 풍경 안에서 단 한 사람에게도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멀어지는 대상을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별빛 속으로>는 감동적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꿈이어서이거나 혹은 자유분방한 상상력 때문이 아니라, 그 한없는 수줍음 때문이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토록 수줍은 청년의 내면적 초상을 본 적이 없다.

회상에서 청년 현수영은 그를 시골쥐, 자신을 서울쥐로 칭하는 세련되고 예쁘며 경쾌한 여인 삐삐를 만난다. 그러나 삐삐는 데모를 주동하고 투신자살한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등장하는 괴이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는 현실과 환영의 교차로에서 어리둥절해하고 두려워하며 연민한다. 그녀가 투신자살한 다음날, 늘 그랬듯 오후 5시에 <애국가>가 교정에 울려퍼지고 학생들은 서서 경례를 바친다. 그들 사이를 한 학생이 뛰어가고 뒤쫓아온 형사들이 그를 체포해간다. <화려한 휴가>의 <애국가> 학살 장면과 기묘하게 겹치지만, 여기서 <애국가>는 호명없는 명령이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명령의 집행자들은 움직이는 자를 재빨리 프레임 밖으로 끌고 나간다. 끌려나간 학생의 빈 프레임 후경에는 어제 죽었던 여인이 빙긋 웃으며 여유롭게 앉아 있고 수영은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본다. 며칠 뒤 출석부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그래서 더이상 이름이 불리지 않게 된 수영은 다시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교정에서 꼿꼿이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아니 정말 유령이 되어 배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애국가> 장면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시체처럼 굳어 있고 유령만 살아 움직인다. 유령만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명령으로서의 <애국가>. 그것은 대공서치라이트 혹은 대공사격이 되거나, 수영이 사랑에 취해 현경과 영애의 <그리워라>를 들으며 춤출 때 그가 맞잡은 교련복으로 변주된다. 혹은 여인이 “이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말한 지하 유인물 제작실 뒤편에 걸려 있는 거대한 태극기로 변주된다. 그것은 때로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고, 때로 댄스파트너처럼 정답지만, 동시에 정지명령에 불복하는 자를 추방하고, 밀실을 감시하며, 사랑하는 이를 앗아간다.

수줍은 자는 <애국가>의 명령에 맞서지 못했고, 또한 그 명령에 맞선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수영은 투신 직전의 여인에게서 저항의 이념적 정치적 이유를 듣지 못하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말만 듣는다), 또한 세상을 알지 못했으나(그는 대공사격을 불꽃놀이로 오인한다), 꿈속에서 유령이 되어 그들을 만났고, 현실에서 그들을 연민하고 애도한다. 세상을 다룰 수 없는 수줍은 자에게 꿈꾸기가 삶의 방식이라면 연민과 애도는 그의 윤리다. 그에겐 <애국가>도 저항도, 대공사격과 불꽃놀이도, 와인과 키위와 오토바이도 낯설지만, 오직 한 여인에 이끌려 이 모든 것을 환영과 실재를 오가며 경유한다. <별빛 속으로>는 온전히 첫사랑의 이야기이면서, 그 추억에 침투해 떨쳐버릴 수 없는 집요한 국가에의 기억이기도 하다.

그토록 수줍은 자가 사랑을 잃은 뒤 꿈속에서이긴 하지만 자신의 유령임을 알고 <애국가>의 명령을 위반하며 넋 나간 표정으로 걸어갈 때, 혹은 교련복을 파트너 삼아 자취방에서 서투르게 춤출 때, 이 영화는 어둠 속에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세 번째 <애국가>를 들은 극장에서 나는 비로소 보고 싶던 친구를 만났다. 마음 둘 곳 없던 혼란스런 여름에 가장 좋은 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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