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TV스타 조지 클루니와 짐 캐리는 <ER>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이미지를 등에 업고 할리우드에 입성, 영화인으로 완벽하게 환생했다. 21세기 ‘미드’의 전성시대에서는 그 반대 공식이 더 유효하다. 시시한 영화배우에서 하루아침에 스타로 돌변한 <위기의 주부들>의 테리 해처, 드라마 두편에 연달아 출연하고 있는 <데미지> <쉴드>의 왕성하고 우아한 노년 글렌 클로즈, 여성적 욕망의 아름다운 초상 홀리 헌터의 첫 TV드라마 <세이빙 더 그레이스>의 소식까지 담지 못하는 게 아쉽다. 현재 미국 TV시장에서 가장 열렬한 대접을 받고 있는 영화배우 6인의 제8의 전성기 스토리.
드라마의 품에 안긴 할리우드의 탕아들
<24>의 키퍼 서덜런드 & <두 남자와 1/2>의 찰리 신
키퍼 서덜런드와 찰리 신은 이른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브랫팩’ 멤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코폴라의 <아웃사이더>(1983)나 조엘 슈마허의 <세인트 엘모의 열정>(1985) 같은 데 끼진 못했다. 그러나 키퍼 서덜런드는 <스탠 바이 미>(1986)와 <로스트 보이>(1987)를 통해 소년 갱 리더 타입의 금발의 반항아로 주목받는 중이었고, 찰리 신은 <플래툰>(1986)을 향한 언론과 평단의 열렬한 지지 속에 커리어 순항을 예고받은 터였다. 두 사람은 (이제는 별로 기억되지 않는) 브랫팩 무비 형태의 서부극 <영 건>(1988)에 나란히 출연해 상업적 성공을 거둔 뒤 맷 딜런과 로브 로, 톰 크루즈,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브랫팩 군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언제나 술과 파티, 여성편력이다. 각각 도널드 서덜런드와 마틴 신을 아버지로 둔, ‘배우 가문’의 공통분모도 지닌 두 아들들은 90년대 들어서면서 문화란보다 가십난의 단골 손님이 되어 부모들의 속을 썩였다. 16살에 캐나다 온타리오의 집을 출가, 19살에 이미 33살의 여성 프로듀서와 결혼했다가 딸까지 둔 키퍼 서덜런드는 <유혹의 선>(1990)에서 만난 줄리아 로버츠와 결혼을 엿새 앞둔 어느 날, 클럽에서 한 여자를 만나 잠을 잤던 사실이 들통나 파경을 맞았다. 런던 출생인 키퍼 서덜런드는 4살 때 이혼한 자신의 아버지가 영화배우인지 18살 때까지도 몰랐다고 한다. 아버지와 상관없이 영화배우의 길에 들어섰던 그는 연기 커리어가 풀리지 않자 연출을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1993년에 TV영화 1편, 1995년에 TV드라마 에피소드를 1편 연출한 뒤 1997년 <진실과 결과>라는 장편영화를 만들었는데 악평을 얻고 쫄딱 망했다. 키퍼 서덜런드는 로데오 선수가 되겠다고 할리우드를 떠났다.
아버지를 보며 연기자의 꿈을 키운 찰리 신은 알코올중독과 마약 복용을 상습해오다가 1990년 여름, 그의 가족들이 거의 잡아넣다시피해서 중독자 재활원에 들어가 1달을 지냈다. 그뒤 1년간 술과 약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굳게 지킨 다음, 정확히 366일째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집에 놀러가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고, 아내를 두고서 다른 여자와 27번의 매춘을 해서 고소 및 이혼을 당하고, 여자친구의 팔에 우발적으로 권총을 쏘고, 이름 모를 여자로부터 물리적 폭력을 이유로 고소당했다. 가슴팍에 ‘15분 안에 집에 들어간다’는 글귀를 문신으로 새겨놓고 날마다 술과 약에 절었다. 그는 재활원을 집 드나들듯 했다. 찰리 신은 키퍼 서덜런드처럼 제 발로 할리우드를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와 진지하게 일 얘기를 하려는 사람이 할리우드에 없었다. <못말리는 비행사>(1991), <못말리는 람보>(1993), <머니 토크>(1997) 등의 패러디코미디나 액션물을 하며 찰리 신은 90년대를 보냈다.
2000년, 마침내 ‘멀쩡해’진 찰리 신은 TV시트콤 <스핀 시티>의 새 주연으로 발탁됐다. <CBS>는 4년 전 마이클 J. 폭스 주연으로 인기를 끌어모았던 이 시리즈의 ‘재활’에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브랫팩의 또 다른 멤버이기도 했던 폭스의 대체재로서 재기의 기회를 얻은 찰리 신은 자신의 본명을 쓴 캐릭터를 통해 그의 타고난 능글맞은 코미디 연기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CBS>는 이 시트콤을 2시즌, 33개 에피소드에서 종결시키고 새로 기획 중인 드라마에 찰리 신을 투입했다. <두 남자와 1/2>(Two and a Half Man)은 그렇게 탄생했다. 매사에 무책임하고 여자나 밝히기 좋아하는 노총각이 집에 조카를 들이면서 벌어지는 이 가족적인 코미디는 ‘누군가의 대신’이 아닌 찰리 신 본연의 캐릭터로부터 출발한 드라마다. 캐릭터의 이름은 당연히 찰리. 현재까지 ??시즌이 이어진 이 시리즈의 전선은 당분간 이상무다. 지난해 그는 에피소드당 35만달러의 조건으로 출연 연장계약을 맺으며 미국 코미디 시리즈 사상 최고의 개런티를 받은 배우가 됐다.
한편 <폭스TV>는 2001년 9·11이 터지고 두달도 채 되지 않은 2001년 10월의 마지막 날, 허구의 기관 ‘대테러진압팀’(Counter-Terrorism Unit)에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 암살 계획을 막는다는 가상의 드라마 <24>의 첫화를 공개했다. <CBS>가 <스핀 시티>에 찰리 신을 기용했을 때처럼, <폭스TV>도 키퍼 서덜런드의 기용을 일종의 도박이라 생각했다. 방영 직전 9·11이 터진 것도 우려의 조건이었는데, 속칭 ‘리얼타임 드라마’, 잭 바우어 형사의 24시간을 24개 에피소드로 만든 이 시리즈는 새로운 컨셉과 재미로 호평을 얻고 인기의 급물살을 탔다. 방영 2년 만에 영화화 이야기가 나왔다. 1998년 US 팀 로핑(US Team Roping) 챔피언십에서 보란 듯이 우승을 차지한 다음 순전히 로데오 때문에 사들였던 110만평짜리 목장과 소, 말을 모두 팔아치우고 LA로 돌아온 키퍼 서덜런드는 냉철하고도 목표를 위해서라면 범법을 마다하지 않는 악당 같은 형사 역할로 2002년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해까지 매해 에미상과 골든글로브(2005년 제외)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권총 사용이 합법적인 세계에 편입되었을 뿐 <24>에서 41살의 그는 여전히 냉온을 오가는 금발의 반항아처럼 매력적이다. 키퍼 서덜런드는 자신의 첫 드라마 <24>를 찍는 5년간 하루 14시간씩 일주일에 6일을 촬영장에서 지냈고, 8시즌까지 계약을 연장하며 3시즌에 4천만달러라는, 미 드라마 사상 최고 개런티를 받기에 이르렀다. 2002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서 수상소감을 발표할 때 키퍼 서덜런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찰리(신)의 기분이 이해가 가는군요. 아랫도리 감각이 거의 없는데요.” 이렇게 말한 까닭은, 그날 그 자리에서 찰리 신이 뮤지컬·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복귀작 <스핀 시티>로 평생 첫 주연상의 영예를 얻은 찰리 신의 수상 소감은 이랬다. “이거 약도 안 먹고 취한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 빛을 본 근사한 중년의 매력
<CSI: 마이애미>의 데이비드 카루소 & <CSI: 뉴욕>의 게리 시니즈
제리 브룩하이머는 알고 있다. ‘반장님’이 멋있어야 수사팀이 먹고산다는 사실을. 누가 뭐래도 <CSI> 시리즈의 주인공은 중후하고도 명석한 중년의 카리스마, 바로 반장님들이다. 특히 스핀오프의 반장님들, 호레이쇼 케인 역의 데이비드 카루소와 맥 테일러 역의 게리 시니즈는 이전에 잠시 얻었다 꺼진 인기의 불씨를 이곳에서 다시 피우며 근사한 중년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두 배우는 생애 결정적 스타덤에 오른 시기가 우연찮게 겹친다. 데이비드 카루소는 1993∼94년에 방영한 TV시리즈 <뉴욕경찰 24시>를 통해 스타가 됐고, 게리 시니즈는 같은 시기 개봉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를 통해 전세계로 알려졌다. 그러나 호레이쇼 반장님의 화려한 카리스마와 맥 반장님의 침착하고 다정한 카리스마가 서로 다르듯, 배우로서 두 사람이 걸어온 길과 드라마의 합류 배경도 판이하다.
데이비드 카루소는 1956년 뉴욕 태생이다.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아일랜드인 어머니, 전형적인 미국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던 그는 26살 때 본격적으로 배우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13년 만에 찾아온 스타덤이 바로 뉴욕 경찰들의 이야기를 다룬 <뉴욕경찰 24시>였다. 마흔에 가까웠던 카루소는 이 드라마를 계기로 이틀마다 들어오는 영화 출연 제안에 마침내 결심을 세우고, 제작자 및 동료 배우들과 모두 불화를 빚은 채 시리즈를 떠났다. 2002년 <CSI: 마이애미>(CSI: Miami)로 돌아오기 전까지 TV영화를 포함한 11편의 영화에서 그는 단 한번도 재미보지 못했다. 첫 영화 <이중노출>(Kiss of Death, 1995)과 같은 해 <제이드>로 받은 상은 래즈베리 어워드의 ‘최악의 뉴스타’상. 형편없는 신세가 돼버린 그 시절에 카루소는 한 인터뷰에서 “<배트맨과 로빈>도 하고 <ER>도 하는 조지 클루니처럼 나도 영화와 TV를 병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한섞인 변명을 털어놓기도 했다. 정작 그의 롤모델 조지 클루니는 <배트맨과 로빈>(1997) 홍보 때 카루소의 영화쪽 진출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답했다. “불쌍한 친구. 얼마나 바본지. 그 문제를 갖고 같이 얘기도 많이 했건만. 전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CSI>로 다시 궤도에 오른 데이비드 카루소는 쉰을 넘긴 나이가 무색하게 매력적이다. 적당히 단추를 풀어헤친 셔츠, 바람에 흩날리는 옅은 금발, 마이애미 해변을 응시하는 무심하고 우울한 푸른 눈빛. 그리고 카루소는 겸손하게 말한다. “물론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아요.”
데이비드 카루소보다 1살 위인 게리 시니즈는 할리우드 배우이기 전에 영향력있는 시카고 연극인이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재미삼아 본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때문에 꿈을 세운 게리 시니즈는 고교 졸업 직후 친구들과 고향 시카고에 극단 ‘스테펜볼프 시어터 컴퍼니’를 차렸다. 2번의 토니 남우주연상 후보(1990, 2001) 및 1번의 연출상 후보(1991) 지명, TV시리즈와 영화 연출, <퀵 앤 데드>(1995) <아폴로13>(1995), <스네이크 아이>(1995), <그린 마일>(1999), <미션 투 마스>(2000), <휴먼 스테인>(2003), <포가튼>(2004) 등의 연기 커리어를 모두 종합해볼 때 게리 시니즈는, 스타덤에 목말랐던 데이비드 카루소와 달리 직업의식과 열정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이어온 쪽에 가깝다. 어느 기사에서 “상냥한 말씨를 가진”(sofe-spoken)이라고 묘사된 게리 시니즈는 2004년 초 <CSI> 제작팀이 앤디 가르시아와 레이 리오타에 이어 스핀오프 트리트먼트를 자신에게 들고 찾아왔을 때 “주인공의 삶에 더 깊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달라”는 조건으로 사인을 했고, 26년 전 연극무대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와 세 아이들 곁에 머물 수 있게 LA에서 촬영하자는 조건도 함께 걸었다. 맥 테일러 반장은 배우 자신의 이런 진지하고 섬세한 성격을 고스란히 닮아, 깐깐하고 부리부리한 외모와 달리 따뜻한 속내를 지녔다. 드라마의 분위기도 시리즈 중 가장 감성적이다. 요즘도 군대를 방문하면 군인들에게 “어이, 댄 중위!”(<포레스트 검프>에서 시니즈가 맡았던 베트남 상이용사의 이름)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리 시니즈는 <CSI: 뉴욕>(CSI: NY)을 시작하던 해에 이라크아동돕기 단체를 만들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곳의 학교들을 찾아갔다. 군인들이 어설프게 깔아놓고 간 마룻장 위에서 종이와 연필도 없이 수업 듣는 아이들을 위해 게리 시니즈는 베이스 기타를 잡고 지인들과 함께 록밴드 공연을 열었다. 밴드 이름은 ‘댄 중위 밴드’였다.
평범함을 입고 돌아온 개성파 배우들
<고스트 앤 크라임>의 패트리샤 아퀘트 & <보스턴 리걸>의 제임스 스페이더
검사의 꿈을 지닌 세 아이의 엄마. 서른 넘어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률회사에 들어간 앨리슨 드부아의 이야기 <고스트 앤 크라임>(Medium)은 실존하는 동명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시리즈다. 원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영매사 존 에드워드의 토크쇼와 유사한 형식으로 기획되었는데 파라마운트 텔레비전이 이를 드라마로 수정했고, 그녀의 에이전트는 이것을 전달하며 말했다. “재미있는 게 들어왔어. 근데… TV물이야.” <트루 로맨스> <에드 우드> <로스트 하이웨이> <하이-로 컨트리> <비상근무> <휴먼 네이처> 등 작품성이 고려된 독특한 영화적 세계를 천천히 밟아온 패트리샤 아퀘트는, 그마저도 더디어진 마흔살의 무렵에 <고스트 앤 크라임>의 내용 자체에 흥미를 느껴 수락했다. “TV라고 해서 가린 적은 없다. 평범한 여성 캐릭터를 해보고 싶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저 사람은 우리 옆집 사람이랑 진짜 비슷해’라고 느낄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마침 그녀가 둘째아이를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일상을 연기하고픈 욕구를 더 부추긴 원인이었을지 모른다. 니콜라스 케이지와의 격했던 결혼생활 6년을 정리하고 <휴먼 네이처>(2001)에서 만난 새 남편 토머스 제인과의 사이에서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드라마 제작자가 “그래도 살을 좀 뺐으면 싶다”고 말했을 때 단칼에 거절했다. “주인공이 아이 셋이나 키우면서 뒤늦게 공부 시작한 아줌마잖아요. 그런 여자가 살 빼고 멋있는 옷 입고 다닌다는 게 말이 돼요?” 출산 뒤 더욱 불어나고 있는 몸을 관리하지 않은 이유도, 앨리슨 드부아가 특별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꾸려가려고 애쓰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고스트 앤 크라임>이 빚어내는 진짜 기적의 순간은 그래서 앨리슨이 영매 능력으로 범인의 뒷덜미를 턱 잡을 때가 아니라, 할 말 가득한 죽은 영혼들을 떠올린 그녀가 자기 가족을 더 소중히 지키고자 애쓸 때다. 가수 톰 웨이츠의 부인이 “마치 아프로디테의 분신 같다”고도 말했던 신비한 여배우 패트리샤 아퀘트는 여전히 그 영혼은 비범하되, 아늑하고 소박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40대를 문열었다.
<ABC>가 제임스 스페이더에 표한 우려는 좀더 노골적이었다. <보스턴 리걸>(Boston Legal)과 이것의 모체인 <보스턴 저스티스>(The Practice)의 기획자 데이비드 E. 켈리의 말을 옮기면 이 정도다. “우리가 그 사람 이름을 꺼냈더니 방송사 간부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더라.” 스페이더는 아퀘트보다도 더욱더 TV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긴 코에 음흉한 눈빛을 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크래쉬> <세크레터리> 등에 나와 마약 밀매하고, 채찍 들고 ‘SM 플레이’에 심취한 백인 남자를 법률회사의 변호사들 이야기 주인공으로 쓴다니. 물론 켈리에게도 제임스 스페이더가 1순위는 아니었다. 1997년부터 시작된 드라마의 예산을 <ABC>가 어느 날 절반으로 깎는 바람에 오리지널 캐스트 6명을 갈아치우면서 내놓은 2안이었다. 켈리의 안목에 보답이라도 하듯, 스페이더는 <보스턴 저스티스>에 출연하자마자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샌님처럼 콧방귀를 뀌며 쩨쩨한 한마디를 날리다가 금세 젠틀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앨런 쇼어의 <보스턴 저스티스>는 고스란히 <보스턴 리걸>로 이어졌고, 스페이더는 올해 에미 시상식에서 개인 통산 3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강력한 수상후보 제임스 갠돌피니를 제친 결과. 스페이더는 부시 대통령 부자가 다닌 보스턴의 고급사립학교 필립스 아카데미를 다녔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와 시를 읽고 할아버지와 희곡을 낭독한 예술적인 엘리트였다. 동시에 필립스 아카데미를 11학년에 자퇴, 연기를 하겠다고 뉴욕으로 넘어가 똥거름 주기, 마룻바닥 닦기, 트럭 운전사, 건물 경비원 등의 일을 하며 돈을 번 청춘이기도 했다. 이 묘한 인생의 양면. 앨런 쇼어의 이중적 면모보다 어느 면에선 더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