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양해훈] “당분간은 현실에 발을 붙인 판타지를 만들 거다”
2007-10-24
글 : 강병진
사진 : 이혜정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양해훈 감독

“도대체 양해훈이 누구기에?”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양해훈 감독과 그의 장편 데뷔작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10월까지 잊을 만하면 되새겨지는 이름이었다. 2006년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에서 화제작으로 떠오른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올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영화평론가상’을 받았고, 지난 10월12일에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와이드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게다가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편집하던 도중에 만든 단편 <친애하는 로제타>는 한국영화로는 6년 만에 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제 순방의 해로 보낸 지난 시간이 양해훈 감독에게는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영화제가 별로 재밌지는 않다. 나는 그냥 관객을 만나서 내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더라. 그외 다른 건… 글쎄… 축제가 끝나고 생기는 허망함이 오히려 짙은 것 같다. 아, 이런 얘기하면 안 되는데…. (웃음)”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학창 시절 괴롭힘을 당해 은둔자 외톨이가 된 한 남자가 현관문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언뜻 생각하기에 새벽녘 바닷가에 뜬 일출을 보고 희망을 찾는 성장영화일 것 같지만, 그렇게 녹록지가 않다. 남자는 한 여자를 만나 어렵사리 세상과의 접점을 찾는다. 하지만 문 밖에는 어린 시절의 악몽을 되살리는 녀석이 있다. 게다가 폭력에 길들여진 그에게 잊고 싶은 고통은 반복되고, 반복될수록 고통의 수위는 강도를 더해간다. 여기에는 뚜렷한 해결책도 없고, 대신 그의 고통이 갈 데까지 가도록 몰아붙이는 에너지만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그가 결국 어두컴컴한 방이 아닌 햇빛 아래서 버티고 살 수 있는 의지를 품게 됐다는 것을 내비치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도대체 이 기이한 성장영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 영화에 대한 몇 가지 궁금증 때문에 차기작 시나리오를 쓰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양해훈 감독을 잠시 건져 올렸다.

-부산영화제에서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반응은 어땠나.
=뭐, 나를 앞에 두고 욕은 안 하니까. (웃음) 영화제는 좀 호의적인 관객이 오다보니 많이 좋아해주신 것 같다. 가장 많은 질문이 ‘주인공 이름이 왜 치타인가’ 하는 거였다. 나는 그 치타가 타잔을 쫓아다니는 그 치타라고 설정한 것이어서 내 또래들은 다 알 거라 생각했는데, 80년대 이후 태생자는 진짜 동물 치타라고 생각하더라.

-주인공을 ‘타잔 옆의 치타’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치타가 각 반에 한명씩 있었다. 힘센 애들한테 괴롭힘당하는 친구들의 공통적인 별명이었다. “야, 치타! 매점 가서 빵 사와!” 식의 명령을 듣는 부하 같은 애들 말이다. 나는 주인공을 그만큼 괴로운 애이면서도 평범한 인물로 설정하고 싶었다. 내 또래들은 그런 부분에 공감할 것 같기도 했고.

-다른 인터뷰를 보니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시나리오를 쓰면서 실제로 은둔생활을 했다더라.
=사실 그런 은둔생활 때문에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심한 건 아니었다. 그냥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가서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으니까 집에서 썼던 것뿐이었다. (웃음) 그리고 내가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와서 다시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면 못 쓰는 게 있다. 그래서 이왕이면 틀어박혀 살았고, 웬만한 약속은 몰아서 잡곤 했을 뿐이다. 특히 <실종자들>을 만들고 나서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집에 좀더 많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이야기의 힌트를 얻은 계기는 없었던 건가.
=어떤 르포프로그램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실제 머리가 허리까지 긴 친구가 나왔는데, 이발을 하러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까 2, 3년에 한번씩 자기가 자른다는 거다. 사실 그것도 어떻게 봤냐면, 어느 날 시나리오가 막혀서 소파에 얼굴을 박고 괴로워하다가 TV를 켰더니 나와서 본 거였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쓰면서 그런 식으로 얻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인터넷 마녀사냥 같은 것도 무심결에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본 거고. 에라, 모르겠다 하다보면 누군가가 나한테 신호를 주는구나 싶더라. (웃음)

-왕따문제 등 다루고 있는 소재가 비슷한 탓도 있겠지만, 영화의 첫 장면에 자막으로 등장하는 채팅대화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비슷하더라.
=사실은 여러 가지 CG를 동원할까 했으나 이 영화가 정직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아무래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내 영화보다는 에테르가 있는 영화다. (웃음) 나는 건조하고 하드보일드하지 않나. 하지만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면, 일본 만화나 영화는 그들의 역사 때문인지 사회로 시작해서 개인문제로 끝나지만, 나는 개인에서 시작해서 사회와의 접점으로 끝난다는 거다. 일본 문화의 그런 정서가 나쁘다기보다는 나와는 안 맞는 것 같다.

-표와 제휘의 재회는 만남 자체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그런 만남을 가진 적이 있는가.
=혹시 어렸을 때 왕따였던 거 아닌가. (웃음) 나는 학창 시절 괴롭힘당하거나 괴롭히는 쪽은 아니었고, 괴롭히는 애들 옆에 있었다. 오히려 그런 경험은 군대에서 했다. 바로 밑의 후임병이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아이큐가 약간 떨어지는 친구였다. 아마도 신체검사가 잘못된 거겠지. 그 친구는 매사 자기 욕망에 충실한 행동을 하곤 했다. 배고프면 무조건 먹어야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바로 싸버리는 식으로.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괴롭힘을 당했는데, 나도 그 집단에 속해보니까 역시나 그런 마음이 생기더라. 그런데 제대 뒤에 알고 봤더니 우리 동네에 사는 거다. 지금도 그 동네에 살고 있다. (웃음) 처음 나를 보자마자 “형님!” 이러면서 달려오는데 나는 반가운 척하기가 어렵더라. 이번 영화에서도 그처럼 피해자가 가해자를 보는 느낌만이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를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을 넣고 싶었다. 영화에서는 표가 “나이도 먹었는데, 이제 그만 접자”고 말하지만, 사실 그게 접기 쉬운 게 아니다. 양쪽이 모두 계속 갖고 가는 것이지.

-표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연민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피투성이가 돼서 여자친구 옆에 눕는 장면은 이제 “나도 누구를 때리고 욕하고 괴롭히기가 참 피곤하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차피 폭력 때문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인 입장이다. 휴대폰으로 여자친구의 알몸을 찍는 것도 범죄이기는 했지만, 절대 악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봤다. 실제 스포츠신문 사이트에 있는 야한 게시판에 주민등록번호 치고 들어가면 자기 여자친구의 알몸 사진을 올리는 남자들이 있다. 내 친구 중에도 그걸 찍어서 보여주는 애도 있었고. 왜 저럴까 생각하다보니 차이밍량의 <애정만세>에서 수박 굴리는 장면과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싶었다. 외로워서하는 무의식적인 행동 같은 거지. 그 사진을 찍어서 얘를 한번 망쳐봐야지 하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표에 대해서는 그 정도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장희는 어떻게 만든 캐릭터인가. 다른 인물들에 비해 다소 정형화된 분위기가 있는 것 같더라.
=장희는 내 판타지다. (웃음)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 왜 남자감독이 여자캐릭터를 만들면 죄다 엄마 아니면 창녀, 그것도 아니면 천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도 별수 없이 그런 천사를 만든 것 같다. 그래서 부산 상영본에서는 마지막에 장희가 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추가했다. 원래는 장희가 제휘의 자취를 모른 채 끝나는 거였는데, 다 알고 끝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장희는 <친애하는 로제타>에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제휘는 <견딜 수 없는 것>이나 <실종자들>에도 등장한다. 제휘와 장희는 특정 모델이 있는 인물들인가.
=특정한 모델은 없었다. 단지 내가 인간적으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친애하는 로제타>에서는 극중 아빠 이름이 제휘다. 캐릭터가 어떻든 간에 그냥 내가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 정도일 것 같다.

-작명은 어떻게 한 건가.
=중3 때, 누구한테 내 이름을 소개할 때가 있었다. 그때 꼭 이름을 속였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민제휘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웃음) 장희는 <크레이지 보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학원폭력만화인데 거기 등장하는 남자인물의 이름이다. 그것도 캐릭터 때문에 연결시켰다기보다는 발음과 느낌 때문에 내 영화에 써먹었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에 등장하는 ‘타.파.피.카’란 주문도 그런 식으로 지은 건가.
=그렇다. (웃음) 입에서 잘 굴러가는, 리듬이 있는 음절들을 조합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야발라바히야’ 이런 거를 써볼까 했는데, 이미 있으니까 안 썼다. 어디서 듣지도 못했지만 발음이 편한 단어를 찾았고, 그래서 받침이 없는 말을 붙이다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제휘가 돌로 표의 머리를 때린 이후부터 저수지에 다다를 때까지 잠시 영화는 흑백으로 변한다. 어떤 의도였나.
=그것도 이번 부산 상영작을 재편집하면서 바뀐 거다. 루이스 브뉘엘이 멕시코에 가서 만든 <잊혀진 사람들>이란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영화에도 돌로 사람을 쳐죽인 뒤 도망치는 부분이 있다. 그 장면처럼 인물이 산속에서 뛰어가는 흑백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실은 그렇게 만들어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넣으면 관객이 뭐라 할 것 같아서 이유를 찾아야겠더라. (웃음) “뭐라고 이유를 찾지? 그래, 핸드헬드는 항상 그 순간 주인공의 감정이 거칠기 때문에 썼다고 이야기하니까 나는 그 순간 제휘의 눈에 비친 세상은 흑백이었을 거라고 말해야지”, 이런 식이었다. (웃음)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결국에는 희망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여전히 어두워 보인다. 이 저수지에서 다른 저수지로 옮겨가서 버티며 사는 것 같더라.
=제휘가 그냥 장희랑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산재된 문제가 있고, 돌이킬 수 없는 문제도 남아 있다. 그런 의구심을 가지고 아예 희망적으로 끝낼 수는 없겠더라.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희망을 얹으려 했던 건, 제휘가 결국에는 사람들과 섞이면서 일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내가 <실종자들>을 끝내고 영화를 관둬야겠다고 할 때쯤, 친구랑 차를 끌고 세차장에 갔다가 비슷한 광경을 봤다. 나랑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정말 신나게 차를 닦고 있는데, 그 모습에서 ‘나도 시나리오를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그처럼 제휘한테도 노동을 쥐어주고 싶었다. 키보드 워리어가 사람들과 섞이면서 노동을 한다는 설정이 그나마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말고도 전작들을 보면 10대 생활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앞자리쪽이었나, 뒷자리쪽이었나.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뒷자리쪽이었다. (웃음) 노는 걸 매우 좋아했지만, 공부도 잘하려고 했다. 누군가로부터 왕따를 당하거나, 누군가를 왕따시킨 적은 없었다. 다만 고2 때부터는 공부도 안 하고 열심히 놀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특이해 보이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것 같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늘 하는 말이 “나는 너랑 생각이 달라”였다. (웃음) 어떻게 하면 좀더 특이하게 말할 수 있을까, 특이하게 입을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정말 싫지만. (웃음)

-사실 많은 영화학도들이 처음 영화를 만들 때는 내적 고민을 풀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서 당신의 작품은 그런 모습보다는 사회적인 이슈를 관찰하려고 하는 시선이 먼저 보인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
=사실 내가 사회적인 의식을 가진 건 아니었다. 어떤 공명심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나는 촛불시위 같은 것도 다같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보다는 저마다 다른 생각을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쪽이다.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방관하는 입장이나 다름없는 거지. 다만 그런 이슈들이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깨비>가 아시아영화펀드 제작지원을 받았다는 말도 있지만, <유리겔라와 퀴리부인>을 비롯해 <브라질에서 온 산시로> <기브스> 등등 여러 프로젝트들을 이야기했던데.
=<브라질에서 온 산시로>는 연극으로 해볼까 하다가 접었다. <유리겔라와 퀴리부인>은 상업영화와 결부해서 알콩달콩한 멜로를 만들어보려고 쓴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쓰다보니 못하겠더라. 현재로서는 <도깨비>의 시나리오에 집중할 것 같다. 도깨비인 남자와 사채업자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정말 차기작으로 <도깨비>를 촬영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많은 감독들이 머릿속에 수많은 소재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중 어떤 영화가 투자가 될 수 있는가다. <도깨비>가 투자가 안 된다면, 다른 영화를 먼저 찍게 되지 않을까?

-요즘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사건은 없나.
=이제 그런 영화는 안 만들고 싶다. 현실에만 있는 소재가 아니라 판타지로도 풀 수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 좀더 영화적인 영화랄까. <도깨비>도 같은 맥락에서 구상한 영화다. 실제 머리에 뿔이 있는 도깨비 남자가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를 기형아 아니면 장애인, 심지어 외국인노동자로 보는 거다. 당분간은 그렇게 현실에 발을 붙인 판타지를 만들 것이다. 아, 신정아 사건에는 관심이 많다. 매력있는 여자 같다. 정말 대단해 보이지 않던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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