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11월3일(토) 밤 11시
서인도제도의 아이티 섬. 백인 여자들이 모여든다. 고국에서는 사랑에 지치고 일상에 지친 보잘것없는 여자들이 돈만 들인다면 왕비 대접을 받는 곳. 그녀들은 이곳을 파라다이스라고 부른다. 근육질의 매끈하고 젊은 원주민 청년들의 충성어린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루 종일 해변에서 피부를 그을리고 밤이면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이곳을 그녀들은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온다. 영화는 세명의 백인 여자들의 고백과 해변의 식당에서 일하는 흑인 남자의 독백으로 나뉘어져 있다. 여자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자신의 은밀한 구석을 고백하는데 이것은 그녀들이 왜 이곳까지 올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절실한 변명이다. 하지만 이 천국 같은 곳에 섹스를 넘어서는 사랑이 개입하면서 그녀들의 이상한 공동체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 중년 여자들의 허기진 욕망이 얼마나 절절한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그녀들은 사실 그 땅의 어린 청년들을, 나아가 그 땅을 착취한다. 영화는 해변에서 백인 여자들과 천국을 즐기던 청년들이 자신들이 사는 동네로 돌아갔을 때, 아이티의 현실을 보여준다.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티의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그녀들은 외면한 채 자신들의 파라다이스에 도취된다. 영화는 그녀들의 파라다이스에 함께 매혹되는 대신 곪아가는 현실을 은폐한 그 파라다이스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준다. 쾌락의 해변에 비극적인 죽음이 들어선다. 인생 처음, 비로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은 때때로 연민을 자아내지만, 연민이 느껴지는 순간 그녀들의 비겁함 또한 상기된다. 이들은 생존이 치열하게 진행 중인 타국에 와서 고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을 낭만을 사치한다. 그러나 사실 그 낭만의 밑바탕에는 돈이 있다. 브렌다라는 여인이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는 흑인 청년이 카페 출입에 제지를 당하자 “믿을 수 없는 인종주의군!”이라고 어이없어하는 장면이 있다. 말하자면 이 여자들의 본질을 간명하게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자신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교묘한, 수준 높은 인종주의인지 모르는,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있는 여자들. 이 감상적이고 천박한 인본주의. 여인의 고독한 욕망이 그녀의 모든 선택과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