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세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짙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자살을 결심한 경찰관. 권총에 탄환을 장전한 채, 그는 마지막 의식의 장소인 바닷가에 도착한다. 동네 잡배들을 압도하는 시커먼 슈트와 비장한 표정. 그런데 그때, 해변에 난데없이 한 마리의 닭이 나타난다. 물끄러미 닭과 눈을 맞추는 듯싶던 그는 이내 꽥 소리를 지른다. “꼬꼬댁 꼬꼬꼬꼬꼬!” 5분 가까이 닭의 언어가 인간의 입을 통해 튀어나오는 동안 죽음의 공기는 흩어지고 기괴한 유머가 입꼬리를 절로 올려놓는다. 옴니버스영화 <판타스틱 자살소동>의 두 번째 에피소드 <날아라 닭>은 한마디로, 어이없이 황당한 김남진의 원맨쇼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이 작품은 절대 뺏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감독님을 만나겠다고 성화를 부렸을 정도로 욕심이 나더라.” 드라마에서 그가 전담했던 번듯하고 속 깊은 남자를 생각한다면 의외지만, 김남진이 말하는 김남진은 실상 “비주류의 감수성”에 가깝다. “상업적인 이야기가 아닌, 좀 특이하고 추상적인 느낌의 작품을 늘 동경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마음만큼 잘되지 않더라. 처음에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열번, 스무번, 테이크가 반복되면서 이글대던 답답함과 좌절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은 호흡 하나까지 검열하는 예민함으로 변했다. 무아지경에 사로잡힌 듯 “꼬꼬댁”을 질러대는 장면은 시키지 않은 날갯짓까지 동원해가며 목이 쉬도록 연기에 빠져든 결과다.
2002년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이후 5년 만. 스크린에 돌아오기까지 공백이 길었지만, <판타스틱 자살소동>이 극장을 찾기 전 김남진은 이미 <궁녀>로 한 차례 신고식을 치렀다. 영화 속 절대적인 비중은 크지 않지만, 궁녀들을 유혹해 단물을 빨아먹는 비열한 관리 이형익은 그가 맡은 최초의 “악역”이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하는 게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잠깐 하루 쉬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몸이 카메라 앞에 서는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배우라는 존재는 원래 촬영에 딱 들어가면 몰입할 수 있는 기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익히 알려진 대로 배우라는 이름을 달기 전 김남진은 모델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제주도 밖을 벗어나지 못하던 소년은 탈주의 욕망을 품었고, 대학 진학과 함께 소원을 풀었다. 하지만 “음악을 하면 대학 가기가 수월하다”는 부모님의 엉뚱한 믿음으로 지망한 피아노과는 그를 회의와 자괴의 늪으로 밀어넣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막상 대학에 오니 내가 미쳤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재능있는 사람들이 쌔고 쌘데….” 다른 삶을 소망하던 집념은 30kg 체중 감량이라는 극단적 변화를 통해 부풀었던 몸집을 날렵하게 만들었고, 그를 모델의 세계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연기는 “보는 것은 좋지만, 내가 할 엄두는 나지 않는” 무엇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니 돈도 없고 막막하더라. 그런데 연기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내가 잘하는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던 시기여서,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걸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천년지애> <회전목마> <황태자의 첫사랑>…. 드라마와 드라마를 바쁘게 옮겨다녔고, 인기도 얻었다. 하지만 연기를 “즐긴다기보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김남진은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2005년 드라마 <그녀가 돌아왔다>를 마지막으로 무려 2년 동안, 그는 “놀았다”. “배우마다 각자에게 맞는 타이밍이 있는 것 같다. 2년 동안 쉬면서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연기를 해야겠다는, 정말 연기가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놀랍게도, 마음을 굳히기가 무섭게 일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올해 1월 드라마 <인어이야기>를 시작으로, 미니시리즈 <신현모양처>, 특집극 <그라운드 제로>, 금요드라마 <날아오르다>, 그리고 <궁녀>와 <판타스틱 자살소동>까지, 그는 쉴틈없이 고삐를 조였다. “피아노를 칠 때면 정말 10분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그런데 연기를 하면 아무리 대기 시간이 길어도 너무나 즐겁고 재밌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 같다.”
일견 무뚝뚝할 것 같은 인상이지만, 김남진은 사실 입가에서 웃음을 쉬이 지우지 못하는 타입이다. 말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대학 때는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었고, 지금도 혼자 있을 때면 TV를 켜놓고 배우들 대사에 장단을 맞출 정도다. 얼굴 가득 해맑은 미소를 띤 채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캐스팅이 안 된다”며 거침없이 내뱉는 그는 욕심을 감추지 않되, 쉽사리 조급함에 사로잡히지 않는 평형감각을 갖췄다. “조금씩, 내 명함을 만들어가는 것 같다. <궁녀>도 그렇고 <판타스틱 자살소동>도 그렇고, 진실되게 하나하나 담아가는 거다. 배우라는 직업은 당장 5년, 10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이 끝날 때 커리어도 매듭지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확실히, 그의 명함첩에는 아직 빈자리가 더욱 많다. 하지만 시간은 충분하다. 자신만의 리듬으로, 그 자리를 채워갈 평생이 남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