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단 호크의 첫 번째 소설이자 두 번째 영화 연출작인 <이토록 뜨거운 순간>(The Hottest State)을 쉽게 소개하자면 ‘뉴욕판 <봄날은 간다>’다. 신인배우로 일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청년 윌리엄(마크 웨버)이 가수의 꿈을 품고 맨해튼에 온 사라(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달콤하기 그지없던 밀월여행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뒷걸음질치고 남자는 지옥을 맛본다. <봄날은 간다>와 달리 <이토록 뜨거운 순간>의 연인은 둘 다 스무살 언저리인데, 이 점 물론 연애를 구제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토록 뜨거운 순간>에서 “앗 뜨거워라” 싶은 순간 하나는 감독 에단 호크가 윌리엄의 아버지로 출연하는 장면이다. 번민의 바닥에 떨어진 윌리엄은, 텍사스에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를 찾아가 오래전 삼켰던 질문을 던진다. 텍사스의 학생 부부였던 에단 호크의 부모는 그가 세살 때 결혼을 청산했고, 어린 에단은 엄마를 따라 뉴저지로 이주해 뉴요커로서 살아왔다고 한다. 말하자면, 호크는 자신의 아버지를 연기한 셈이다. 에단 호크의 두 번째 소설 <웬즈데이>(Ash Wednesday)에서도 주인공 커플은 뉴욕주에서 텍사스에 이르는 여행을 한다. 그러고보면 호크의 ‘솔메이트’인 <비포 선라이즈> 연작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역시 텍사스 오스틴 출신이다.
김혜리: 텍사스와 뉴욕은 당신의 마음속 지도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지명인 것 같네요.
에단 호크: 난 뉴요커입니다. 텍사스는 내 선조들이 자리잡아 살았던 곳이고요. 그러니 텍사스는 내게 있어서 신화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죠.
김혜리: <이토록 뜨거운 순간>은, 부모가 보여준 모습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성인이 되어 사랑하는 방식에, 얼마나 질긴 영향을 끼치는지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당신은 부모의 기억이 그토록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믿나요?
에단 호크: 엄청나게 결정적이죠. 가끔 난, 우리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닥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타인과 사건들에 반응하는 데 써요. 부모에게 반응하고 소속된 집단에 반응하고 교육에 반응하죠. 의식적으로 믿는 것과 달리 우리는 삶에 대해 ‘통제력’ 비슷한 것도 발휘하지 못해요.
“내가 준비하거나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배웠어요”
그렇다면 자식에게 본인이 끼칠 영향에 대해서도 예민했을 거다. 승진의 의욕에 불타는 젊은 수사관으로 그를 캐스팅한 <트레이닝 데이>의 안톤 후쿠아 감독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호크에게서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단 호크는 아버지의 경험을 반복하고 말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모든 교차로마다 맞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현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장영화인 것이다.
김혜리: 자전적 성장소설과 성장영화는 향수에 빠지는 경향이 있어요. 간혹 보는 사람이 간지러울 만큼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일도 생기죠. 하지만 당신이 소설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처음 쓰기 시작한 건 고작 스물한살 때였다고 들었고, 그 점이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현재진행시제로 썼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소설을 다시 영화로 만들었을 때는 10년이 흐른 뒤였잖아요. 매체 차이는 둘째치고 시간적 거리가 이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오진 않았나요?
에단 호크: 소설을 쓸 때와 비교해서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는 강도가 약해졌죠. 물론 여전히 지독하게 사적인 이야기지만 꼭 남이 쓴 소설을 각색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어요.
김혜리: 많은 관객이 즉각 윌리엄과 당신을 동일시할 거예요. 여주인공 사라는 윌리엄에 비해 모호한 인물이지만 공감은 할 수 있었어요. 연애가 어렵사리 얻은 독립성을 침해할까봐, 과거 연애에서 범한 미친 짓을 반복할까봐 겁나는 여자의 심리가 이해됐어요. 사라도 당신의 한 조각이 들어 있는 캐릭터인가요?
에단 호크: 알아차렸겠지만, 내 두 번째 소설 <웬즈데이>의 남녀주인공 지미와 크리스티는 둘 다 나예요. 나의 다른 두 얼굴이죠. 그러나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쓸 때는 3차원적 여성 인물을 제대로 창조하지 못했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나의 어떤 부분도 사라에게 투사하지 않았고 다만 아는 여자들에게서 영감을 얻었으니까요…. 게다가 난 그 여자들을 충분히 깊게 이해했던 것 같지 않아요.
혹시 지금 그는 7년의 결혼을 공유했던 여자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비포 선셋>의 제시는 결혼을 가리켜 “한때 데이트했던 사람과 조그만 탁아소를 운영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 대사는 누가 쓴 것일까? 지금까지 에단 호크가 쓴 소설과 감독한 영화들은 매우 사적이다. 아직 딱지가 앉지 않은 본인의 체험을 예술로 옮겨놓는 행위에 따르는 위험을 호크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2006년 <인터뷰>에서 호크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또한 <비포 선라이즈>에 착수하며 지나치게 사적인 영화가 될까봐 우려했지만 영화가 완성됐을 때 참여한 사람들 모두의 영화가 됐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추구하는 작업도 비슷한 것이다.
김혜리: <이토록 뜨거운 순간>에서 배우인 윌리엄은 평생을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보내기는 원치 않는다는 대사를 하더군요. 그 말… 부분적으로는 당신의 고백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은가요?
에단 호크: 그건 바로 내 목소리예요. 한때는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 다른 사람인 척하는 재주라는 사실 때문에 몹시 힘들었어요. 그런 건 뭐랄까… 어딘가 미덥지 않은 재능으로 보였거든요. 지금 와서는 정체성 불안감의 많은 부분이 배우라서기보다 젊음 때문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혜리: 사람들은 배우의 캐릭터를 실제 성품과 혼동하곤 해요. 반대로 배우 본인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물들기도 하고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죽 연기를 하면서 보낸 셈인데,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성격에 흡수된 배역이 있었나요?
에단 호크: 아니, 그런 역할은 전혀 생각나지 않네요. 오히려 남의 연기가 내 성격에 영향을 준 예가 있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잭 니콜슨, <레즈>에서 워런 비티의 연기가 그랬죠. ‘배우 에단 호크’의 연기는 나의 품성을 형성했다기보다 품성의 배출구라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김혜리: ‘X세대의 포스터 모델’이라는 딱지가 100% 기꺼운 선물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뭔가의 상징이 된다는 건 축복도 되지만 불필요한 질투를 부르기도 하고 과도한 책임을 쓰기도 하니까요. 그 꼬리표가 떨어진 지금, 당신의 실체와 관계없는 거대한 무엇의 상징이 됐던 경험을 어떻게 돌아보나요?
에단 호크: 세상이 나를 뭐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버릴지에 대해 내가 준비하거나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웠을 뿐이에요. 할 수 있는 건 진실한 목표를 잃지 않도록 애쓰면서 매일 일하러 현장에 가는 수밖에 없어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곧 나예요”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은 9년 뒤 <비포 선셋>에서 기어코 다시 만난다. <위대한 유산>의 핀(에단 호크)은 첫사랑 에스텔라(기네스 팰트로)와 헤어지고 7년 뒤 재회한다. 이건 에단 호크라는 배우가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욕망이 나비효과처럼 전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20대의 호크는 미래가 궁금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늘 살짝 열려 있는 민감한 입술,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일찌감치 파놓은 미간의 주름, 항상 눈부신 것을 보는 듯한 눈과 그와 대조를 이루는 사내다운 턱. 그는 여자로 하여금 “넌 언젠가 꼭 근사한 남자가 될 거야”라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청년이었다. 어느덧 그 ‘미래’에 당도한 지금 뒤돌아보면, 작가/감독/배우로서 에단 호크의 유전자에 고루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위시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의 다양하고 긴밀한 작업이었던 것 같다.
김혜리: 무슨 인연인지 <비포 선라이즈>의 리뷰를 쓰고 9년 뒤 다시 <비포 선셋>의 리뷰를 썼어요. <비포 선셋>의 기사를 마감하던 새벽, 내 인생의 한 시기가 그와 함께 매듭지어진 듯한 이상한 감정이 갑자기 솟았어요. 그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당신의 이력에서도 두 번째 10년을 열고 닫았더군요. 마치 한쌍의 북엔드처럼요.
에단 호크: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어떤 면에서는… 곧 나예요. 말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나의 어떤 작품도 사적인 표현이라는 면에는 두 영화에 비할 수 없어요. 직접 쓰고 연출한 <이토록 뜨거운 순간>조차 그 점에서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따르지 못해요. 릭(호크는 링클레이터를 ‘릭’이라 부른다)과의 작업은 내 예술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요. 물론 <트레이닝 데이> <가타카> <악마가 알기도 전에 넌 죽었다>(시드니 루멧이 감독한 에단 호크의 새 출연작)처럼 ‘직인’(craftsman)으로서 자랑스러운 영화도 있었죠. 하지만 그들도 <비포 선라이즈> 연작만큼 나를 형성하진 않았어요.
김혜리: <이토록 뜨거운 순간>도 그랬지만, <비포 선라이즈>에서 당신과 공연한 줄리 델피가 감독, 주연한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에서도 링클레이터 감독의 색깔이 두드러지던데, 세 사람의 유대가 도움도 되지만 한계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에단 호크: 릭은 줄리와 내가 자신감을 갖도록 도와줬고, 시네마의 힘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의 영향이 우리의 한계가 될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혹시 당신이 성공이 사람을 규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 물은 거라면 모르겠지만. 글쎄요. 나는 줄리와 릭을 사랑해요.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의 협업이 내게 가져다줄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요.
“수동 타자기로 써요. 인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1996년 데뷔한 작가 에단 호크는 배우 에단 호크보다 가혹한 비평을 감당해야 했다. 어쨌거나 그의 책 표지에는 제목보다 작가 이름이 크게 박혔고, 문학적 미숙함에 대한 비평은 당연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로커고 문학청년이었다고 자기가 정말 예술가인 줄 착각했나보다” 하는 투의 비아냥도 적잖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에단 호크는 잘나가는 분야에서 잘나가는 동안 최대한 대가를 거둬들이는 것으로 만족하기엔, 인생은 너무 긴 여행이라고 보는 쪽이다. 그는 자기를 약간 겁먹게 만드는 방에 머물기를 즐긴다.
김혜리: 당신은 여러 분야에 걸쳐 꽤 성공적으로 일해왔어요. 다양한 활동 가운데 영화 연출에는 얼마나 비중을 두고 있나요? 저술, 연출, 연기 각각에 어떤 의미와 에너지를 분배하나요? 솔직히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남이 불러줘야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약한데, 당신은 영화를 찍지 않을 때마다 권태와 불안에 잡아먹히는 대신 지난번 쓰다가 멈춘 자리로 돌아가 글을 쓰면 되잖아요?
에단 호크: 그냥 그때그때 가장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선택해요. 애초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까닭은 일이 없을 때 배우의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영화 연출은, 나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스릴 넘치는 일이죠. 하지만 이제는 연기, 저술, 연출이 모두 서로를 보완하고 각기 다른 가르침을 나에게 베푼다고 생각해요.
김혜리: 음악 취향도 뚜렷하다고 들었어요. <이토록 뜨거운 순간>도 음악이 흘러 넘치던데요. 약간 과장하면 뮤지컬영화의 속성마저 살짝 느꼈어요.
에단 호크: 내가 연출한 두 영화는 모두 음악에 크게 의지했어요. <첼시 월즈>는 ‘윌코’의 제프 트위디가 스코어를 작곡했고 <이토록 뜨거운 순간>은 제시 해리스가 맡았죠(해리스는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 작곡자로 유명하다). 영화음악을 넣는 일은 대개 본능적인 작업이에요. 톤과 무드를 결정하는 음악은 영화의 ‘퍼스낼리티’에 있어 중대해요. 두편 모두 음악이 영화에 어울리는데다가 그 자체로도 죽이는 음악이라 자랑스러워요.
김혜리: 사소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네요. 본인의 제작사 이름을 ‘언더 더 인플루언스’라고 붙인 사연은 뭐죠? 둘째 소설을 수동 타자기로 썼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왜 그런 결심을 했나요? 당신은 이미 모니터와 키보드에 익숙한 세대 아닌가요?
에단 호크: ‘언더 더 인플루언스’는 존 카사베츠 감독의 영화에서 왔어요(<영향 아래 있는 여자>(Woman under the Influence)). 내 소설의 많은 분량은, 특히 초고는 수동 타자기로 썼어요. 문단을 일부러 조각하거나 이야기에 도입부와 중간, 결말을 만들어 씌우지 않고 인물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면서… 그낭 쓴 거죠. 발견한 게 있어요. 컴퓨터로 문장을 쓰면, 방어막을 내리고 무의식을 불러내는 대신 나도 모르게 즉각 출판할 만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애쓰게 돼요.
에단 호크의 소설은 인물이 선명하고 대사가 아름다운 한편, 플롯에 소홀하다. 데뷔작보다 호평받은 <웬즈데이>는 여행기의 형식으로 그 약점을 비켜갔다. 호크는 이 특징을 배우의 버릇으로 해명한다. 좋은 연기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는 가정 아래 나오기 때문에 플롯은 자연 관심권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미국의 한 문학평론가는 배우 출신 작가들의 이런 성향이 현대문학에 양분이 될 거라고 전망한 적도 있다.
김혜리: 당신은 두 번째 소설을 세 번째 영화 연출작으로 만들고, 다시 세 번째 소설을 써서 네 번째 영화로 만드는 식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다른 감독의 손에 맡기느니 손수 연출하는 편을 택하는 건 이야기가 당신만의 것이라서인가요? 아니면 본인의 소설이 감독으로서 훈련하기에 편한 재료라서인가요?
에단 호크: … 왠지 모르겠지만 <웬즈데이>는 앞으로도 연출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난 다만 현재의 순간을 믿어요”
흡혈귀영화 <데이브레이커>의 촬영현장에서 답장을 쓰고 있을 에단 호크는 이 질문에 이르러 부쩍 기운이 빠진 것 같았다. 다음 소설을 위해 수첩에 마지막으로 메모한 라인을 알려달라는 부탁도 “인용할 만한 가치있는 구절은 전혀 생각 안 난다”고 사양했다. <청춘 스케치>의 우울한 로커 트로이가 소파에 처박힌 모습이 떠올랐다.
김혜리: 얼마 전 톰 스토파드의 연극 <유토피아의 해안>에서 러시아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을 연기했다고 들었어요. 바쿠닌은 타고난 선동가였던 것 같은데 당신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상상이 안 가네요. 정치적 인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국과 미국은 모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요. 예술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고 대중과 소통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나요?
에단 호크: 어려운 질문이에요. 누구나 유명인의 위치를 남용해서 이 세상을 덜떨어진 의견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을 거예요. … 하지만 동시에 모든 시민은 의견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고 공표하도록 허락받고 권유받아야 해요. … 나는 언제가 외쳐야 할 때고 언제가 경청해야 할 때인지 혼돈을 느끼는 일이 많아요. 지금 미국은 내가 볼 때 비난할 만한 많은 추한 일을 범하고 있어요. 궁극적으로는 내 정치적 신념이 나의 예술 속에서 공표되길 바라요. 의제를 내세우기보다 사회를 향해 거울을 치켜듦으로써 말이죠.
김혜리: <비포 선셋>에서 제시는 춤추는 어린 딸을 바라보다 순간적으로 시간을 초월해 첫사랑 여인의 이미지를 보는 남자 이야기를 들려주죠. 우리의 경험이 비록 붙들기 힘든 것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의 차원이 있다고 생각해요?
에단 호크: 모르겠어요. 다만 난 현재의 순간들을 믿어요. 그리고 충분히 주의만 기울인다면 과거와 미래가 그 속에 살아 있음을 순간순간 느낄 수 있다고 믿어요.
매일 세 시간은 책을 읽고 세 시간은 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남자, ‘카르페 디엠’의 구호를 세상에 퍼뜨린 당사자다운 대답이다. 열여섯살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되길 바랐고, 열여섯살부터 스물세살까지는 비트족 우상 닐 캐새디가 되고 싶었다는 에단 호크는 스물셋이 되던 해부터 비로소 에단 호크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오스카와 토니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만큼 당장 추방당할 듯이 욕을 얻어먹는 것도 자신이 선택한 생활양식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인다. <이토록 뜨거운 순간>에서 윌리엄의 화통한 어머니는 이렇게 충고한다. “배우가 되겠다면 사람들이 네 애정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해. 힘들겠지만 결국은 죽을 테니 괜찮아. 그것도 그리 머지않아.”
김혜리: 묘비명으로 어떤 글귀를 원해요? 무덤을 원치 않는다면 어떤 부고를 원해요?
에단 호크: 흐으으음(그는 네개의 알파벳 m을 늘어놓았다). 나의 부고 기사에서 무엇보다 원하는 건 두 가지예요. 첫째, 일단 길 것. 적어도 80년에 걸친 이야기여야 해요. 둘째, 그 부고를 읽은 사람들은 쉬지 않고 며칠 동안 울어야 해요.
다행이야, 라고 생각했다. 서른일곱, 숱한 희망과 실망을 건너온 내 또래 배우 에단 호크는 이제 오래오래 살고 싶어한다. 되도록 많은 책을 읽고 되도록 많은 사람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강해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고아인 척 행세하기도 했던 소년은, 이제 진짜 ‘고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