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리들리 스콧 감독의 <아메리칸 갱스터>는 어떻게 창조됐나
2007-12-27
글 : 최하나

“The Return of Superfly”란 기사에서 출발

시작은 한편의 기사였다. 2000년 8월, <뉴욕 매거진>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뉴욕 할렘을 장악한 헤로인 딜러였던 프랭크 루카스에 대한 장문의 기사를 발표했다. 일흔살의, 휠체어 신세를 진 왕년의 마약왕은 기자와 함께 할렘의 골목을 누비며 생생하고도 섬뜩한 회고담을 쏟아놓았고, 그것은 빤한 자랑으로 얼룩진 퇴물의 입담 이상이었다. 6살에 사촌이 백인 여자를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KKK 단원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프랭크 루카스는 맨몸의 흑인으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합법의 영토 바깥에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60년대 말, 마피아가 절대적인 주도권을 잡고 있던 마약 산업에 발을 담근 뒤 그는 동남아시아에 날아가 직접 마약을 공수해오는 방식을 통해 할렘 뒷골목의 절대적인 강자로 떠올랐다. 그가 한번에 수백kg의 헤로인을 미국 땅에 들여온 수단은 놀랍게도, 베트남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시신을 담은 관을 통해서였다. 대담하고, 파렴치하며, 극적인 드라마. 이야깃거리에 굶주린 할리우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뷰티풀 마인드> <신데렐라 맨>의 프로듀서였던 브라이언 그레이저가 재빨리 기사의 판권을 구입했고, <쉰들러 리스트> <갱스 오브 뉴욕>의 각본가 스티브 자일리언이 펜을 들었다. <트루 블루>라는 타이틀로 탄생한 최초의 시나리오는 브라이언 드 팔마를 잠시 경유했다가, 안톤 후쿠아(<트레이닝 데이> <킹 아더>)의 손에 들어가면서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새 이름을 얻었고, 덴젤 워싱턴, 베니치오 델 토로 주연으로 라인업을 갖추었다. 하지만 2004년 가을, 촬영이 시작되기 불과 한달 전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예산이 1억달러로 치솟은 것을 우려해 결국 프로젝트를 공중분해시켰다. 그레이저는 이미 상당한 액수의 돈을 허공에 날려버린 스튜디오로부터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제목도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말라”는 당부까지 들었다.

6년을 돌고돌아 리들리 스콧 감독 손에

하지만 순순히 마음을 접기엔 그레이저의 집념이 남달랐다. 프랭크 루카스의 인생 역정에 단단히 매혹당한 그는 다음 주자로 테리 조지(<아버지의 이름으로> 각본, <호텔 르완다> 각본·감독)를 데려왔고, 이번에는 아예 시작부터 스티브 자일리언의 스크립트를 “5천만달러짜리 정도로” 각색해줄 것을 부탁했다. 돈 치들과 와킨 피닉스가 새로이 주연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예산의 압박 속에 계산기를 두드리며 쥐어짠 시나리오는 “매력이 없고, 핵심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제작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프랭크 루카스 같은 악한을 영화로 만들려고 해서 저주가 붙었다”는 식의 망상에 사로잡혀가던 그레이저는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리들리 스콧을 찾았다. 사실 스콧은 2002년 즈음에 이미 한번 감독 제안을 받은 바 있었으나, <킹덤 오브 헤븐>의 제작이 결정된 상황이라 고사했던 터였다. 그가 시나리오에 흥미를 표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던 그레이저는 2006년, “이 훌륭한 이야기가 아직까지도 허공에 떠 있는 상황”이라며 스콧에게 읍소했다. 몇년의 세월 동안 숱한 버전으로 탈바꿈을 거듭한 시나리오들을 몽땅 가져다 읽은 리들리 스콧은 스티브 자일리언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채택하는 것을 조건으로 감독직을 수락했다. “자일리언의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나의 첫 반응은 ‘맙소사, 이건 지금 상업영화라고 이야기되는 것의 모든 정의를 거부하고 있잖아’였다. 하지만 대신에 감히 위대한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콧은 <어느 멋진 순간>을 함께 마무리한 친구, 러셀 크로를 패키지로 데리고 왔고 크로의 출연 소식을 들은 덴젤 워싱턴이 “이번엔 정말 하는 게 맞는 거야?” 반문하며 합류했다. 2000년부터 할리우드를 빙글빙글 돌고 돌던 <아메리칸 갱스터>가 6년여의 지루한 방황 끝에 마침내, 영화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대부>가 약간 첨가된, 2007년 버전의 <프렌치 커넥션>이라고 할까.
그러나 궁극적으로 <아메리칸 갱스터>는 장르영화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더욱 가깝다.”
_리들리 스콧

<아메리칸 갱스터>의 제작이 본격화되었을 때, 미국 언론은 대체로 “흑인 버전의 <대부>”를 영화의 밑그림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로저 에버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부>보다는 <월스트리트>에 더욱 가까운”(less <Godfather> than <Wall Street>) 완성품을 내놓았다.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는 할렘 조직의 보스 범피 존슨의 충성스런 운전기사다. 마약 판매와 유통이 주요한 수입원이지만,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무료로 나누어주는 등 획득한 부의 일부를 빈민들에게 돌려주는 존슨은 할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다. 어느 날 그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무리한 영업세를 요구하는 무리들의 난립으로 할렘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프랭크 루카스는 존슨의 뒤를 이어 혼란을 평정하고자 결심한다. 대부의 사망과 후계자의 등장. 여기까지, <아메리칸 갱스터>는 여타의 갱스터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걷는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서론이 아닌 본론부터다. 일개 흑인 운전기사였던 프랭크 루카스는 어떻게 할렘의 왕좌에 등극할 수 있었는가. 리들리 스콧은 그 해답을 “아메리칸 갱스터=아메리칸 비즈니스맨”이라는 수식으로 제시한다. 우선 영화는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몇개의 압축적인 신을 통해 당시의 ‘시장 상황’을 주지시킨다. 60년대 말 할렘의 마약 유통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마피아였고, 그 사슬의 정점에 서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증거품으로 압수한 마약을 희석해 20~30%의 낮은 순도로 마피아에게 되팔고, 마피아가 다시 그것을 거리에 푸는 방식이 하나의 관행으로 자리잡고 있던 시대. 프랭크 루카스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의 1/3이 강력한 마약에 중독됐다”는 뉴스에 착안해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과감한 사업 방식을 구상한다. 직접 동남아시아로 날아가 생산자와 직거래를 트는 것. 다시 말해 중간상인을 없앰으로써 상품의 품질을 높이고 가격은 낮추는 것.

<아메리칸 갱스터>는 프랭크 루카스의 행보가 명민한 자본주의적 논리에 입각한 비즈니스임을 적시한다. 그는 자신이 판매하는 순도 100%의 헤로인을 “블루 매직”이라고 이름 붙이고, ‘브랜드 관리’에 총력을 기울인다.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직, 성실, 근면이지.” 덴젤 워싱턴은 매일 아침 5시에 눈을 뜨고, 경영 지침서에서 오려낸 듯한 훈화를 던지는 프랭크 루카스의 얼굴을 근면하며 냉철한 사업가의 그것으로 표현했다. 총구를 겨눌 때조차 얼음장 같은 냉정을 유지하는 그가 분노하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순간이다. 블루 매직을 구매한 니키 반즈(쿠바 구딩 주니어)가 그것을 불순물과 섞어서 판매하고 있음을 발견한 그는 이렇게 고함친다. “블루 매직은 펩시와 같은 브랜드야. 사람들은 그 이름을 믿고 제품을 사는 거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건 상표권 침해야!”

아메리칸 갱스터=아메리칸 비즈니스맨

<아메리칸 갱스터>의 각본가 스티브 자일리언은 “나는 프랭크 루카스의 삶을 미국의 비즈니스와 인종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했다. 당신이 헤로인을 다른 상품으로 바꾸어 생각해본다면 명백히 알 수 있을 거다. 그건 마약 이야기가 아니라, 만약 흑인 사업가가 산업을 거머쥔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리들리 스콧이 자일리언의 시나리오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 같은 관점에 매혹됐기 때문이다. “마약 딜러에 할렘… 이미 많은 영화들이 할 만큼 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우려는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과 연결시킨 자일리언의 해석은 단연 흥미로웠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그래서, 피비린내보다는 빳빳한 지폐 냄새를 풍긴다. 갱스터영화에 으레 기대하는 요란한 총격, 조직간의 세력 다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유혈의 복수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프랭크 루카스는 총과 칼이 아닌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권좌에 오르며, 루카스에게 밥줄을 위협받게 된 마피아 보스는 “물건을 공유하면 사업을 전국구로 확장할 수 있는 K마트급의 유통망을 제공하겠다”는 동업 제안을 던진다. 다시 말해 <아메리칸 갱스터>의 세계를 관장하는 것은 대부의 영향력도, 조직의 화력도 아닌, 냉정한 시장의 원리다. 프랭크 루카스가 수사망에 걸려드는 후반부 이전까지, 영화는 백인이 장악하고 있던 산업에서 혁신적 발상과 경영으로 “아메리칸드림”을 일궈내는 한 흑인 남자의 성공 스토리를 펼쳐나간다. 그것이 스콧의 의도대로 “다큐멘터리”적인 것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그것은 지극히 미국적인 성공 스토리다.

“프랭크 루카스와 부패한 화이트칼라와 다를 게 뭐가 있나?
그는 아메리칸드림의 뒷면과 같은 존재였다.”
_덴젤 워싱턴

<아메리칸 갱스터>의 제작을 둘러싼 우여곡절 중 하나. 러셀 크로 역시 과거 할리우드를 떠돌던 <아메리칸 갱스터>의 시나리오를 읽었고 출연 제안도 받았으나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은 바 있다. 이유는 형사 리치 로버츠의 캐릭터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 오죽했으면 2006년, 함께 출연할 것을 제안하는 리들리 스콧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프랭크 루카스를 연기하면 안 될까?”라고 말했을까. 그러나 본래 프랭크 루카스에게 절대적인 무게중심을 실었던 시나리오는 스콧의 손을 거치며 리치 로버츠에게 거의 대등한 분량과 비중을 할애했고, 완성된 영화는 2시간이 넘도록 두 남자를 평행으로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혹은 관객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도, 영화가 끝나기 20여분 전까지 둘을 대면시키지 않는다. 이는 리들리 스콧의 ‘개정판’이 아닌 스티브 자일리언의 설정으로, 스콧이 그의 시나리오를 택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두 남자가 마지막에 가서야 마주친다는 것이 가장 매혹적인 점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큰 도전이었다”는 스콧은 “대신 두 인물은 서로 얽히지 않고도 각자의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각각의 캐릭터를 최대한 풍부(rich)하게 구축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러셀 크로의 개인적인 욕심과는 별개로, 리치의 캐릭터가 리치(rich)해지는 것은 구성의 묘미를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결과는 흥미롭게도, 단선적인 범인-형사의 추격 구도가 아닌, 두 캐릭터가 절묘하게 서로를 반사하는 거울의 형상으로 완성됐다.

다르고 또 닮은 두 남자가 빚어내는 시대의 초상

프랭크 루카스는 마약을 팔아치워 부를 얻은 범죄자이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만큼은 가족을 끔찍하게 위하고 아내에게 충실한 가장이자, 주말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 도장을 찍는 독실한 신도다. 이는 실존 인물 프랭크 루카스에 근거를 둔 설정이다. 반면 프랭크 루카스를 잡아넣은 경찰이라는 기본적인 뼈대 위에 허구의 상상력을 도톰히 입힌 리치 로버츠는 부패한 경찰 조직 내부에서 왕따를 당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지만, 정작 가정에서는 아내와 자식을 팽개치고 상습적인 외도를 저지르는 성품의 남자로 구성됐다. 러셀 크로는 “이 이야기의 매력은 단 한번도 또렷하게 선과 악이 갈리지 않는다는 것”임을 강조한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다분히 역설적인 구도로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의 이중적 세계를 교차시키며, 결국 두 캐릭터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범죄자와 경찰, 성실한 가장과 형편없는 남자. 하지만 그들은 둘 다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배척당하는 아웃사이더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프랭크 루카스가 마피아와 경찰이 지배하는 뒷골목의 룰을 깬 존재라면, 리치 로버츠는 경찰 내부의 암묵적인 계율을 위반한 배신자다. 탁구공을 주고받듯 이쪽 진영과 저쪽 진영을 다이내믹하게 오가는 <아메리칸 갱스터>는 다르고 또 닮은 두 남자의 이야기를 엮어 좀더 커다란 시대의 초상을 완성한다. 그것은 사법과 범죄의, 전쟁과 자본의 공생으로 얼룩진 미국의 초상이다. 영화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원작이 된 <뉴욕 매거진>의 기사에서 실제의 프랭크 루카스가 밝히는 농담 같은 후일담 하나. “한번은 헤로인 125kg을 들여오려고 하는데 마땅한 비행기가 없었어. 딱 하나 있었던 게 헨리 키신저 비행기였지. 장교에게 10만달러를 주고 거기다 약을 실었어. 어떤 놈이 감히 헨리 키신저의 비행기를 수색하겠어? 헨리 키신저라니! 자기가 마약을 밀수하는 데 공헌했다는 걸 알았다면 그가 뭐라 했을지 정말 궁금하군. 하하하하….”

“나는 아무 데도 안 가. 나는 도망치지 않아. 이곳은 미국이야!”
(I ain’t goin’ nowhere, I ain’t run away from nobody. This is AMERICA!)
_영화 속 프랭크 루카스의 대사

<아메리칸 갱스터>는 뉴욕 안에서만 5개 지역에 걸쳐 무려 180곳의 로케이션을 기록했다. 그 모든 현장에는, 거의 매일 같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한 77살의 프랭크 루카스가 있었고, 지역 주민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는 대신 뜨거운 호기심으로 응답했다. “최고의 배우” 덴젤 워싱턴이 자신을 연기한다는 사실에 흡족함을 감추지 않던 프랭크 루카스는 덴젤 워싱턴으로부터 고마움의 표시로 “롤스로이스를 살 정도의 돈을 받았고, 아내가 차 말고 집을 원하는 바람에” 새로운 집을 대신 얻었다.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해 박스오피스 정상에 등극하자 MTV가 재빠르게 프랭크 루카스를 인터뷰 자리에 앉혔고 그의 입을 경유한 “후속편의 가능성”은 대대적인 헤드라인이 됐다. 잠시 시계바늘을 뒤로 돌려 2000년, <뉴욕 매거진>의 기사 말미, 그가 기자에게 말한다. “이봐, 지금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지금 여기 앉아서 당신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걸어다니며, 말을 하고 있다는 거. 이미 수백번은 죽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왜 그런지 알아? 그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7년이 지난 뒤, 묘하게 들어맞는 그의 선언. 30년 전 헤로인을 팔아 하루에 100만달러를 벌어들이던 할렘의 마약왕은 2007년 할리우드의 1억달러짜리 세공품으로 귀환했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할리우드 엔딩. 지극히 미국적인 이야기에 걸맞은 지극히 미국적인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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