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말이 나온 김에 <말할 수 없는 비밀>로 건너가겠습니다.
안개: 계시록 이야기하다가 계륜미를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
맨홀: 배우 이름이 무슨 미학의 한 범주 같죠? 계륜미. ^^
안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요즘 인터넷에서 개봉 전부터 열기가 대단하더군요. 개봉도 안 했는데, 포털엔 리뷰가 수천개 떠 있고, 평점도 역사상 모든 영화 중 현재까지 1위라니까요. 무엇보다 제가 불만인 것은, 다들 어떻게 보셨는지, 원…. -.-
맨홀: 미디어를 통해 대중 사이에 퍼지는 순서가 뒤집혀 반대방향으로 정보가 유통된 경우죠? 저도 그런 반응에 놀라 시사회를 챙겨보았으니까요. 노을 지는 해변과 목조 다리, 서구 양식의 교정이 즐비한 이 영화의 공간과 일화들은 순정만화적 상상력을 다분히 수용한 듯했어요. 대만의 실제 모습을 제가 본 적 없으니 영화 속 풍경이 얼마나 미화됐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요.
안개: 하이틴영화로서 확실히 예쁘고 고운 것들만 모아모아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보고나니 왜 그리들 좋아하시는지 짐작할 수 있겠더라고요.
맨홀: 캐릭터도 마찬가지죠. 천재적인 피아노 솜씨를 가진 과묵한 주인공 소년 샤오룬(주걸륜)은 무려 매일 집에 돌아가면 쇼팽을 틀어놓고 아버지를 위해 저녁을 준비한답니다.-_-
안개: 게다가 첫사랑의 테마에 멋진 로케이션에 감미로운 음악, 기습 키스와 중병과 함께 타는 자전거 그리고 지켜야 할 약속까지 있으니 다 있는 거죠.+_+
맨홀: 그런데 문제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꽤 일찌감치 짐작할 수 있더군요. 처음에는 당차고 대담한 샤오위의 모습이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소녀의 전형적 캐릭터라 “제발 불치병만은 아니길”하고 속으로 빌었다죠. ^^ 뭐 병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결정적이진 않았습니다.
안개: 요즘은 주인공의 병 중에서 특히 천식이 유행인 것 같더라고요. 거의 식민지 시대 배경 영화의 결핵에 해당하는 듯. -.-
맨홀: 천식은 할리우드영화에서도 인기예요. 특히 괴한이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 침입한 상황에서 어린이나 엄마가 천식을 앓는 예가 많죠.
안개: <패닉룸>이 대표적이죠.
맨홀: ^^ 샤오위의 비밀을 샤오룬이 깨닫지 못한다는 설정은 합리적이진 않지만 후반에 이르러 거의 <해리 포터> 시리즈에 가까운 환상성으로 도약하기 때문에 영화 전체 톤에 비하면 납득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첫사랑의 묘사도 오래된 전형의 반복이긴 하지만 뉘앙스가 풍부한 대목도 있었어요. 소녀가 눈을 처음 떴을 때 보는 사람이 소년이어야 만남이 성사된다는 전제가 있는데, 그 일이 제법 자주 일어나는 건 소년의 눈도 늘 소녀를 찾고 있었기 때문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어요.
안개: 이 영화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에요. 소녀가 소년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너무 빨리 가지마. 금방 집에 가겠어”라고 외치는 장면은 참 고왔어요. 다들 백미로 꼽는 피아노 배틀을 비롯한 연주장면도 좋았고요. 특히 저는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서 연탄곡을 칠 때 소년이 소녀의 손을 살짝 두드려가면서 연주하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맨홀: <말할 수 없는 비밀>은 화면 안 음악과 밖 음악이 공히 많이 쓰였는데, 확실히 화면 안 음악은 영화의 매력포인트로 백분 활용되고 있어요. 한 피아노를 둘이 치는 연탄곡,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음악 등 다양한 구성으로 청춘의 혈기, 소통의 열망 등을 그때그때 묘사했죠. 또 피아노가 역동적인 액션과 썩 어울리는 악기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켰고요.
안개: 피아노 치는 장면들을 특수효과나 화려한 카메라 앵글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폼나게 빚어냈죠.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기시감이 많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어요. 창의적인 측면에선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었죠. 몇몇 영화에 너무 결정적인 빚을 지고 있더군요.
맨홀: 뭐 ‘시공초월 로맨스’는 워낙 많은 영화가 그려서 멜로드라마의 한 하위 장르로 봐도 좋지 않을까요?
안개: 그렇다 해도 <식스 센스> 영향이 너무 강하고 <프리퀀시>를 그대로 따온 장면도 있죠. 책상에 글씨를 써서 시간을 넘어 소통하는 장면 말입니다.
맨홀: <사랑의 은하수> <동감> <시간을 달리는 소녀> <시월애> 등등 숱한 영화들이 레퍼런스로 떠오르죠. 보태자면 전 이 영화가 클래식 음악과 청춘의 감수성이 만나는 황홀한 모멘트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일본 만화 <노다메 칸타빌레>와 동명 드라마 팬 일부에게도 호소할 것 같아요.
안개: 이야기 측면보다 한국 관객이 받아들이는 양상으로 보자면, 일본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 영화도 한국 관객 사이에서 은근 클래식이 되어가고 있거든요.
맨홀: 그런데 저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검증된 공식을 혼합해 레시피를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로맨스에서 초현실적 요소를, 호러적 상황에서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를 찾아내 젊은 관객을 철저히 공략한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고 봐요. 사실 이런 영화에 대한 수요도 한국영화가 채워주지 못한다고 볼 수 있거든요.
안개: 그 빈틈을 현재 일본영화들이 파고드는 면이 분명히 있죠.
김혜리 “디즈니의 텃밭인 가족 관객에 대한 소구력을 보존하면서도 스스로를 조롱하는 위트를 발휘하는 영리한 영화였어요.”
이동진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두 전형적인 요소들이 만나서 빚어지는 이색적인 재미였어요. 지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로서는 전형에 해당하잖아요? 로버트 역시 로맨틱코미디가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전형적 캐릭터죠. 그런데 그들이 만났을 때 영화 전체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이 있었어요.”
맨홀:오늘 영화들은 공교롭게도 시공에 뚫린 일종의 ‘구멍’ 때문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영화가 많은데요.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는 그 구멍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세상과 현실의 맨해튼 사이에 뚫린 맨홀입니다. -_-# 이 영화는 디즈니사의 로고인 불꽃놀이하는 성 안으로 대뜸 들어가면서 시작하죠. 그리고 무려 12분가량 착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와 왕자와 마녀가 나오는 전통적 셀애니메이션이 도입부를 이룹니다. 이건 실사 대목에서 배우가 연기할 인물들이 어떤 규범에 따라 행동할지 예고하는 일러두기에 해당되죠.
안개: 그 대목은 전체의 밑그림 역할을 하는 한편 향수를 자극하는 측면도 있더라고요.
맨홀: 고지식한 저는 초반 3분간 상영관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근심했다고요! -..-
안개; 주인공 지젤이 동물들과 어울린 첫 뮤지컬 시퀀스는 <백설공주>의 상황을 <언더 더 시>를 부를 때의 <인어공주>적 동선으로 풀어낸 것 같죠?
맨홀: 외모로 보면 지젤은 인어공주 에이리얼을 제일 닮았죠. 사는 공간의 풍경과 마녀의 유혹은 <백설공주>, 뒤의 플롯에는 <신데렐라>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들어 있고요.
안개: 또 무도회 장면은 <미녀와 야수>를 떠올리게 하죠.
맨홀: <말할 수 없는 비밀>처럼 이 영화의 서사구조도 이미 누차 시험된 틀이에요. 외계인이나 원시인이 현대에 떨어져서 문화충격을 겪는 이야기들 많잖아요? <비지터>라든가 <케이트와 레오폴드>라든가.
안개: 하지만 저는 이 영화는 디즈니 데이터베이스 재활용에 더해 드림웍스의 <슈렉>이 꽤 영향을 끼친 기획이라고 봤어요. 특정 유머까지요. 동물들과 지젤이 함께 청소를 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의 마침표는 여태 같이 일하던 비둘기가 바퀴벌레를 잡아먹는 것이잖아요? 이건 <슈렉>에서 함께 노래하다가 배가 터져 죽는 새의 유머에 가깝죠. 현실로 건너온 지젤이 지저분한 맨해튼의 테라스에서 애니메이션처럼 노래할 때 두 차례 점프컷 되면서 기묘한 부조화의 웃음을 주는 장면도 진짜 웃기더군요.
맨홀: 동물들을 부르는 만화적 능력은 그대로인데, 맨해튼의 리얼리티는 엄격히 지키느라 몰려든 동물이 비둘기, 쥐, 바퀴벌레잖아요. 디즈니도 비위가 많이 좋아졌어요~. ^.~
안개: 재미있었어요. 바퀴벌레들이 일하는 장면에선 <조의 아파트>라는 영화도 떠올랐고요. 그게 다 <슈렉>의 영향이었을 거예요, 틀림없이.*.*
맨홀: 배가 아프긴 했겠죠. 우리 재료인데 건너편 식당에서 음식을 팔다니.^.~
안개: 더구나 그 음식이 엄청 잘 팔렸으니까요. ^_^
맨홀: 지젤로 분한 에이미 애덤스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죠? 지난해 개봉한 <준벅>의 연기로 회자됐던 유망주인데요. 보통 우리가 미묘한 연기를 잘하는 배우와 캐리커처풍 연기 잘하는 배우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이 영화에서 애덤스는, 자기 캐릭터를 얕보지 않고 완벽하게 믿는 배우는 어떤 텍스트에서나 설득력을 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어요. 아직 <준벅>을 안 보신 관객은 다시 찾아보시고 이 멋진 여배우를 영접하시길….
안개: 순진무구한 얼굴이랄까, 백치미랄까. 사실 머리에 꽃만 안 꽂았지 다른 배우가 했으면 정말 이상할 수도 있는 배역인데 아주 잘 어울리더군요.
맨홀:마녀 역으로는 무려 수잔 서랜던 여사가 왕림하셨는데요. 사실 디즈니판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나쁜 왕비와 외모가 닮긴 했어요.
안개: 헐헐. 서랜던 아니라 팀 로빈스까지 더불어 화날 듯.
맨홀: 어머 그 마녀, 대단한 미인인걸요? 하여간 <스타더스트>에서 마녀로 분했던 미셸 파이퍼에 이어, 메릴 스트립 정도를 제외하면 장년 여배우는 마녀가 되지 않으면 주류영화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건가 살짝 서글픈 심정도 들었어요.
안개: 제가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두 전형적인 요소들이 만나서 빚어지는 이색적인 재미였어요.지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로서는 전형에 해당하잖아요? 그리고 현실세계의 상대역 로버트(패트릭 뎀시) 역시 ‘사랑을 믿지 않는 이혼 전문 변호사’라는 로맨틱코미디가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전형적 캐릭터죠. 그런데 그런 애니의 전형과 로맨틱코미디 극영화의 전형이 만났을 때 살짝 신선해지면서 영화 전체가 흥미롭게 되는 지점이 있다는 거죠.
맨홀: <마법에 걸린 사랑>이 예찬하는 또 다른 전형은 이상화된 뉴욕의 이미지예요. 센트럴 파크에서 펼쳐지는 근래 보기 드문 대형 뮤지컬 시퀀스에 함축돼 있죠. 출신이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교류하고 차이를 초월한 사랑이 가능하고 하모니가 이뤄지는 광장 같은 도시라는 뉴욕의 이미지에 바치는 찬가랄까요? 심지어 그 다른 출신지가 애니메이션 세계의 ‘안달레시아’라고 해도 말이죠. ^0^
안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송>신의 업데이트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마법에 걸린 사랑>은 전반적으로 귀엽고 깜찍한 맛이 잘 살아 있는 영화예요. 보는 내내 흥미로웠어요. 여자가 몸으로 남자를 구해내는 결말도 정치적으로 공정하기까지 하잖아요? 반면 그런 의식적 공정함 이면에 무의식적 불공정함이 내비치는 순간도 있었어요. 악당이 나쁜 짓을 할 때면 소수 인종인 히스패닉 행상, 인도계 택시 기사로 변장한다는 점이나 화장이 짙으면 남자들이 헤픈 여자로 본다고 충고하는 여섯살 소녀 모건의 대사가 그랬죠.
맨홀: 그래도 디즈니의 텃밭인 가족 관객에 대한 소구력을 보존하면서도 스스로를 조롱하는 위트를 발휘하는 영리한 영화였어요.
안개: 참, 줄리 앤드루스가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지젤이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처럼 커튼으로 옷 해입는 장면이 나와서 그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맨홀: 어쨌거나 할리우드는 최근 두해 동안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갱신 능력을 과시하고 있네요.
안개: 예전의 할리우드가 아니여….+_+
맨홀: 이번주 영화들을 보며 언제나 다른 세계로 통하는 구멍을 뚫어놓아야 나의 세계가 번영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말만 이렇지 실생활에서는 퇴로 뚫기도 급급하다는…. T-T
안개: ‘여기 아니면 저기라도’라는 배짱이 필요한데, 실은 ‘저기서 안 될 테니 여기라도’로 살기에 바쁘니…. -_-#
맨홀: 라이프 플래너가 인생설계해주는 사람인 줄 알고 보험 들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안개: 에고, 나 같은 사람 하나 더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