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나카무라 다카유키] “다큐멘터리의 모든 건 상대와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2008-02-12
글 : 정재혁
사진 : 오계옥
<요코하마 메리>의 나카무라 다카유키 감독

얼굴을 하얗게 칠한 화장과 풍성한 볼륨의 흰 드레스. 2차 세계대전 이후 항구도시 요코하마에서 창부로 산 메리는 요코하마의 미운 상징이었다. 20대 시절엔 자존심이 세 장군 이상만을 상대하며 황후폐하라 불렸지만, 그녀가 활동하던 술집 네기시야가 불에 타 갈 곳이 없어진 뒤에는 큰 가방을 끌고 이곳 저곳을 헤매는 ‘팡팡’(미군만을 상대하는 창부)이 되었다. 건물 뒷골목에 누워 자고 항상 거리 구석에 서 있는 메리. 요코하마 메리라 불리는 그녀는 어느새 요코하마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1995년 그녀는 갑자기 사라졌다. 나카무라 다카유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요코하마 메리>는 사라진 메리의 행적을 추적하는 영화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메리의 역사를, 전후 요코하마의 역사를 그려간다. 관광지, 데이트 장소로만 익숙한 요코하마의 아픈 상처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촬영만 5년, 조사 기간까지 총 7년이 소요된 작품 <요코하마 메리>. 자신이 자란 동네의 이야기를 밉지만 떨쳐낼 수 없었던 여자 메리에게서 시작하는 나카무라 감독은 조심스런 태도로 다소 진부한 이야기에 진심을 싣는다. 영화의 국내 개봉을 맞아 내한한 나카무라 다카유키 감독을 만났다.

-촬영만 5년이 걸렸다고 들었다. 영화를 기획한 계기가 뭔가.
=영화를 하자고 마음먹은 건 1997년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오가와 신스케를 존경하는데 그분은 영화를 소재가 있는 장소에 가 생활을 하며 찍는다. 나도 그 방법을 시도해보자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내가 자란 요코하마가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1995년 메리씨가 갑자기 사라져서 흥미가 있었는데 영화의 소재를 생각하다 메리씨를 다시 떠올렸다.

-‘요코하마 메리’에 대한 평소의 느낌은 어떤 거였나.
=중학생 때 영화를 좋아해서 매일 주말이면 영화관에 갔는데 가는 길에 항상 메리씨가 있었다. 그냥 요코하마의 풍경이랄까. 메리씨에 대한 소문은 너무 많았다. 원래는 남자다, 노숙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급맨션에 산다 등. 무서운 아줌마의 느낌이었고 목욕을 안 해서 가까이 가면 악취가 향수와 섞여 지독한 냄새개 났다. 미군만 상대하는 창부라고 했지만 실제로 미군이 가는 레스토랑에는 출입이 금지됐었다. 거기엔 미군 가족들이 있으니까. 같은 일본인이라도 요코하마 사람과 외부 사람들 사이에도 메리씨에 대한 인상은 꽤 달랐다. 외부 사람들은 그냥 하얗게 색칠한 이상한 여자라고만 생각한다.

-촬영을 하면서 메리에 대한 느낌이 바뀌었나.
=많이 바뀌었다. 처음엔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그냥 정신이 이상한 아줌마라고 생각했으니까. 촬영을 하기 전에 2년 동안 조사를 했는데 가장 놀란 건 메리씨에게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내가 메리씨 삶에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하지만 나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메리씨와 관계를 가졌다면 나도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

-<요코하마 메리>엔 메리를 인터뷰한 화면이 없다. 주인공의 말 없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영화를 구성하는데 이 과정에 많은 난점이 있었을 것 같다.
=일단 메리씨에 대한 정보는 도서관이랄지, 책에 없다. 그럼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더라. 97년부터 거리를 걸으며 모든 가게에 들어가 메리씨에 대해 물었다. 그걸 2년 동안 반복했다. 메리씨가 다녔다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 자르면서 질문하고, 약을 사면서도 질문하고. 구술민속학의 방식으로 접근한 거다. 이 과정도 힘들었지만 이렇게 모인 정보가 너무 방대해서 어디까지 내가 이걸 담아야 하는지도 문제였다. 그리고 더 곤란했던 건 2000년에 메리씨가 사는 곳을 알아버렸다는 거다. 대상이 없는 다큐를 찍고 있는데 대상이 나타나버렸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알면서 메리씨를 안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결국 메리씨가 있는 노인요양원에 가서 일단 자원활동을 했다. 직접 만나보니 오히려 방대한 정보로 꽉 찼던 머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이 작품을 끝내야 할지가 떠오르더라.

-영화를 완성한 뒤 1~2년 사이에 출연자들이 하나둘 죽었다고 들었다.
=간지로씨(메리와 우정을 쌓은 재즈가수)도 촬영이 끝나고 1년 안에 죽었고, 메리씨의 남동생도 금방 세상을 떠났다. 조금만 작업이 더 지체됐다면 영화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거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카메라를 돌리진 않는다. 한번 찾아가서 찍고 끝이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난폭한 방식은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어디서 끝내야 할지 결정하는 게 다큐멘터리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데 나는 모든 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집 없이 가방을 끌고 다니는 메리의 모습은 전후 일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단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말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가 1975년생인데 메리씨의 이야기도 대부분 내가 태어나기 전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내레이션을 쓰지 않았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걸 윗세대가 이야기하는 것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들의 목소리를 담고 청취할 순 있지만 그걸 내 목소리로 이야기할 순 없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 역사 자체로의 역사를 말하고 싶진 않다. 가령 지금 이 커피숍에 50년 전에 뭐가 있었을까, 라는 물음처럼 역사 안의 사람들, 감정에서 출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나.
=요코하마의 60년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네기시야를 배경으로 인간들의 모습을 현재의 시점에서 찍고 싶다. 당시 요코하마의 절반은 미국의 시대였으니까. 현재와 연결된 역사의 시점에서 그때를 다시 얘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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