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심플>과 <파고>를 넘어, 그리고 코맥 매카시
그럼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가장 유사한 코언 형제의 영화를 꼽는다면 <블러드 심플>(1984)과 <파고>(1996)다.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정체불명의 사립탐정과의 싸움이라는 점에서는 <블러드 심플>과, 그리고 돈가방을 둘러싼 추격극이라는 점에서는 <파고>와 닮았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뱅상 말로자는 “살인의 관계라는 점에서 그들이 <블러드 심플>과 <파고>의 세계로 다시 돌아갔다”고도 말한다. 더불어 그들이 가장 소규모 영화였다고 말하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2001)의 이발소를 포함해 이후 <참을 수 없는 사랑>(2003)의 오피스와 <레이디킬러>의 지하 작업실, 심지어 옴니버스영화 <사랑해, 파리>의 지하철역에 이르기까지 코언 형제답지 않게 연이어 닫힌 공간에서만 작업했었기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블러드 심플>과 <파고>처럼 모처럼 그의 영화에서 공간적 해방감을 느끼게 해준다. 더불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텍사스 서부 지역은 <블러드 심플>을 촬영했던 텍사스 오스틴 지역과 그리 멀지 않다. 말하자면 코언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기 전부터 그 지역에 매혹된 셈이고 일찌감치 촬영지 헌팅을 끝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텍사스 국경지대의 변화무쌍한 날씨, 맹독을 지닌 사막 생물들, 오직 몸으로만 느낄 수 있는 땅의 열기는 그 자체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서부의 쇠락한 기운은 그렇게 영화 속 세 주인공의 몸에 새겨진다. 어쩌면 그것은 온통 눈으로 뒤덮인, 옴짝달싹할 수 없는 <파고>의 겨울 세계와도 일맥상통한다.
영화의 황량한 풍경은 사실 원작자인 코맥 매카시의 세계와 그리 멀지 않다. 코맥 매카시의 모든 소설이 그러하듯 배경 자체가 등장인물이며 영화에서 사건만큼이나 장소도 중요하다. 끝없는 서부의 풍경은 언뜻 굉장히 아름답지만 싱싱하고 활력 넘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황폐미에 가깝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웨스턴 장르의 계보학에서 접근한다면, 과거 존 웨인이 출연한 대부분의 웨스턴영화에 등장하던 모뉴먼트 밸리의 압도적인 풍경과는 전혀 딴판이라 할 수 있다. 시기 또한 어딘가 애매한 1980년, 웨스턴의 폭력과 황폐함의 역사가 휴화산처럼 가만히 잠든 곳이다. 그곳에서 ‘노인’ 벨은 자신이 맞닥뜨린 새로운 현실에 경악하며 과거의 긍지를 향한 비탄을 드러낸다. 완전히 개방된 공간의 대낮에 시체들이 널브러진 풍경은 문명과는 거리가 먼, 거의 초현실적인 무법의 세계 같다. 많은 평자들이 웨스턴 장르의 황혼기를 대표하는 샘 페킨파의 <가르시아>(1974)를 떠올린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여기서 코언 형제가 코맥 매카시의 원작을 택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더구나 리메이크작인 <레이디킬러> 정도를 제외하면 창작 시나리오가 아닌 남의 원작 그대로를 각색한 경우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늘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시엘 해밋, 그리고 제임스 케인의 영향을 공공연히 언급했기 때문에 그들을 제쳐두고 매카시의 작품을 각색했다는 사실은 정말 의외다. 가령 제목부터 레이먼드 챈들러 원작의 <빅 슬립>(1946)을 연상시켰던 <위대한(Big) 레보스키>(1998)는 물론 챈들러는 코언 형제 영화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작가이며, 코언 형제가 영화에서 종종 보여주는 환상장면들은 말 그대로 ‘챈들러식’이다(다만 챈들러 작품은 대부분이 LA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시엘 해밋도 코언 형제가 아끼는 작가로 심지어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존 하크니스는 <밀러스 크로싱>을 두고 “대시엘 해밋의 작품 <유리 열쇠>의 흔적이 너무나 역력해서 해밋 재단이 표절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라고까지 말한 적 있다. 또한 코언 형제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조연 이름이기도 한 디드릭슨을 바로 제임스 케인 원작의 <이중 배상>(1944)의 유명한 팜므파탈의 이름에서 가져왔고, 피아노 교수 캐릭터 역시 <밀드레스 피어스>(1945)의 발성법 교수로부터 가져왔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이렇듯 제임스 케인은 코언 형제가 언제나 ‘할리우드 역사를 통틀어 제대로 영화화된 사례가 없다’며 안타까움을 표해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코언 형제가 불현듯 코맥 매카시로 끌리게 된 이유는 뭘까.
<블러드 심플>이나 <파고>와 비교할 때, 그리고 챈들러나 해밋, 케인의 그것과 비교할 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가장 다른 것은 바로 지독한 염세주의다. 그것은 코언 형제가 이전까지 보여준 운명론 혹은 냉정하면서도 따스한 낙관주의와도 배치된다. 더불어 그들의 체질적인 유머감각 또한 그들의 ‘어찌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기에 가장 정서적으로도 이질적이다. 그것은 리메이크 혹은 각색이라는 측면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가장 손쉽게 비교해볼 수 있는 <레이디킬러>를 떠올려보면 더 확실해진다. 오리지널인 알렉산더 매켄드릭 감독의 1955년작 <레이디킬러>에서 알렉 기네스가 맡았던 역할을 톰 행크스가 이어받았는데, 다소 신경질적이며 서로 엄격한 성격에다 언제나 정장 차림의 도둑들과 비교하면, 중국계와 흑인 도둑이 포함된 2004년작 <레이디킬러>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나사가 빠진 듯 능글맞거나 어벙하다. 오리지널을 코믹 터치로 변형한 감각은 역시 코언 형제의 그것이었기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레이디킬러>와 달리 원작으로부터 일체의 변형없이 완성한 것 역시 상당히 의외다. 코언 형제가 고백하듯 영화의 대사 대부분은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온 거나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특정 장면을 제외하는 고민 정도가 그들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을 거다.
코언 형제라는 영웅을 위한 나라는 있다
코맥 매카시는 2005년에 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통해 <올 더 프리티 호시즈>(1992), <크로싱>(1994), <시티즈 온 더 플레인>(1998) 등 그 유명한 ‘국경 3부작’의 배경이었던 텍사스 서부로 돌아왔다. 특히 2000년에 영화화된 <올 더 프리티 호시즈>는 <슬링 블레이드>(1996)에 이은 빌리 밥 손튼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기도 하다. 카우보이를 동경하는 소년 콜(맷 데이먼)의 여정을 그린 이 영화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마찬가지로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는 서부의 황혼을 바라보면서도 묘한 서정성을 담아냈다. 그러니까 매카시가 오래전 완성했던 국경 3부작에 비하자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무척 절망적이다. 바로 국경을 넘나드는 마약 거래가 점점 더 잔인해져가는 시대를 새로이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세상과의 갈등’이라는 매카시 특유의 테마는 그렇게 더 강화됐다. 그런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다음 저작이기도 한 2007년작 <더 로드>는 종말 이후의 참상의 세계를 그린, 그보다 더 절망적 기운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그렇게 코맥 매카시의 염세주의를 끌어안으면서 코언 형제는 좀더 원숙해졌다. 과거보다 훨씬 말을 아끼고 있지만 더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로저 에버트가 말한 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시간, 공간, 캐릭터, 도덕적 선택들, 비도덕적 확신, 그리고 인간 본성과 운명에 관한 더없이 훌륭한 환기”다. 영화 전체를 휘감고 있는 무드는 묵시록적이다. 쫓고 쫓기는 두 남자의 대결을 보면서도, 서스펜스 그 이상의 정서적 충격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무드에서 나온다. 피를 흘리며 국경을 넘으려던 모스가 마주치는 아이들의 생경한 눈빛, 그리고 부상을 입고 뼈가 드러난 채로 꼬마 아이들과 마주하게 된 쉬거의 앙상함, 그리고 맞서야 당연한 재앙에 가까운 범죄 행위를 보고서도 결국 자신이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벨의 처연함은 그 자체로 역사의 풍경과도 겹친다. 미국 서부 세계에 엄습한 종말과 법규가 효력을 잃어버린 무너져가는 세계에 맞서는 벨의 긍지는 너무나 초라하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자이자 언제나 매카시와 비슷한 배경으로 작품들을 써왔던 애니 프루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두고 “악인과 선인에 관한 전형적 플롯을 문학과 역사의 진지한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격찬한 바 있다. 더불어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벤 월터스는 쉬거를 두고 ‘미국적 남자다움으로 빚어진 캐릭터’라며 “그 미국적 남자다움의 가장 성공적인 환생이 바로 연쇄살인마일지도 모른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렇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황량한 풍경과 겹치는 역사의 무드를 끌어안으면서 어떤 속 시원한 대답이나 (코언 형제의 장기이기도 한) 독백의 내레이션을 들려주지 않는다. 더불어 이전까지 진행돼온 이야기를 풍자하거나 뒤트는 재치있는 결말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들은 그렇게 남겨지거나 죽거나 떠나가면서 세상의 시간은 그렇게 늘 그래왔던 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전처럼 넓고 광활한 공간을 다루면서도 출구없는 미로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감히 코언 형제 영화의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폐소공포증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쩌면 이 영화는 <블러드 심플>이나 <파고>가 아니라 <바톤 핑크>(1991)와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뱅상 말로자는 지난 1990년대 가장 탁월한 미국 작가들이었던 코언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데이비드 핀처가 지난해 각각 내놓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쓰 프루프> <조디악>이 모두 놀라운 점핑을 보여줬다며 미국을 향해 ‘영웅을 위한 나라는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중 가장 앞자리에 있는 것이 코언 형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언 형제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소름 끼치는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증명해준다.
철저하게 영화적인 소설가
‘서부의 셰익스피어’ 코맥 매카시
지난해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쇼에서 코맥 매카시의 가장 최근작인 <더 로드>를 TV 북클럽 도서로 선정했다. <오프라 윈프리 쇼>의 북클럽 영향력이야 따로 말할 것도 없는 만큼, 국내에는 다소 생소한 그의 인기는 미국에서 무척이나 대중적이다. 1933년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서 태어난 그는 시카고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며 <과수원지기>(1965)를 썼고 그해 포크너상을 수상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후 전업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1976년 텍사스주 엘패소로 이주한 뒤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썼다. 이른바 ‘국경 3부작’이라 불리는 <올 더 프리티 호시즈>(1992), <크로싱>(1994), <시티즈 오브 플레인>(1998)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서부를 무대로 한 장르소설을 좀더 한 차원 높은 고급 문학으로 승격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2005년 발표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처럼 스피디한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묘사로 스릴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살롱닷컴>의 아이라 보드웨이는 출간 당시 북리뷰를 통해 이미 “코맥 매카시는 철저하게 영화적인 소설가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적이다. 이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은 작가로서 가장 손쉽게 버는 돈이 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의 예언대로 손쉽게 돈 번 사람이 바로 코언 형제다. 실제로 그들은 “영화화 과정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에단이 키보드를 두들기는 동안, 내가 책을 들고만 있으면 됐다”고까지 말했을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코언 형제의 독창성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해 가을, 극도로 언론을 기피하는 것으로 알려진 코맥 매카시와 코언 형제의 대담이 <타임>에 실렸다는 점이다. 당시 매카시는 영화에 대해 상당한 만족감을 드러냈으며, 모스를 향해 개가 달려드는 장면의 공포에 대해서는 원작자이면서도 큰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주로 미국영화만을 즐겨 본다는 그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테렌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1978)을 꼽았으며, 코언 형제의 영화 중에서는 <밀러스 크로싱>을 가장 좋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