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야마시타 노부히로] 21세기 일본영화의 희망
2008-03-18
글 : 정재혁

일본의 영화잡지 <키네마준보>는 2007년 일본영화 베스트10을 뽑으며 2위와 7위에 각각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과 <마츠가네 난사사건>을 올렸다. 베스트10 안에 한 감독의 영화가 2편이나 들어간 셈이다. 영화평론가 오카타 빈로우는 “2007년은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해였다”고 말했고, 모리 나오토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으로 야마시타 감독은 자신의 세계를 갱신했다”고 표현했다. 재능있는 감독이 고갈되다시피한 최근의 일본 영화계가 다소 과하게 들떠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실제로 2007년 야마시타 감독이 내놓은 두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야마시타 영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덜떨어진 남자 3부작’이라 불리는 <우울한 생활> <바보의 하코선> <리얼리즘 숙소>를 총정리하듯 완성한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그가 가진 블랙코미디와 리듬을 정갈하게 살렸으며, <크림레몬> <린다 린다 린다>에 이어 여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만든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이전에 없었던 성숙한 품을 보여준다. 2001년에 첫 장편을 만들며 일본 영화계에 데뷔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지금 일본 영화계는 그가 열어젖힌 21세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있다.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영화는 항상 시골에 있다. <리얼리즘 숙소>는 주인공이 오오모리현의 스산한 동네 아지카사와로 여행을 떠나며 시작하고, <린다 린다 린다>는 군마현 다카사키시의 작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3월13일 국내에서 개봉하는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멧돼지 전설의 고장 마츠가네가 극중 설정으로, 실제 촬영은 나가노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했다. 장편 데뷔작인 <우울한 생활>(2001)부터 최근작인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2007)까지 그의 장편 7편은 모두 시골에서 출발하거나 시골로 여행을 떠나는 영화다.

<리얼리즘 숙소>
<마츠가네 난사사건>

국내에선 <후나기를 기다리며>로 알려진 영화 <리얼리즘 숙소>는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영화감독과 각본가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이 둘은 원래 후나기와 여행을 하기로 했지만 후나기는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휴대폰으로만 들려오는 후나기의 목소리. 영화는 이후 정처없이 늘어지는 온천마을을 둘의 느린 걸음으로 쫓아간다. 이 여정은 나타나지 않은 후나기를 찾아 떠도는 길이기도 한데, 여기서 영화는 도시에선 보이지 않는 시골의 잔잔하지만 독특한 일상을 보여준다. 3이 되지 못한 2가 3을 찾아 떠나는 길. 야마시타 감독의 영화는 항상 나타나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 인식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영화가 시골을 무대로 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어려서부터 전학을 많이 다닌 야마시타 감독은 “전학생의 눈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주위의 것들이 보인다”고 말했다. 도쿄의 익숙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시골의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하는 야마시타의 여행. 그는 그 위에서 사랑과 우정과 청춘과 사회의 모든 걸 새롭게 발견한다.

20대에 그려낸 야마시타표 ‘일본의 청춘들’

1976년생으로 올해 31살인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오사카예술대학 영상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생 시절 사놓고도 쓰지 않는 아버지의 비디오카메라를 꺼내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비디오가게에서 짐 자무시의 영화, 로버트 드 니로, 잭 니콜슨 등이 출연한 할리우드영화를 한꺼번에 빌려 몰아서 봤다. 1995년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선배인 구마기리 가즈요시 감독의 <귀축대연회>에 스탭으로 참여했고, 그 뒤엔 또 다른 선배인 야마모토 히로시, 우지다 다카시 등과 함께 단편을 찍었다. 폭력의 단상을 강하게 압축해 담은 <부패한 여자>, 그만의 유머가 처음으로 드러난 <단면> 등은 대학생 시절 야마시타 감독이 하숙집 방에 틀어박혀 동료들과 함께 완성해낸 작품들이다. 야마시타 감독은 당시의 기억을 “영화 보고, 영화 찍고, 자위하는 날들의 연속”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는 여기서 둘도 없는 콤비 무카이 고스케를 만났다. 그의 대학 졸업작품이자 장편 데뷔작인 <우울한 생활>은 불법 비디오로 생계를 이어가는 무직 청년의 이야기. 이 영화는 무카이 고스케와 야마시타 노부히로가 함께 각본을 쓰고, 야마시타 감독이 연출을, 무카이 고스케가 촬영을 맡은 작품으로 이후 무카이와 야마시타는 <바보의 하코선> <리얼리즘 숙소>로 이어지는 ‘덜떨어진 남자 3부작’을 완성한다. 세편의 영화는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 <우울한 생활>은 2000년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다른 두편의 영화도 미니 시어터, 레이트 쇼에서 작지만 의미있는 흥행을 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온천마을을 헤매는 두 남자(<리얼리즘 숙소>)나, 팔지 못한 녹즙을 팔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커플(<바보의 하코선>), 이상한 머리모양을 하고 엉뚱한 행동을 일삼는 청춘(<우울한 생활>) 등 일상의 평범한 젊은이들과는 달리 어딘가 비어 있는 이들은 무카이 고스케(각본)와 야마시타 노부히로(연출)가 함께 그려낸 20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2007년 야마시타 감독이 20대을 보내며 만든 영화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야마시타의 20대를 정리하는 작품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마을 ‘멧돼지 전설의 고장 마츠가네’를 무대로 설정한 이 영화는 자막으로 ‘90년대 초가 배경이며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힌다. 90년대 초반이라면 야마시타 감독이 대학 시절을 시작했을 무렵이니 이 영화의 시작은 곧 야마시타 감독의 20대의 시작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질척하고 어둡다. 하얗게 눈으로 덮인 호수 위에 한 여자가 사고로 쓰러져 있고, 마을의 꼬마는 여자에게 다가가 음부를 만진다. 멧돼지 전설의 고장이란 기괴한 간판처럼 마을의 모든 관계는 어둡고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남자들은 자신의 성기를 어디든 넣으려 하고, 동네의 유일한 아가씨 하루코는 아빠가 누군지 모를 아이를 갖는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던 90년대 초반, 깊은 산속의 어느 시골 마츠가네엔 도쿄의 절망과는 다른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불경기라 해도 대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던 야마시타 감독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불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도쿄 한복판에서도 볼 수 없는 세상의 불안은 가상의 멧돼지 마을에서 감지된다.

<바보의 하코선>
<우울한 생활>

<우울한 생활> <바보의 하코선> <리얼리즘 숙소>. 세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리얼리즘 숙소>는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영화의 내용은 만화와 많이 다르다), 자주영화 형태로 완성한 ‘덜떨어진 남자 3부작’을 마친 뒤 2004년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영화사의 제안으로 <크림레몬>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소재나 분위기가 이전의 야마시타 영화와 많이 다른데 야마시타 감독은 “피가 연결되지 않은 오빠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다시 한번 영화사의 기획으로 <린다 린다 린다>를 만들었다. 여고생들이 록밴드 블루하츠의 카피 밴드를 만들어 문화제 공연을 마치는 이야기인 이 영화는 소녀들의 우정과 고민이 파스텔톤으로 그려진다. 야마시타의 영화는 주인공이 여자냐 남자냐에 따라 분위기가 180도 바뀐다. 남자의 계절이 겨울이라면 여자의 계절은 여름이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방황하는 남자들과 달리 소녀들은 따뜻한 햇빛을 맞으며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간다. 여자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야마시타 감독은 완전한 수용체가 되어 여자들의 세계를 담아낸다. <린다 린다 린다>에서 네 소녀가 옥상에서 수다를 떠는 롱테이크도 거듭되는 리허설 끝에 나온 실제 상황에 가깝다. 야마시타 감독은 <린다 린다 린다>에서 일종의 “다큐멘터리스트가 된 듯 여학생들의 연기를 그냥 지켜봤다”.

일본 영화계가 주목하는 야마시타의 30대 여행기

2007년 야마시타 감독이 <마츠가네 난사사건>으로 자신의 20대를 정리한 뒤 완성한 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크림레몬>과 <린다 린다 린다>의 결과물이 축적된 완성판이다. 순정만화의 대가 구라모치 히사코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전교생이 6명밖에 없는 시골 학교에 도쿄에서 한 남학생이 전학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구라모치의 팬으로 알려진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의 각본)가 원작을 충실히 살려 각본을 썼는데, 이 영화는 지금까지 야마시타 감독이 만든 작품 중 가장 따뜻하고 귀여우며 아름답다. 특히 <우울한 생활> 때부터 자주 써왔던 롱숏과 롱테이크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에서 훌륭하게 완성된다. 사라져가는 학교, 기억에서 잊혀질 공간, 잊고 있었던 시간에 대한 아름다운 관찰이 아픈 겨울을 지나 새로 다가오는 봄을 성숙한 자세로 맞는다.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졸업하는 여주인공 소요(카호)는 칠판에 작별의 키스를 하는데 이후 카메라는 오른쪽에서 왼쪽 창가로 이동한다. 한 테이크에 계절의 변화가 담기고 사춘기의 잔혹함, 시골이란 공간의 폐쇄성, 어른들의 복잡한 관계 등 세상의 모두 아픔이 녹아든다. 야마시타 감독은 “그동안 계속 청춘영화만 만들었던 것 같다. 계속 질문만 던졌던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는데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에서는 드디어 답을 찾으려 한다.

‘덜떨어진 남자 3부작’이 일본에서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영화가 가진 독특한 리듬 때문이었다. 대화 사이에 이어지는 어색한 순간,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평평하게 진행되는 사건.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아닌 평범함 속에서 나오는 미묘한 흐름을 잡아낸다. 기승전결이 사라진 드라마는 균형이 틀어진 박자를 타고 진행된다. 그리고 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상을 잡기에 적절한 표현이 된다. <우울한 생활>에서 주인공이 이상한 머리를 한 남자와 아침 일찍 파친코 앞에서 만났을 때, 캔커피를 마시며 ‘학생이냐’고 묻는 남자의 대사는 기묘하게 울린다. 일본에선 야마시타 감독의 롱테이크와 롱숏, 어색한 대화와 정적의 순간 등을 ‘야마시타 부시(節)’란 말로 쉽게 정리하는데 사실 이는 <린다 린다 린다> 이전까지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짐 자무시의 리듬을 흉내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사의 제안으로 찍은 세편의 영화 이후, 자신이 잘 모르는 여자들의 세계를 지나온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성장했다.

<린다 린다 린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에는 잊혀지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도쿄에서 전학온 오오사와(오카다 마사키)와 학교의 전교생이 바다로 소풍을 가는 장면.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린 길에서 오오사와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오른쪽 길로 가겠다고 한다. 가보지 않았던 길, 존재하지만 의식하지 않았던 곳.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영화 전체가 오른쪽 길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작은 산골 마을에 도쿄의 시간과 공간이 개입되고, 드러나지 않았던 마을의 사건과 갈등은 모습을 드러낸다. 시골로 여행을 떠나며 세상을 관찰했던 야마시타 감독은 시골에 도시를 데려와 세상의 비밀을 캐낸다. 도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소요는 아버지의 몰랐던 비밀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야마시타의 시골은 그 비밀을 넓게 안을 품을 지녔다. 가족과 마찬가지인 6명의 전교생이 다시 학교 운동장에 모여 활짝 웃음 짓는 영화의 엔딩. 방황의 여행을 마치고 따뜻한 집에 도착한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이제 어디로 향할까.

“당신은 언제나 나의 주연배우”

야마시타 영화의 단골배우, 야마모토 히로시

야마모토 히로시 (가운데)

앞으로 튀어나온 턱, 그 턱을 덮은 짙은 수염. 한번만 봐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배우 야마모토 히로시는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페르소나 같은 인물이다. “외모가 조형적으로 웃기게 생겼다”는 야마시타 감독의 표현처럼 작은 체구, 매마른 몸의 야마모토 히로시는 표정과 몸동작, 걸음걸이가 서로 일치하며 코믹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우울한 생활> <바보의 하코선> <리얼리즘 숙소> 등 덜떨어진 남자 3부작을 비롯해 <크림레몬>에서도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린다 린다 린다>에선 스튜디오 주인으로 잠시 얼굴을 비췄다. 개성 만점의 외모와 인상 깊은 연기 덕에 야마모토는 일본의 다른 유명한 감독들도 선호하는 배우.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 네기시 기치타로 감독의 <눈에게 바라는 것>, 히라야마 히데유키 감독의 <샤베레도모 샤베레도모> 등에서도 작지만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다. <린다 린다 린다>에서 함께 출연했던 배두나도 야마모토 히로시의 팬이다. 야마시타 감독의 말에 의하면 <리얼리즘 숙소>를 보고 야마모토를 좋아하게 된 배두나는 그의 실제 모습을 보고 “아, 물건이다”라며 사인을 받아갔다. 야마모토 역시 배두나에게 “아, 물건이다”란 말을 남겼다고. 야마모토 히로시는 야마시타 감독보다 두살 연상으로, 오사카예능대학 선배. 고등학교 시절부터 8mm SF영화 등을 찍기 시작했으나, 연기를 시작한 뒤에는 조명, 각본을 겸하고 있다. 오락프로그램 <헤이헤이헤이> 등에 나와서는 목청 찢어지는 소리로 노래를 불러대는 기막힌 코미디언이다. 야마모토에 대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애정은 무궁무진해서 야마시타 감독은 “야마모토는 항상 나의 주연배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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