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3주… 그리고 2일>과 <주노>는 동시대에 도착한 영화지만, 동시대로부터 날아온 편지는 아니다. <4개월…>의 시대적 배경이 1987년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라면, <주노>의 배경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현재의 미국이다. 결혼하지 않은 어린 여자에게 어느 날 닥친 임신과 이에 대처하는 방식 혹은 태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둘은 유사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영화다. 우연하게도 두 영화를 연달아 본 뒤 동일한 소재를 두고 고통과 유쾌함을 분열적으로 오갔다. 그 감정의 간극은 잊혀지지 않으면서 사람을 무척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결론은 <4개월…>과 <주노>는 함께 읽어야 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시대적, 문화적 차이로 두 영화의 차이를 설명하는 건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더욱이 <4개월…>은 1987년 루마니아 독재정권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세상의 어느 불행아들과 세상의 어느 행운아들의 이야기로 분리해서 생각하기에는 중요한 무언가를 못 본 척하고 지나치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러면서 위와 유사한 소재를 취하는 한국의 몇몇 독립단편들을 볼 때마다 언젠가 한번쯤은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단상들도 떠올랐다. 물론 낙태 찬반논쟁을 하려는 것도, 태아의 어느 시점을 생명체로 볼 것인지를 논하려는 것도, 어느 영화가 더 윤리적이며, 더 좋은 영화인지를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의 관심사는 위의 간극을 어떻게 읽어내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있다.
사회적 리얼리즘 VS 하이틴 성장멜로
<4개월…>은 4개월 3주의 무지와 망설임의 시간을 전제로 두고 그 시간을 해결하는 이틀을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다. 어떻게 임신을 하게 되었으며, 임신 사실을 안 순간 어떤 갈등을 했는지, 다시 말해, 임신한 여자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영화는 낙태 수술이 성사되기까지의 준비과정과 모욕의 순간을 거쳐 수술장면에 이르고, 마침내 죽은 채 세상에 꺼내진 태아를 처리하는 순간에서 멈춘다.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없는 무거운 상황은 툭툭 인물들 앞에 던져지고 그녀들은 매 순간 그걸 처리해야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사자 가비타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오틸리아는 불법 안에 있다. 1968년부터 차우셰스쿠는 출산 장려의 일환으로 피임과 낙태를 금지했다. 단지 가난한 두 여자에게서 시작되고 끝나는 개인적인 비극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영화는 당대 루마니아의 사회적 분위기를 소환하며, 여기에 이 비극의 필연성을 둔다. 말하자면 <4개월…>은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다. 반면 <주노>는 어느 가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열여섯살 소녀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하이틴 성장멜로다. 의자에서 시작된 기억을 더듬으며 소녀의 임신은 꽤 로맨틱하게 설명된 뒤, 주노가 약간의 고민과 망설임 끝에 낙태 대신 출산을 선택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가을에서 시작된 소녀의 모험은 다음해 여름에 끝나는데, 영화는 점점 불러오는 소녀의 배와 함께 조금씩 성숙해지는 소녀의 내면을 따라간다. 소녀는 오틸리아나 가비타와 달리 자신의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이를 입양할 양부모를 물색하고 더없이 이상적으로 보이는 커플과 합법적인 입양을 약속한다. 주노의 부모는 딸의 임신 고백을 듣고 “차라리 퇴학이나 마약, 음주운전이길 바랐는데…”라고 속내를 드러내지만, 주노는 어찌되었건 합법 안에 있다.
많은 이들이 <주노>의 건강함에 찬사를 보낼 때, 여기에는 사실, <4개월…>이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쾌락 뒤의 악몽, 즉 섹스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하는 것 같다. 때때로 ‘고생스러운 인형놀이’로 부르고 싶은 <주노>는 결국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결말로 보는 이에게 안도감을 준다. 이를테면 <주노>는 계획된 섹스와 무계획된 임신에 당면한 소녀가 끝까지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포기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사랑을 배우는 이야기다. 하지만 <4개월…>은 욕망의 찌꺼기를 뒤집어쓰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여자의 이야기다. 가비타는 ‘내가 즐겼으니, 내가 홀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영화의 끔찍한 핵심이다. 홀로 책임질 일만은 아님에도 기어이 홀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마는 것. 사람들은 주노가 건강하고 낙관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사실에 환호하는데, 그녀는 결코 ‘홀로’ 책임을 떠안지 않았다. 딸의 고백을 듣자마자 딸의 영양상태와 법적절차, 병원 등을 알아보는 부모가 있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지만, 끝까지 주노 곁에 따뜻한 남자로 남는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가 있고, 아이를 믿고 입양시킬 양부모가 있고, 심지어 상담받을 수 있는 ‘woman now’라는 여성센터도 있다. 주노는 적당히 보수적이고 적당히 리버럴한 중산층 부모와 입양을 원하는 여피 커플 덕에 임신 뒤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외부의 공격들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여유를 갖는다. 주노에게 임신은 낡은 여관방에 숨어서 비밀리에 처리해야만 하는 삶의 얼룩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기회다. 덕분에 임신한 소녀의 건강한 성장기에는 젠더와 경제가 교차하는 위태로운 상황이 침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4개월…>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가비타를 대신해 이해의 한도를 넘어서는 희생을 감내하는 오틸리아의 모습은 단순히 여성의 연대 혹은 가비타의 일이 오틸리아에게도 불현듯 닥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영화가 가비타보다 오틸리아를 중심에 두는 이유는 그녀가 가족, 남자친구, 나아가 사회가 당연히 공유해야 할 몫을 홀로 떠안은 자의 희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폭력적이고 무관심한 사회를 환기하고 있다. 낙태의 장소는 강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만큼 일방적인 매춘의 장소가 된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삶을 놓지 않는 주인공들
임신과 낙태의 문제는 임신과 낙태의 여부보다 그것을 결국 어떻게 삶 안에서 받아들일 것인지와 관련된 문제다. 십대의 임신과 낙태에 대한 많은 한국 단편들이 나쁜 의미에서 놀라웠던 건 이들이 삶의 가혹함에 대한 극적인 형상화로서만 그 소재를 취하고 버려두는 데 너무나 무심하다는 점이었다.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임신한 당사자가 무엇을 결정하는지만큼 중요한 건 그 결정 이후의 삶을 어떻게 끌어안을까에 대한 갈등과 오랜 성찰이다. 주노가 낙태를 선택하지 않겠다고 하는 시점은 태아에게 손톱이 자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지만, 영화는 그걸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흘려듣는 것처럼 넘어간다. 이 영화에 건강함이 있다면 그건 이러한 생명존중사상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변한 상황에서도 삶을 놓지 않는 소녀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러나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주노의 가족들과 오틸리아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노>의 가족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해도 주노가 그 과정을 온전히 거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조력자들이다. <4개월…>의 오틸리아는 영화가 벌여놓은 임신과 낙태에 관한 충격적인 이미지, 행동, 형상을 소모하거나 버리지 않고 어찌되었든 끝까지 끌어안고 마무리하는 자다. 그녀는 이 영화에 가해질 일련의 오해나 비판들을 홀로 방어하는, 영화적으로 필요한 인물이다. 어두운 골목을 헤매는 그녀의 지난한 롱테이크는 그렇게 보인다.
<주노>가 낙태나 자기파괴 이외에도 다양한 선택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 영화라면, <4개월…>은 선택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영화다. 그걸 가르는 건 경제적, 사회적 여건인데, 그렇기 때문에 <4개월…>에서 오틸리아와 가비타의 선택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을뿐더러 윤리적인 재단을 애초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태아를 죽이지 않고서는, 낙태 시술자에게 돈 대신 몸을 팔지 않고서는, 죽은 태아를 버리지 않고서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지옥 같은 상황의 연속. 이들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설득당한다. 여기서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두 여인이 아니라 그녀들을 그런 상황으로 내몬 당대 루마니아 사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가 후반부로 치달을 무렵, 감독은 당연하다는 듯 관객으로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결단을 내린다. 오틸리아가 호텔로 돌아오자, 가비타는 자신의 몸에서 죽은 태아가 나왔고 화장실 바닥에 있다고 알려준다. 오틸리아는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바닥을 본다. 깊은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죽은 태아를 담을 비닐봉지를 가지러 자리를 뜬 순간, 카메라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고 화장실 바닥으로 시선을 가져가고 만다. 거기에 널브러진 뭉클하고 두려운 핏덩이.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오틸리아와 가비타가 낙태 시술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넣지 않았듯, 죽은 태아의 노골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삽입했다고 밝혔다. 그 장면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것이 꼭 필요한 선택이었는지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실재적 대상에 대한 성찰과 실재적 대상에 대한 유혹적인 호기심 사이에서 영화는 좀더 신중히 머뭇거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이 시점까지 굳게 밀고 나갔던 선택의 불가능성에 대해 돌이켜 묻게 만든다는 점이다. 과연, 진정 모든 상황은 달리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감히 물어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질문이다.
<4개월…>은 20년 같은 이틀을 지나, <주노>는 가을, 겨울, 봄을 지나 터널 밖으로 나온다. 두 영화가 이야기를 맺는 각각의 지점은 인상적이다. <주노>는 무사히 출산을 하고 아이를 입양시킨 뒤 집으로 돌아온다. 따스한 햇살 아래 자전거를 타고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와 만난 주노는 그와의 변함없는 사랑을 과시하며 기타를 튕긴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부르는 사랑 노래로 영화는 끝난다. 영원한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거냐고 묻던, 알고 보면 순진한 소녀 주노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최선의 낭만적인 엔딩이다. 주노는 구김살없이 다시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4개월…>의 두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한명은 몸에서 태아를 제거하고 한명은 죽은 태아를 쓰레기통에 버리고서 호텔의 식당 한편에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접시 위에는 고기와 찐 간요리가 놓여 있다. 생존의 기막힌 비루함.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건 그 말뿐이다. 동일한 운명을 나눈 두 여자는 다시 살기 위해 먹을 것이다. 이틀의 기억은 그녀들 사이에서 다시는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창백하고 무표정한 두 여자의 얼굴에서 우리가 보는 건, 새 출발 따위가 아니라 시시각각 고통으로 출몰할, 애도되지 못한 기억들의 귀환과 그럼에도 쉽게 버릴 수 없는 삶이라는 굴레다.
소녀의 임신과 낙태를 무책임하게 다룬 한국 단편영화
<주노>는 끝까지 낙관적이다. <4개월…>의 결말은 그보다 훨씬 힘들지만 그걸 비관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두 영화의 엔딩을 보면서 문득 지난해 보았던 두편의 한국 단편이 떠올랐다. 양해훈의 <친애하는 로제타>와 안세훈의 <사과>다.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근래 한국의 단편들은 극적인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다. 문제는 이들이 정작 말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게으르면서도 극적효과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서 소재주의의 혐의에 걸려든다는 점인데, 십대의 임신과 낙태의 이슈도 그중 하나다. 두 영화는 비교적 그런 문제를 의식하고 있지만, 지금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건, 태도의 올바름 같은 것이 아니라, 이들의 결말에 스며든 어떤 비관적인 무력감에 대한 것이다. 이는 <주노>나 <4개월…>의 엔딩과는 또 다른, 어쩌면 더 불행하고 더 나빠진 결말이다. <친애하는 로제타>는 한 소녀와 그녀를 잡으려고 쫓아가는 아버지의 추격전을 핸드헬드로 따라가는 영화인데, 딸을 쫓던 아버지가 물에 빠지자 딸은 고민 끝에 아버지를 구하기로 한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건너뛰어, 이 추격전의 이유를 보여준다. 소녀는 홀로 낙태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 위에 올라가 있다. 이때 갑자기 악몽처럼 그녀의 몸 위에서 헐떡이는 사내들이 차례로 클로즈업되며 환영처럼 지나가는데, 그들 중에 소녀를 쫓아오던 아버지의 얼굴도 있다. 그녀의 과거를 암시하는 건지 어린 소녀의 낙태와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다. 의도가 어떠하든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차가운 수술대 위에 무기력하게 누운 소녀의 몸을 또다시 대상화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걸리는 건, 결국 ‘아버지’라는 악몽 속에서 수술대 위에 그대로 버려진 것 같은 소녀의 몸, 거기서 끝나도 된다고 생각하는, 혹은 끝내야겠다고 결심하는 영화의 마지막 지점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미래도 없다. 끝끝내 끊어버릴 수 없는 아버지(들)의 유령만이 가득하다. 유혹의 사과를 따먹는 이미지로 시작된 <사과>는 두 여고생이 낙태 수술을 앞두고 하룻밤 동안 어두운 골목길을 배회하는 모습을 마치 꿈처럼 찍은 영화다. 새벽이 다가오고 무언가에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가는데, 영화의 후반, 한 소녀가 뒤를 돌아보니 다른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부터 영화에는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사라진 소녀가 지상을 떠도는 애도되지 못한 영혼이었는지, 결단을 앞둔 소녀의 또 다른 불안정한 자아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화는 새벽녘 어딘가로 향하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길 위에서 끝난다. 하지만 미결된 소녀의 운명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흑백화면의 세계에 갇힌 소녀는 어딘가로 향한다기보다 어딘가로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한 소녀(친애하는 로제타>)는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부서지는 몸과 싸우고, 다른 소녀(<사과>)는 시작도 끝도 없이 몽롱하게 이어진 길 위를 부유하고 있다. 아무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주노>에는 가족들이 있었고 <4개월…>에서는 모든 걸 함께 짊어진 친구가 있었지만, 여기서 둘은 철저히 홀로 남겨진다. 소녀들의 가혹한 현실은 더이상 나아가길 거부당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거나 멈춰 있다. 이들은 과연 다시 삶 속으로 성큼 들어가 그 질긴 운명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불길한 무력감의 엄습. 소녀들은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