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노>는 좋은 영화다. 좋은 연출, 좋은 각본, 좋은 배우들이 모여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작은 제작비를 써서 적은 수의 스크린에 걸었다가 점점 세를 넓혀나가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예쁘다, 귀엽다, 쿨하다, 정말 이럴 수가 없다 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고 이 영화를 더없이 사랑스럽고 어여쁘게 여기는데 나는 홀로 간 영화관에서 홀로 울었다. 별로 잘살지도 않는 집 십대 여자애가 임신을 해서 지우려다가 안 지우고 뱃속에서 잘 키워서 낳자마자 남 주는 이야기가 우울해서 운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는 미모와 돈과 능력을 다 가졌는데 단 하나 생식력만 가지지 못한 여자가 그 여자애가 낳을 아이를 받아 기어코 키우고 싶어서 애절하게 안달하는 이야기가 딱해서 운 것도 아니고 왜 울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손님 몇 없는 극장에는 12세 관람가라지만 좋게 봐줘도 평균연령대 32살의 관객이 드문드문 앉아 O.S.T 리듬에 맞춰 간혹 극장 좌석을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두드리면서 이 소녀가 흐뭇해 죽겠다는 얼굴로 보고 있는 와중에 누가 지르는 소리나 쿵쿵 울리는 효과음이나 요란한 음악 하나 안 나오는 이 영화가 상영되는 이 조용한 극장에서 울고 있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무척 애써야 했다. 모두가 이토록 어여삐 여기는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왜 운단 말인가. 뭐가, 뭐가, 뭐가 불만이라서.
어쩌면 나는 주인공 주노가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에 마음속 깊숙이 처박아놓은 여자아이가 감응하는 것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귀엽고 발랄하고 태어날 때부터 타인에게 사랑받는 방법이 탑재된 소녀가 못 되는,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고 귀엽지 않은 소녀들 중에서도 유독 성격이 별난 아이들은 자연히 그 성격 덕에 남이 안 치는 다양한 사고를 친다. 그러던 와중에 제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맞닥뜨렸을 때 대체로 그녀들은 ‘거리’를 사용하여 자신을 방어한다. 그것만이 그녀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주노>가 그토록 찬양받고 칭찬받고 예쁨받는 쿨한 태도가 될 것이다. 얼핏 보면 꼭 남 일 대하듯 담담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그들은 고통이나 슬픔과 자신의 사이에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확보해줄 해자를 판다. 그것만이 그들이 미약한 힘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으로 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다. <제니, 주노>는 아기를 무슨 자판기에서 뽑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이 과정을 촌스럽게 그리지만 <주노>에서 주노는 스스로를 엄마라기보다는 아예 아기 낳는 자판기만큼이나 쿨하게 다룬다. 이 영화가 주는 낯설며 그래서 더욱 신선해 보이는 충격의 상당 부분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절대가치로 여겨지는 ‘모성’의 신화와 주노는 별 관계가 없다. 주노가 뱃속의 아기와 그런 종류의 모성적 정서로 밀착되어 있는 것 같은 광경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지금이라도 드리고 싶지만 좀더 귀엽게 키워서 드리겠다’거나 망설이는 바네사에게 ‘학교에서는 아무나 다 주물럭대는데 뭐 어떠냐’는 일련의 대사들로 자신의 정체성이 엄마보다는 십대 소녀임을 명확히 한다. 내가 울었던 이유는 아마도 괜한 염려였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쿨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그냥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주 좋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원래 애들이 별난 짓을 하는 이야기를 어른들은 꽤 좋아하곤 하는데, 그러면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고 아이들과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에 젊어진 기분이 들어 참 좋기 때문이다. 결국엔 주정부만 좋은 짓 했구나 싶다. 인구폭발로 지구가 상해가고 있는 것과 출생률 저하로 장차 국력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근심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뇌구조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한창 세포가 젊고 신선할 때 새로운 국민을 생산해서 고급 인력으로 키워낼 수 있도록 백인 상류층에게 인계할 뿐 아니라 출산 직전까지 자택에서 먹고살고 각종 병원비는 양부모가 부담함으로써 정부는 한푼의 비용도 쓰지 않았으니 국가로서는 남는 장사다. 나는 다만 촌스러워 보이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시대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마주친 예쁘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고 성격도 좀 별난 소녀가 고통과 자신 사이에 해자를 설치하면서 꿋꿋이 삐딱한 농담을 하는 이야기를 마냥 희망의 증거라고 보기에는 마음이 아파서, 그냥 좀 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