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빌리 엘리어트>에서 8년 뒤, <할람 포>의 배우 제이미 벨
2008-05-06
글 : 최하나

<빌리 엘리어트>와 닮은꼴의 유년기

제이미 벨의 유년기는 <빌리 엘리어트>와 묘하게도 닮은꼴이었다. 벨의 어머니는 열여섯의 나이에 그를 임신했고,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녀를 떠났다. “60년대에 발전이 정지되어버린 듯한” 영국의 변두리 시골 마을에서 홀어머니의 손에 자라난 벨은 빌리처럼 허기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소년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춤에 매혹된 집안이었다. 댄서 출신의 할머니, 이모, 어머니를 둔 벨은 동네 소녀들의 춤 수업을 흘끗거리며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큰 소리를 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까봐 토슈즈를 바지 속에 숨긴 채 발레를 배우러 다녔다. 그리고 1999년, 2000 대 1의 경쟁을 제치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낙점을 받은 소년은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 감히 상상치도 못했을 압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러셀 크로와 톰 행크스를 제치고 BAFTA(영국 아카데미: 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감격도 맛보았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는 뒷모습에서 훌쩍 세월을 건너뛰어 곧장 무대 위의 백조로 날아오르는 빌리 엘리어트와는 달리, 벨은 만만찮은 현실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빌리 엘리어트>

플래시 세례에서 벗어나 다시 찾은 고향은 스타가 된 소년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졸업을 위해 돌아간 학교에서는 또래에게 매일같이 “발레리나 보이, 투투 한번 입어봐”라는 놀림을 받으며 상습적인 괴롭힘에 시달렸다.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자란 소년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을 자신의 아버지로 “입양”한 뒤 한동안 감독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일종의 유사 부자관계를 맺었으나, 머지않아 타블로이드의 먹잇감이 됐다. 소아성애를 노골적으로 시사하는 악의적인 추측 기사들이 난무했고, “아역배우의 추락”풍의 전형적인 헤드라인이 소년을 혹독하게 사냥했다. 벨은 2년 동안 영화와는 연을 맺지 않은 채 묵묵히 학교를 다니며 진학 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데스워치>와 <니콜라스 니클비>로 조용하게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만약 <빌리 엘리어트> 다음 작품으로 다시 한번 아이를 연기하면, 결국은 계속 그런 역할로만 출연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18살쯤에는 완전히 소멸해버릴거라고.” 제1차 세계대전을 무대로 한 <데스워치>에서 벨은 피와 진흙을 뒤집어쓴 채 비명을 지르는 젊은 병사를, 찰스 디킨스 원작의 시대극 <니콜라스 니클비>에서는 학대당하는 절름발이를 연기했다. 폭발적인 성공은 뒤따르지 않았지만, “빌리 엘리어트의 이미지를 깨부수고 싶어”했던 열여섯의 벨에게는 흥행성적과 바꿀 수 없는 값진 도전이었다. 불과 2년 만에 우유 냄새를 떨쳐낸 벨은 또박또박 고집스레 나아갔다. “대접을 받건 말건 간에 상관없이.”

열정적 프로젝트에서 더욱 빛을 발하다

정확히 10편의 필모그래피. <빌리 엘리어트> 이후 벨이 그려온 궤적은 흥미로운 동시에 영리하다. <디어 웬디> <춤스크러버>에서 <킹콩> <점퍼>까지, 인디와 메이저를 고른 리듬으로 교차해온 그는 자신의 출연작을 이른바 “열정적 프로젝트”와 “상업적 프로젝트”로 가름하곤 한다. 그의 심장은 인디영화를 향하지만, <빌리 엘리어트>의 그림자 속에서 고투하며 쇼 비즈니스 세계의 생존법칙을 온몸으로 학습해온 벨은 “큰 감독의 이름을 필모에 넣어두는 것이 이력서에 보탬이 되는 선택”임을 굳이 감추려들지 않는다. <킹콩>에서 ‘해골섬’에 오르는 선원 중 한명으로 등장해 피터 잭슨과 인연을 맺었고,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포격을 황홀한 듯 바라보는 철없는 병사를 연기하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한자리에 서는, 많은 젊은 배우들이 맹렬하게 질투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벨은 입바른 예우로 격식을 차리기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만큼 솔직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거장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엄청났지만, 그는 이런 식의 태도를 갖고 있다. ‘자, 내가 너에게 역할을 줬으니, 주어진 대사를 읽고 집에 돌아가면 돼.’ 그건 배우로서 충만감이 떨어지는 일이다.” “블루 스크린 앞에서 거대한 원숭이에게 쫓기는 시늉을 하는 건 재미없다. 하지만 <킹콩>은 내 이름을 피터 잭슨과 연결시켜줬다. 사람들이 ‘오, 당신은 피터 잭슨과 일했군요!’ ‘오, 당신의 출연작이 2억달러를 넘게 벌어들였군요!’라고 말하는 거지. 그건 우스꽝스럽고 천박하지만, 이 세계의 많은 이들에겐 중요한 게 사실이니까.”

<킹콩>
<아버지의 깃발>

벨의 필모그래피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누구나 아는 영화인데 정작 그의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는 대작들이 아니다. 양 방향의 작품들이 엮은 태피스트리 중 실질적인 무늬를 그려내는 씨실은 “열정적 프로젝트”다. <할람 포>의 시나리오 첫 페이지에는 이런 지문이 등장한다. “할람은 스웨터를 벗고, 립스틱으로 젖꼭지 둘레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대다수의 배우들이 바로 시나리오를 덮고 뒤돌아설 바로 그 장면이 벨이 <할람 포>를 선택한 이유였다. 할람에 몰입하기 위해 실제로 사람들을 훔쳐보고 일기장에 그 장면을 기록했다는 벨은 관음의 야릇한 흥분과 섬뜩한 긴장, 애정과 적개심이 뒤엉킨 혼란, 죽음의 그늘을 벗지 못하는 아릿한 슬픔, 사춘기의 고독과 기묘한 떨림까지, 한마디로 못박을 수 없는 할람의 얼굴을 매혹적인 모순 그대로 표현했다. 친구의 자살을 목격하고 스스로를 봉인해버리는 <춤스크러버>의 고등학생, 총과 열렬한 사랑에 빠지는 <디워 웬디>의 청춘,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식의 통과 의례를 선사하는 <할람 포>까지, 20대 초반의 제이미 벨이 맞춤옷을 입은 듯 빛을 발하는 것은 그처럼 뒤틀리고 신음하며 삶 그 자체와 싸움을 벌이는 젊음이다.

“오스카를 수상하지 않은 게 나의 행운”

“그들 모두가 자신이 갖지 않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찾아다닌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구라는 땅에서 20년 정도를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야 할 지옥 같은 날들이 많이 남아 있군. 대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앞으론 뭘 해야 하는 거지?’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겁이 난다. 특히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심장에 생채기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가장 찬란한 환희의 순간에조차 어른대던 소년 빌리의 묘한 비애는 세월의 더께와 함께 가슴을 뻐근하게 누르는 묵직한 질량을 얻었다. 토슈즈를 벗은 제이미 벨이 발견한 또 다른 얼굴. 불꽃처럼 열정을 쏘아 올리던 소년은 피해갈 수 없는 성장통을 양분 삼아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 벼락처럼 찾아온 스타덤의 함정, 타블로이드의 천박한 융단폭격, 데뷔작이 달아놓은 견고한 꼬리표와 온몸으로 고투하며, 타인의 시선에 움츠리는 대신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자신만의 고유한 호흡과 리듬을 찾아가면서.

<디어 웬디>
<춤스크러버>

2000년 <빌리 엘리어트>로 벨에게 호들갑스런 찬사와 관심이 쏟아졌을 때, 스티븐 달드리의 바람은 하나였다. “제발 제이미가 제2의 드루 배리모어, 제2의 매컬리 컬킨이 되지 않기를.” 그의 우려는 다행히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때 오스카를 수상하지 않은 게 나의 행운”이라고 말하는 벨은 클럽과 재활원을 부메랑처럼 오가는 ‘셀리브리티’가 되는 대신, 앞으로의 가능성에 더욱 내기를 걸고 싶어지는 스물두살의 흥미로운 배우로 성장했다. “만약 당신이 예전에 모든 사람이 공감했던 영화를 했고, 많은 이들이 당신을 좋아했던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런 순간이 닥칠 거다. 당신이 무언가를 했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응답하는 순간. ‘오, 이럴 수가…!’” 확실히 그때 그 시절의 사랑스러운 소년을 네버랜드의 신전에 고이 모셔두고 싶은 이들이라면, 립스틱을 바르고 지글대는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벨을 향해 “오, 이럴 수가!” 크게 한번 탄식을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소년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소년의 어깨 위로 훌쩍 성장한 이 청년을 기억할 차례다. “맙소사,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나는 남자다. 사람은 자란다니까.”(“I’m not a kid now, Jesus. I’m a guy. People g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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