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언중유골 골중유언 [1]
2008-07-1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패러디의 힘과 미덕을 확인한 ‘본 시리즈’ 패러디 동영상 <뼈의 최후 통첩>

정식으로 개봉한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갖고 한판 놀아본 유머 한마당 <뼈의 최후 통첩>에 관해 쓰게 된 데에는 계기가 있다. 먼저 아주 사적인 계기가 있다. 웃어봐야 입꼬리를 살짝 당기는 수준이거나 아무리 크게 웃어도 단발성으로 하, 한번 웃고 마는 정도의 유머 반응 지수를 갖춘 <씨네21> 편집장이 “배를 잡고 웃었다”(<씨네21> 659호 에디토리얼: ‘2008 놀이문화’)고 쓰고 있었다. 이 충격적인 고백을 읽은 것이 <뼈의 최후 통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였음을 숨길 생각이 없다. 상황이 그렇다면 이건 분명 물건이다.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9분11초 동안 즐거웠다. 뒤늦게 본 게 후회됐다.

개인적으로는 윤성호의 영화 <은하해방전선>에 등장했던 에피소드가 당분간은 가장 독한 정치적 유머로 기억될 거라 여기고 있었다. <은하해방전선>에서 갑자기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주인공 영재가 병원을 찾아 진료 상담을 청하자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혹시 가족 중에 정신 병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 영재는 잠깐 생각하더니,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에 이렇게 써서 보여준다. “사촌형제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한명 있어요.” 듣는 입장에 따라 밉살스러운 험담이자 서늘한 풍자다.

뒤늦게 만난 패러디 동영상 <뼈의 최후 통첩>이 여기에 버금간다. 대사들 중 항간에는 이미 유명해진 것도 많다. “이봐, 손석희 말 더듬는 거 본 적 있나? 이번 토론은 우리 승리야”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대사라고 한다. 이 대사의 정황이 궁금하다면 인터넷을 연결하고 몇분간의 시간만 할애하면 된다. 어쨌거나, 전격 평론 지면에 어울리지 않을 이런 시답지 않은 사연으로 시작하게 된 것도 다 그놈의 <뼈의 최후 통첩> 탓이다.

그런데 다른 계기도 있다. 6월19일 “이명박 정부와 촛불,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주제로 열린 MBC <100분토론>에서 토론자로 나섰던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촛불집회를 “천민민주주의”라는 신조어로 공격하자, 뒤이어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막스 베버가 한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은 있어도 천민민주주의라는 말은 없다”면서 주 의원이 과거 구설수에 휘말렸던 사건을 빗대어 “대구 밤문화는 귀족문화고 촛불문화는 천민문화냐”며 반박했다. 주 의원은 “그런 말이 원래 있고 없고 한 게 뭐 그리 중요하냐”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천민민주주의라는 용어와 그걸 내세워 펼치려던 주 의원의 논지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주장처럼 어떤 말이 원래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청자로서 이 토론을 지켜보던 내게 기이한 흥미를 유발한 건 놀랍게도 진중권의 날카로운 반론이 아니라 주 의원의 소신있는(?) 그 신조어에 대한 확신이었다.

다시 말해도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과 그들의 행위를 가리켜 천민민주주의라고 규정한 것에 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추론이 생겨났다. 당시 비폭력의 기조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의 양상을 천민적이라고 이해하게 된 것이라면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해낸 것인지 우리는 발언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천민민주주의라는 말은) 추적해보니 2003년 이회창 총재가 쓰면서 생긴 말”이라는 진중권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은 이미 다른 경로로 향한다. 그러니까, 주 의원은 어떤 식으로건 촛불집회의 민심을 대변해온 대표적인 표현 양식에 관해 이미 역설적으로 감응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혹시 그는 촛불집회의 역할을 부정하면서도, 강력한 비난의 어투를 사용하여 촛불집회를 공격하면서도, 역으로는 그 안에서 작동하는 대화적 언어 양식과 다양한 발언들의 불경스럽고도 왁자지껄한 경향에 관해 정확히 반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내게 그의 말은 촛불집회장에서의 언어 작동에 관한, 그중에서도 패러디와 그에 근접한 형태들에 관한 자의적인 이해인 것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놀라운 직관이다.

이 자리에서 정치 토론을 할 의사가 내게는 없다. 그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뼈의 최후 통첩>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걸 둘러싼 사회의 담론 현황을 우선 보지 않을 수 없다. 천박하다고 느끼는 건 불경하다는 것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그 반응이 틀리지는 않다. 표현의 양식에 국한한다면 이 당시 촛불집회에 등장한 용어들이 경건할 리 없다. 유쾌한데다 숙연하지 않고 게다가 시끌벅적하다. 엄숙은 멀리하고 조롱과 그에 따른 웃음이 흘러넘친다. 촛불집회에 등장하여 유명해진 피켓과 그들의 말을 보자. 대통령을 쥐에 비유한 밉살스러운 문구에서부터 컨테이너를 명박산성이라 부르는 비아냥과 물대포를 쏘아댈 때 온수와 비누를 달라고 외치는 우스꽝스러운 대응들, 그러나 결코 대동단결되지 않고 이합집산으로 향방을 결정짓거나(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 자기의 마음에 드는 문구가 박혀 있는 피켓이 아니면 들지 않으려 하고, 그래서 개별적으로 말하고 싶은 문구들을 제작하여 거리에 몰려든 그 사람들. 그들이 한 가지 공유하는 태도가 있다면 촛불집회라는 문화축제에 가까운 행사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에너지로 웃음을 믿는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비틀린 웃음을.

하지만 말의 국면을 우리는 바꾸어야 한다. 천박하다고만 말하는 건 촛불집회에 등장한 그 언어들을 전적으로 비난하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정확하게는 민중적이라고 말해야 더 어울릴 것이다. 멀쩡한 시민들이 스스로 광대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만들어낸 희화화된 각종 정치적 방언들, 다음성적인 선언의 산발적인 묶음들, 공식 정책에 대한 무한한 변죽들, 그걸 비틀린 웃음으로 승화하여 즐기고 저항하는 율동들. 표현의 가면무도회 혹은 카니발이라고 부를 만한 이 시민적 연회에 깃든 축제성, 광대성, 희극성. 그 안에서도 유독 두드러진 언어의 특징을 한 가지 꼽는다면 그건 아마도 패러디일 것이며 혹은 그에 가까운 형태일 것이다. 각종 언론과 개인 블로그를 통해 익숙하게 알려진 현장의 불경한 패러디 문구들을 두어 가지만 상기하면 된다. “Boys, be MB shuts!”(소년이여! MB 입 좀 막아라), “쥐 귀에 경 읽기”.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패러디 송과 패러디 이미지들을 생각하면 된다. 패러디는 언어적으로 방탕하지만 그 때문에 때때로 민중의 속마음을 첨예하게 대변하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금 바흐친의 생각을 빌려 말하는 중이다.

패러디를 가능하게 한 ‘본 시리즈’의 높은 인지도

5월19일 처음 게재된 뒤 쇠고기 정국과 촛불집회를 소재로 만든 동영상 패러디물 <뼈의 최후 통첩>은 화제를 몰고 왔다. 웃어보자고 만든 한편의 동영상 패러디물이 조회수 100만을 넘어 화제의 중심에 들어섰을 때 이 패러디물의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했을까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단지 재미있어 그런 현상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김풀빵의 다른 작품들 중에는 <뼈의 최후 통첩>보다 더 웃기고 기발한 것들도 있다. 예컨대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을 주입식 학습의 현장으로 빗대어 만든 것 역시 박장대소할 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뼈의 최후 통첩>만큼 회자되지는 않았다. <뼈의 최후 통첩>이 중요해진 건 그 작품의 완성도를 넘어 사회와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를 가지면서부터다. 김풀빵은 재미삼아 작품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유쾌하게 그 작품을 이야기하거나 즐기는 가운데 그게 일종의 사회적 메신저가 된 것이다. 소설의 산문적 패러디가 문학사회학의 일환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만난 이 웃기는 짬뽕 패러디물은 일종의 우리의 영화사회학 혹은 영상사회학에 대한 질문에 교량을 놓고 있다. <뼈의 최후 통첩>은 김풀빵의 완전한 작가적 결과물이기보다 사회가 낳은 자식이다.

이제부터 내가 흥미를 갖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뼈의 최후 통첩>이 말을 거는 방식을 보는 것이다. 사회 정황상 근래 대한민국에서 개봉한 어떤 영화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9분11초짜리 이 동영상 패러디는 어떤 식으로 내부 작동하여 말을 걸고 있는 것일까. 이 놀이 같은 패러디물을 분석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또 다른 놀이의 일환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냥 노는 것처럼 그 내부의 활성을 한번 모험해보고 싶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동영상 패러디는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 어떤 시청각적 변환 패러다임 아래 <본 얼티메이텀>은 터무니없이 <뼈의 최후 통첩>이 된 것인가.

<뼈의 최후 통첩>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촛불집회에 참가하려는 어느 고등학생과 그를 막는 정부간의 대결구도로 전개된다. 수업 중에 잡혀와 전주 덕진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던 고등학생(맷 데이먼)이 격투 끝에 그곳을 탈출하고 강남시외버스터미널에 있는 또 다른 친구와 연락을 취한 뒤 촛불집회에 가려 한다. 하지만 정부 요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장관에게 보고하는 한 요원의 말을 빌리자면 강남시외버스터미널에서 통화하던 친구에게 정부는 “두발검사를 하고 정학을 먹였다”. 한편 장관은 MBC <100분토론>에서 “정부쪽 인사들이 LA의 한 주부에게 자발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긴급히 이 방면의 전문가인“고양시 최 선생님을 투입하라”고 명령한다(자발리다라는 은어의 말뜻을 잘 모르겠는데, 이날의 토론을 지켜본 시청자로서 해석하자면, 수세에 몰리다, 정도로 들으면 될 것 같다). 주인공을 막으려는 작전과 함께 장관을 비롯한 정부 요원들은 내부적으로 광우병 위험도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격론도 벌인다. 마침내 주인공은 자신이 가려는 촛불집회의 장소와 시간을 인터넷으로 확인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촛불집회에 가는 대신 정부 건물의 주변에 찾아와 정부 여성 관료에게 최후 통첩을 전한다.

이때 등장인물 중 제이슨 본이 주인공, <가디언> 기자 사이먼 로스는 머리 깎이고 정학 먹은 친구, CIA 고위간부 노아 보슨은 장관, CIA 요원 파멜라 랜디는 정부쪽 여성 관료로 바뀌어 있다. 제이슨 본이 공항검색대에 붙잡힌 뒤 미국 대사관 직원에게 조사를 받는 장면은 전주 덕진경찰서로, <가디언> 기자가 제이슨 본과 접촉하기 위해 통화하는 장면은 강남시외버스터미널로, 제이슨 본의 체포와 사살을 두고 회의를 벌이는 CIA 요원들의 회의석상은 정부 관료들의 광우병 토론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중간에 실제 MBC <100분토론> 방송분과 <조선일보>의 지면이 삽입되었다. 단, <본 얼티메이텀>을 주로 원본으로 취하고 있으나 전주 덕진경찰서 장면은 <본 슈프리머시>에서, 최후 통첩을 전하는 라스트신 역시 <본 슈프리머시>에서 가져왔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모든 변형을 가능하게 한 것이‘본 시리즈’의 높은 인지도라는 점을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시리즈는 국내에서도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유명한 영화를 원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뼈의 최후 통첩>의 탄생은 가능했다. 이 점을 일단 놓치면 안 된다. 패러디란 그 원본이 되는 작품이 유명하지 않거나 혹은 높은 인지도를 갖지 않는다면 시작부터 어려움에 처한다. 패러디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가지고 이제 막 만들어낸 생경한 것 사이의 차이와 간격의 비틀기로서 효과를 기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김풀빵이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를 소재로 쇠고기 정국을 아무리 잘 패러디했다 하더라도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제3세계 영화운동의 역사에 관해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관객이라면 공감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본 시리즈와 그 주인공 제이슨 본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축산업 시스템을 고발하는 패러디 애니메이션 <미트릭스>가 다름 아니라 <매트릭스>를 원본으로 삼은 데에도 그런 이유가 있다. 원본의 공히 인정받은 인지도와 유명도는 패러디의 제1막 제1장이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뒤따르는 조건은 특정 예술성이나 정파성은 철저하게 대중적 인지도라는 우산 아래에 일단 놓인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어떤 특정 세력이 자기들만이 추앙하는 세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전범을 원본으로 삼아 만들어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 것이 바로 패러디다.

이 점을 지적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김풀빵은 <본 얼티메이텀>을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의 다른 작품들로 추측건대 그가 시네마테크를 열심히 출입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대다수 쉽고 흥미로운 당대의 할리우드영화 섭렵하기를 즐기는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영화광이 아니며 그냥 보통 영화관객이다. 다만 쇠고기 정국이 첨예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영화관객이다. 그러니 적어도 김풀빵과 <뼈의 최후 통첩>의 경우에는 패러디의 창작 주체가 어떤 성격의 원본을 선택했는가의 문제가, 곧 이 패러디의 창작 주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지에 관한 것까지 동시에 시사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대중적인 작품과 누구와 비교해도 튀어 보일 이유가 없는 대중의 한 사람, 그 둘의 만남. 김풀빵의 배후에는 세력이 없는 것 같다.

갈아 끼우는 수준을 뛰어넘는 <뼈의 최후 통첩>이란 제목 짓기

그런데 우리는 질문을 한 가지 하게 된다. 김풀빵이 여타 다른 영화가 아닌 굳이 <본 얼티메이텀>을 패러디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손쉬운 것 같다. 열쇠는 <본 얼티메이텀>이라는 제목에 있다. 주인공 ‘bourne’을 본이라고 발음할 때 그건‘ bone’을 본이라고 발음할 때와 같고, bone을 풀이하자면 뼈라는 뜻을 갖고 있으니 뼈는 다시 광우병과 연관되기 때문에 본 시리즈가 선택됐다고 말하면 정답일 것이다. 실은 그게 김풀빵을 이끈 연상의 작용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말하기에는 이 제목 짓기는 좀더 흥미롭고 복잡한 문제를 상정하고 있다. <뼈의 최후 통첩>이 제목을 바꾼 방식에는 유명한 작품을 패러디의 원본으로 선택한 그 다음, 이라는 문제가 뒤따른다.

동일한 수준의 유명 영화이기는 해도, <본 얼티메이텀>의 제목을 <뼈의 최후 통첩>이라고 바꾸는 것과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쿵푸팬더> 의 제목을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뼈의 왕국> 또는 <쿵푸 뼈>로 바꾸는 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뼈의 왕국>과 <쿵푸 뼈>의 방법은 하나의 요소를 탈구시키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완벽하게 갈아 끼워넣는 방식이다. 물론 이것도 패러디의 한 방식이다. 하지만 <뼈의 최후 통첩>의 패러디 방식은 좀 다르다. <뼈의 최후 통첩>이라는 제목 짓기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또한 바꾸는 것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은 이 방식이 <뼈의 최후통첩>의 전반적인 활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The Bone Ultimatum>(뼈의 최후 통첩). 이것이 우리가 약칭 <뼈의 최후 통첩>이라고 부르는 이 동영상의 정식 제목이다. 김풀빵은 이미 말한 연상을 따라 bourne을 bone으로 바꿨다. 하지만 Ultimatum은 그대로 놓아둔다. 그런데 bourne과 bone은 우리가 발음할 때 차이없이 ‘본’이라 읽힌다. 그러니 영어로는 바뀐 것 같지만 발음해보면 동일하게 ‘본 얼티메이텀’이다. 그 뒤에 해석처럼 김풀빵은 괄호를 두고 뼈의 최후 통첩이라고 붙여놓았다. 이 방법이 작품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이를테면, 제목상으로 bourne이 bone으로 바뀌었지만 동영상이 시작되고 나면 우리 눈에 보이는 주인공은 여전히 <The Bourne Ultimatum>의 그 bourne이다. 하지만 김풀빵은 지금 이 사람이 더이상 bourne이 아니라 bone이라고 이미 일러주었다. 여전히 ‘본’인데‘bourne/bone’인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았는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우리는 그가 지은 제목의 지시성 때문에 끊임없이 애매하다.‘에이 이건 사실 제이슨 본이잖아’라고 생각하다가도 ‘아차, 이건 그 본이 아니라 촛불집회 하러 가는 본이지’라는 헷갈림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되풀이한다.

<뼈의 최후 통첩>이 우습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우스운가. 그건 달라졌으나 달라지지 않은 그 애매함 안으로 해석자인 우리가 들어가 원본과 패러디물 양쪽 모두를 생각하면서 동일함과 차이의 유희를 함께 즐기기 때문이다. 그때 웃음이 찾아온다. 그런데 <뼈의 최후 통첩>에서는 해석이 뒤따르는 웃음이다. <뼈의 최후통 첩>은 사회의 중요한 이슈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쳐 말하면 그때 당신이 웃느냐 웃지 못하느냐는 당신이 여기서 해석의 요구를 즐길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미묘하게 입장을 요구한다. 예컨대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비밀병기 요원 ‘bourne’이 촛불집회하러 가는 고삐리 ‘bone’으로 뒤바뀌어버린, 그러나 여전히 본이라 헷갈리기 그지없는 이 엉터리 상황을 두고 즐길 수 있을 것인가. A와 A'라는 애매한 이중의 관계를 형성한 다음, 그 사이에 관객을 밀어넣고 양쪽을 모두 생각하게 하면서, 여기서 당신이 웃느냐 웃지 못하느냐는 당신의 현실 입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 <뼈의 최후통첩>의 신랄함이다. 그 때 웃음은 입장의 표명이다. 농담 삼아 만들었어도 <뼈의 최후통첩>이 지금 중요하다면 다름 아니라 이 문제 때문이다.

이 제목 짓기의 형태를 빌미로 <뼈의 최후통첩>의 세 가지 국면을 말할 수 있게 됐다. 첫째는 어떻게 원본으로부터 최대한 이격시킬 것인가, 둘째는 그러나 이격시키되 어떻게 원본과의 동일성을 유지할 것인가, 셋째는 그 두 가지 과정에 어떻게 현실을 개입시켜 입장을 표명하게 할 것인가이다. 지금부터 그 문제를 더 자세히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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