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생긴 탓을 할 수밖에 없다. 섹시함과 어리버리함이 공존하는 구미호(<구미호 가족>)와 유부남과의 독한 사랑에 몸부림치는 보석디자이너(드라마 <달콤한 인생>)에 이어 <다찌마와리>에서는 관능적인 여성첩보원이다. 류승완 감독이 박시연에게서 본 것은 70~80년대 여배우들이 가진 클래식함이었고, 그중에서도 <특명미녀군단> <위대한 헌터 G. J> 등 여러 첩보영화에서 독한 향기를 뿜던 강리나의 얼굴이었다. 흔히 말하듯 ‘남자를 여럿 잡을 만큼’ 큰 눈과 오똑한 코가 두 여배우의 공통점이다. 아마도 이국적(으로 보이고 싶은) 첩보물에는 더더욱 그럴싸한 매력일 듯. 여기에 류승완 감독이 1975년작 <여자형사 마리>의 빨간색 가죽옷을 입히자 <다찌마와리>의 마리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박시연의 마리는 그들과 다르게 ‘일단 예쁜 척을 하고 본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언제나 여자요원들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쾌남의 덫에 걸린 마리는 다찌마와리에게만큼은 언제나 무방비상태다. 하지만 그녀의 온갖 예쁜 척에도 불구하고 조국 수호에 몸과 마음을 바친 다찌마와리에게 사랑은 사치일 뿐이다. 마리는 어쩌면 빗물일지도 모를 눈물을 흘리며 혼자 운다. “리딩할 때부터 민망했어요. 촬영을 할 때는 그래도 오버하면서 연기했는데, 막상 컷 소리가 나면 구석으로 도망가기 바빴죠. 그래도 제가 이런 연기를 또 어디에 가서 해보겠어요? (웃음)”
박시연에게 <다찌마와리>는 황당한 프로젝트였다. 평소 류승완 감독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좋아했지만, 요상한 말투에 배경과 의상이 수시로 바뀌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찍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영화이니 재밌게 해보자”는 감독의 말에 그녀는 분량과 상관없이 마리가 되고자 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영화의 분위기를 미리 익히려 70년대 액션영화를 섭렵했고, 리딩을 할 때는 낯선 배우들 앞에서 웃음을 참느라 혼났고, 막상 연기를 할 때는 ‘남을 웃기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진지해야 한다’는 코믹연기의 어려움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혹시 <여자형사 마리>의 배우 루비나처럼 거친 남자들을 제압하는 연기는 해보고 싶지 않았을까? “아니요. <구미호 가족> 때는 와이어에 매달려 있다가 허리를 다쳤고,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 형사를 연기할 때는 갈비뼈를 다쳤거든요. <달콤한 인생>에서도 절벽에 매달리다가 다리가 찢기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뭐만 하면 다치니까 이젠 액션이 무서워요.” 촬영이 끝나자마자 <달콤한 인생>으로 달려갔고, 드라마가 끝난 뒤에는 또 바로 <마린보이>를 위해 부산을 오가고 있는 그녀는 “이제 와서 보니 정말 재밌게 놀았다는 생각”이 든단다. “어느 현장에서나 그런데, 처음에는 제 인상 때문에 저를 어려워하세요. 이번에는 제가 먼저 부끄러운 게 많았는데, 그것도 어떤 지점을 지나니까 나중에는 제가 더 신나더라고요. (웃음)” 현재 촬영 중인 <마린보이>에서도 박시연은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유리를 연기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올해 서른밖에 안 된 이 여배우가 그저 밝고 명랑한 여자를 연기한 기억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신의 외모에 위험부담을 느끼는 건 아니다. “한때는 나는 왜 이렇게 세게 생겼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그것이 관객이 원하는 거라면 그 안에서 새로운 걸 찾으면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평소 성격처럼 털털하고 엉뚱한 캐릭터라면 섹시한 연기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다찌마와리>의 마리와 같은 여자를 말하는 건가 싶었더니,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제가 예쁜 척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