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세기 소년> 20세기 켄지, 영화로 강림하다
2008-08-26
글 : 정재혁
우라사와 나오키의 인기만화 원작, 영화 <20세기 소년> 일본 프로모션 현장을 가다

2008년 8월, 도쿄의 극장가는 풍성했다. 도호는 <더 매직 아워> <꽃보다 남자> <벼랑 위의 포뇨>로 연달아 세편의 흥행작을 내놓았고, 쇼치쿠는 <게게게노 게타로>의 후속편 <게게게노 게타로: 천년저주의 노래>로 나쁘지 않은 여름 시즌을 시작했으며, <파트너>로 알찬 수익을 거둔 도에이는 블록버스터 대작 <크라이머즈 하이>를 내놓았다. 가도가와의 <다이브>, 크로크웍스의 <애프터스쿨>, 닛카쓰의 <백만엔과 고충녀> 등 아트 계열의 극장가에서도 꾸준히 성공작들이 나왔다. 사카모토 준지의 신작 <어둠의 아이들>은 아동 폭력이란 소재가 화제가 돼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했고, 오시이 마모루의 새 영화 <스카이 크롤러>는 소규모 개봉임에도 첫주 7위로 데뷔했다. TV, 음반사, 출판사 등과 제작을 함께하는 제작위원회 방식은 더욱 견고해져 일본영화는 극장뿐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타워레코드에선 헤비메탈을 소재로 한 영화 <디트로이트 메탈시티>의 홍보 이벤트가 연일 진행됐고, 캐릭터 매장에선 <벼랑 위의 포뇨>의 깜찍한 주제가가 흐르는 가운데 포뇨 인형, 포뇨 물총 등의 상품 판매가 한창이었다. 리브로를 비롯해 대형 서점에선 9월 개봉할 이누도 잇신 감독의 신작 <구구는 고양이다>의 원작 소설이 프로모션 행사를 하고 있었다. 거리를 조금만 걸어도 일본영화가 발에 차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8월30일 개봉하는 영화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의 주제곡 T.REX의 <20th Century Boy>는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8월7일 목요일 오후 3시, 도쿄 롯폰기힐스에 마련된 영화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 프로모션 행사 현장. 무대는 검은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고 행사장 주변엔 하얀 눈 모양 마크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진행 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장막이 걷힌 뒤 무대에는 극중에 등장하는 대형 로봇이 공개됐는데, 이는 폭, 높이, 직경 모두 9m로 진행자의 말에 따르면 “역대 일본영화 중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주인공”이다. 5개월에 걸쳐 제작됐고, 4천만엔이 투입된 프로모션 행사는 그 규모가 영화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1999년부터 2006년까지 8년 동안 썼고, 22권의 단행본과 2권의 <21세기 소년>으로 발행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가져온 영화 <20세기 소년>은 제작비 60억엔에, 촬영기간 1년이 소요될 프로젝트다. 3부작으로 만들어지며 그중 촬영을 마친 1편이 8월30일(국내개봉 9월) 개봉한다. 2편은 2009년 1월31일에, 3편은 2009년 가을 개봉예정이다. 연출은 드라마 <트릭> 시리즈, <사랑따윈 몰라, 여름> 등으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쓰쓰미 유키히코 감독이 맡았고,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 드라마 <하얀거탑>의 가라사와 도시아키, <훌라걸스> <사랑의 유형지> 등의 도요카와 에쓰시, <유레루> <도쿄!>의 가가와 데루야키, <마미야 형제> <쓰키가미> 등의 사사키 구라노스케, <핑퐁> <실록 연합적군> 등의 아라타 등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타이에서의 개봉이 이미 결정됐으며, 제작사쪽은 2009년 칸영화제에서 미국과 유럽을 대상으로 세일즈도 벌일 계획이라 밝혔다. 도호, 일본TV, 소학관(만화 <20세기 소년>의 출판사) 등이 제작위원회에 함께 참여한 <20세기 소년>은 한마디로 일본 대중영화의 기획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점검할 수 있는 중간결과물이다.

총 3부작, 제작비 60억엔, 촬영기간만 1년

영화는 중학생인 주인공 켄지(가라사와 도시아키)가 학교 방송실을 점거하고 T.REX의 1973년 히트곡 <20th Century Boy>를 틀면서 시작한다. 1970년대 일본은 고도의 경제성장으로 환상에 부풀어 있지만 이면엔 암울한 어둠이 가려져 있다. 이후 영화는 20년을 건너뛰어 록스타에 대한 꿈을 접은 채 편의점에서 재미없게 물건을 팔며 살고 있는 켄지의 일상을 보여준다. 실종된 누나 키리코(구로키 히토미)의 아이 칸나(다이라 아이리)를 등에 업고 그는 기계적인 인사를 되풀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로봇공학박사인 시키시마 교수가 실종된다. 켄지의 초등학교 동창생인 동키(나마세 가쓰히사)는 자살한다. 그리고 시키시마 교수의 집과 동키가 남긴 편지에는 모두 눈과 손가락이 묘하게 겹친 ‘친구’의 마크가 발견된다. 켄지는 주변에서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조사하기 시작한다. 사건은 점점 더 늘어나고 켄지는 이게 모두 ‘친구’라는 단체의 범행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일본뿐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아프리카에서도 사건은 터진다. 신종 전염병이 발생하고, 그 병원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점점 커지는 사건에 당황하던 켄지는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자신이 20년 전 친구들과 함께 장난삼아 쓴 ‘예언의 서’ 내용 그대로임을 깨닫는다. ‘친구’ 사람들이 결집한 정치세력 ‘우민당’은 일본 정권을 장악하고, 이들의 내막을 파헤치려던 켄지는 ‘친구’에 의해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지목된다. ‘예언의 서’에 써놓은 ‘피의 그믐날’인 12월31일은 다가온다. 켄지는 어릴 적 친구들을 하나둘 불러모아 스스로 벌여놓은 과거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결심한다. 세상을 바꾸자던, 록이 실패했던 그 꿈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시도하는 셈이다.

“성서를 영화화하는 일이다.” “만화를 하나의 콘티로 생각하며 작업했다.” 쓰쓰미 유키히코 감독의 말처럼 <20세기 소년> 1편은 단행본 만화의 1권부터 8권을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이다. 커다란 이야기 줄기는 물론 에피소드들도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고 대다수의 장면들은 만화의 컷과 앵글도 흡사하다. 많은 사건이 발생하는 탓에 각각의 장면은 매우 빠른 리듬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이는 만화의 편집 방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을 앞뒤로 오가는 방식도 똑같고, 인물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타이밍이나 상황도 원작 그대로다. 쓰쓰미 유키히코 감독은 “원작의 팬으로서” 만화 팬에게 가장 충실한 방법으로 <20세기 소년>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는 영화적으로 다소 불친절하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이라면 사건을 따라가기에 숨이 가프고, 20년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시간을 앞뒤로 계속 오가기 때문에 한편의 영화로선 불균질한 리듬을 갖는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운 건 주인공 켄지를 비롯, 어릴 적 친구들인 오쵸(도요카와 에쓰시), 유키지(도키와 다카코), 요시츠네(가가와 데루유키), 마루오(이시즈카 히데히코), 동키 등 인물들의 감정이 제대로 그려질 여유도 없이 영화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켄지가 모든 사건이 ‘예언의 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대목의 감정적인 클로즈업 등 쓰쓰미 감독 특유의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는 전체적으로 끊임없이 많은 사건의 나열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 소개, 사건의 도입, 상황 설명 등 거대한 서사극의 1편으로서 어쩔 수 없이 안고 있는 영화의 난점들이 있었겠지만, 이 요소들을 압축하거나 재구성하는 과정없이 완성한 쓰쓰미 감독의 연출은 아쉽다.

원작자 우라사와 기획·각본에 참여, 만화와 흡사한 영화

하지만 처음부터 영화 <20세기 소년>은 만화 <20세기 소년>에서 멀어질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쓰쓰미 감독의 연출 방식은 애초에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20세기 소년>의 영화화는 6년 전부터 원작자인 우라사와 나오키와 만화의 기획자인 나가사키 다카시가 구상했던 프로젝트고, 영화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의 각본은 우라사와와 나가사키, 그리고 드라마 <히어로> 시리즈로 유명한 후쿠다 야스시와 일본TV 소속 각본가 와타나베 유우스케의 공동작업으로 완성됐다. 3편 전체의 각본 감수는 우라사와 나오키가 맡으며, 나머지 2편과 3편은 우라사와의 단독 각본으로 쓰여질 예정이다. 나가사키 다카시는 한 인터뷰에서 “만화를 구상하면서 우라사와와 절대 영상화를 할 수 없는 만화를 해보자고 이야기했다”고 했는데, 2004년 무렵부터 둘은 “영화화가 불가능한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기획”에 착수했다. 여기에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 <데스노트> 시리즈를 제작한 일본TV의 오쿠다 세이지 프로듀서가 붙으면서 프로젝트가 가시화됐다. 즉 <20세기 소년>의 영화화는 장난삼아 ‘예언의 서’를 썼던 극중 인물들이 시간이 지난 뒤 ‘예언의 서’와 싸우게 됐듯, 우라사와와 나가사키 두 남자가 과거에 뱉어놓은 ‘영상화 불가능’이란 과제에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도전하는 셈이다. 주인공 켄지 역의 가라사와 도시아키는 한 인터뷰에서 “우라사와가 캐스팅 제의를 했을 때 영광이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20세기 소년> 영화 프로젝트가 얼마나 우라사와의 입김으로 움직여왔고, 움직이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만화책의 분량상으로 정확하게 3분의 1만이 공개된 영화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은 아직 뭐라고 판단하기 힘든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의 영화로서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은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는 작품이지만, 우라사와 나오키의 큰 프로젝트 안에서 보면 그 단점들은 오히려 당연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24권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3장으로 나누고, 이를 두 차례의 촬영(1편과 2편의 일부가 2008년 1월부터 6월까지 촬영을 마쳤고, 2편의 나머지 일부와 3편은 2008년 8월부터 촬영에 들어간다)으로 나누어 찍은 <20세기 소년> 영화 프로젝트는 많은 드라마 경험으로 안정적인 연출력을 갖고 있는 쓰쓰미 유키히코 감독을 택했다. 쓰쓰미 감독 스스로도 “드라마 촬영의 나누어 찍는 연출이 익숙해서 두텀으로 나뉜 촬영이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모든 인터뷰에서 말미에 “원작의 분위기를 부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3막에서 ‘친구’에 대한 해석의 차이, 만화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 역시 모두 우라사와가 꿈꾼 <20세기 소년> 영상화 프로젝트의 일부일 뿐이다. 2천만부 이상이 팔린 만화를 영화로 옮기기에 <20세기 소년>이 택한 이 방법은 가장 안정적인 길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일본 대중영화 흥행 신드롬의 동력인 제작위원회 방식으로 가능했다. 거대한 만화시장을 갖고 있는 일본은 다양한 콘텐츠를 출판사와의 교류 속에서 꾸준히 공급받고 있다. <20세기 소년>은 그 방식으로 완성된 작품 중 좋든 나쁘든 일종의 잣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소년>의 2편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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