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린 액션배우다> 개성 넘치는 여섯 주인공의 이야기
2008-09-02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김진희

“산전수전 다겪은 액션감독” _정병길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여학우가 아닌) 담임에게만 사랑받고, 미대 입시에 낙방하고…. 인생이 참, 뭐 같았다.” 다큐멘터리 <우린 액션배우다>의 첫 장면은 정병길 감독의 적나라한 수난기로 시작한다. 물론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서울액션스쿨에 입학하기 전까지 정 감독이 실제로 겪었던 일이지만 한편으론 “관객이 다큐멘터리를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적인 사생활 노출이기도 했다. 주성치마냥 ‘자기를 죽여 영화를 살린’ 정병길 감독의 실제 모습은 영화보다는 좀더 진지하다. 그는 서울액션스쿨 8기로 활동하던 당시 졸업작품으로 액션영화를 만들 것을 동기와 선배 무술감독들에게 제안했다. 그 이전까지 영화를 제작한 기수가 없었고, 기껏해야 액션의 합을 짜거나 이야기가 없는 다찌마와리 영상을 수료작품으로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8기생들이 만든 <칼날 위에 서다>는 액션스쿨에서 자체제작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결국 8기 이후 액션스쿨 학생들의 액션영화 제작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락큰롤에 있어 중요한 세 가지>로 2006년 서울독립영화제를 통해 주목받았던 정병길 감독은 2008년 독립영화계의 최고 화제작으로 평가받는 <우린 액션배우다>로 장편다큐멘터리 제작과 극장 개봉의 꿈을 동시에 이뤘다. 정 감독은 최근 <청년폭도맹진가>(가제)란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바쁘다. 강원도에 사는 서른살 백수들이 무장공비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 ‘인생 역전’을 노리는 장편 블랙코미디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에서도 배우로서의 정 감독을 볼 수 있는 걸까? “주성치처럼 배우와 감독을 병행하고 싶다는 꿈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지만… 주변의 만류도 있고 해서 ‘한컷도’ 출연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웃음) 이번 영화는 제작비가 10억원이나 들어가는 (나로서는) 큰 프로젝트라 그럴 여유도 없을 것 같다.”

“현재를 즐기는 진짜 배우” _곽진석

“얼마 전에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연극에 출연한 나를 보시더니 어머니와 함께 흐뭇하게 웃으시더라. 그래서 (연극배우가) 잘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연극 같이 하는 동료들은 다들 부모님이 반대하신다던데 우리 부모님은 드디어 아들이 속 편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웃음)” 현재 곽진석은 대학로 연극 <거꾸로 놓인 사다리>에서 1인4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지금 현재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자”는 게 신조라서 스턴트맨에 대한 미련은 없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러한 신조로 세상을 살아왔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좋아하는 일을 절대 직업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취미로 남겨둬야 더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위노나 라이더 때문에 선택했다”고 장난스럽게 고백하는 미용사란 일도 사실은 효율적일 것이란 생각에 선택한 직업이다. 하지만 서울액션스쿨에 들어가면서 곽진석의 이러한 신조는 완전히 바뀌었다. 뼈가 자주 부러져 ‘골절진석’이란 별명을 얻었으나 “막상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는 액션스쿨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현재를 즐기는” 삶을 살게 됐다. 그래서 스턴트일을 그만두고도 클라이밍, 스윙댄스, 연기를 배우며 쉴 틈 없이 살았고, 지금은 연극 공연과 동시에 언젠가 꼭 시도해보고 싶었던 인터넷 의류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 “연극에서 맡은 역할이 계속 바뀐다. 창작극이라 시기마다 각색이 되는 바람에 당장 내일모레 무슨 역을 맡을지도 예상할 수 없다. 내 인생이 그렇다. 원래 멀리 보는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멀리 볼 수도 없는 삶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에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영화에서건 현실에서건 밝고 쾌활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곽진석의 원동력을 알 것 같다.

“건망증 심한 액션미남” _신성일

“발차기는 어설펐지만 얼굴이 잘생겨서 합격.” “얼굴이 잘생겨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됨.” 영화 내내 배우 신성일에게는 ‘미남자’란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짓궂은 질문을 던졌더니, “외모보다는 카 스턴트에 더 자신있다”고 대답해 동료들의 원성을 한몸에 받았다. 이는 그만큼 스턴트에 대한 그의 애정이 대단하다는 증거다. 포항의 한 경비업체 직원으로 일하던 신성일은 스턴트맨이 되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스물다섯살 때 집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수중에는 단돈 10만원뿐이었고, 예상했던 대로 “달방과 고시원을 전전”하는 힘든 생활이 이어졌다. “서울액션스쿨 앞 벤치에서 노숙한 적도 있다. 선배들은 내가 술 먹고 자는 줄 알았겠지만, 그땐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스턴트 교육을 받는 1년의 시간 동안 훈련만큼 혹독한 생활고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오직 스턴트맨이라는 최종 목표만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정병길 감독의 연출작 <칼날 위에 서다>에서 정 감독의 대역으로 클라이맥스의 다찌마와리 신을 멋지게 소화해내는 장면은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4년 뒤, 신성일은 배우라는 또 다른 최종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 스턴트맨으로 일하던 도중 우연히 출연했던 <배틀로드 802.15.4>란 연극이 계기였다. “액션 비중이 크다고 해서 귀덕이와 함께 출연했는데, 그때 처음 연기의 매력을 알게 됐고 배우를 향한 새로운 동경이 시작됐다.” 스턴트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성일은 차분하게 배우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중이다. “연극하는 분이나 직업 사진가 등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진석이가 있는 극단에서 배울 생각도 있고.” 홍대 앞에서 바를 운영하는 것도 다 연기 자금 마련을 위해서다. 여기까지가 ‘잘생긴데다가 생각도 깊은’ 완벽남의 이미지라면, 신성일에겐 무엇인가를 자꾸 잊어버리는 헐렁한 면도 있다. “포항에서 별명이 ‘아 맞다!’였다. 건망증이 하도 심해서 사무실이 몇층인지도 자주 잊어버리다보니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다.” 영화에서 그의 건망증은 ‘국제미아’란 비극(그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촬영장에 도착하기 전 길을 잃는다)으로 이어졌지만, 오히려 이러한 경험을 살려 건망증 심한 남자를 연기하는 것이 배우지망생 신성일의 소원이다.

“멜로드라마를 꿈꾸는 액션스타” _권귀덕

“영화나 드라마에서 차를 뒤집는 것… 해보라면 할 수 있겠어요?” “저는 자동차 고치는 전문인데… 뒤집으라고 하시면…. (몸을 뒤집음)” 꽉 낀 청바지에 구두 차림으로 다리를 찢고, 차 대신 몸을 뒤집는 엉뚱함으로 액션스쿨 오디션에 합격한 스턴트 지망생은 4년 뒤 대한민국에서 차를 가장 잘 뒤집는 남자로 변신해 있었다. 현재 퓨전사극 드라마 <탐나는 도다>의 무술지도를 맡고 있는 권귀덕은 빠른 진급으로 동료 스턴트맨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된 모범적인 케이스다. 하지만 본인은 “하겠다는 욕심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만두는 바람에 빨리 기회가 온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말을 아낀다. 그러나 스턴트 장면의 연출 과정을 직접 들으니 빠른 성공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특별히 자신있는 무술분야는 없다. 무조건 연출해야 할 장면을 공부하는 거다. 사전조사도 하고 비슷한 영화도 찾아보고, 그러면서 나름대로 해본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고.” 매 순간 스턴트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우린 액션배우다>의 한 장면인 울산 카 스턴트 연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스턴트맨이 되었으니 (한 단계 높은) 무술지도가 되고 싶었고, 당장의 목표는 무술감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권귀덕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어머니는 속상해하실 테지만, 나는 내 인생을 길게 안 본다. 50살을 기준으로 그 나이를 못 넘기면 영혼이 중천에 떠돌 것 같고, 그 나이보다 더 산다면 억울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 50살 안에 내가 꿈꿨던 모든 것들을 다 해보고 싶다.” 그의 놀라운 집중력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무술감독 이후 권귀덕의 희망사항 목록에는 감독과 배우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르가 반드시 액션에 국한돼 있는 것은 아니다. “멜로드라마를 좋아한다. 서울액션스쿨도 <네 멋대로 해라>란 드라마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거였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영화들도 너무 좋고. 특히 <원스>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정통적인 드라마에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스턴트계의 으뜸 개그맨” _전세진

전세진. <우린 액션배우다>를 본 관객이라면 이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게 당연하다. 슈퍼 운영, 전자레인지 공장 직원, 호스트바 웨이터, 화장품 방문판매, 말 사육 등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인 그는 특유의 엉뚱함을 선보이며 폭소를 유발하는,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분위기 메이커다. 그런데 영화에 출연시켜달라는 그의 끈질긴 요청이 없었다면 관객은 전세진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6개월의 교육과정 뒤 곧바로 액션스쿨을 떠난 그는 정병길 감독의 촬영 리스트에서 제외돼 있었던 것.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을 듣고 끈질기게 전화를 걸었지. 나도 발차기 잘한다고, 다 잘할 수 있다고 병길이를 설득했다. (웃음)” 결과는 폭발적인 반응으로 이어졌다. 점집 아주머니의 말에 홀려 450만원짜리 호랑이 문신을 등에 업고, 말 한 마리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쯤은 기본이라며 액션스쿨 오디션에서 정신없는 말타기(흉내)로 선배들을 홀리는 등 영화 내내 이어지는 그의 기행에 영화제 관객은 환호했다. 액션스쿨 동기들에 따르면 <우린 액션배우다>를 일찌감치 본 뒤 아직까지 그에게 연락해오는 소녀 팬들도 있다고. 남의 말을 잘 믿고,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열다섯 가지 직업이 더 남았다고 믿는 이 청년은 현재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서 말 사육 중이다. “‘말 타시면서 돈 버실 분’이란 구인광고를 본 뒤 제주도로 내려갔다. 현재 제주 드림랜드 승마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것도 고정된 직업은 아니다. 3개월 정도 하고 질리면 서울에 올라왔다가 장사 망하면 제주도로 돌아가서 ‘저 일해도 되죠?’ 하고 다시 일하고. 하여간 이것저것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보고 싶다.” 그런 그에게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 같은 직업이 나타났으니 바로 ‘스포츠토토’다. “올림픽에 프리미어리그에 프리메라리가, 또 이탈리아 세리에리그…. 농구랑 야구는 승하고 패 사이에서 맞추면 되니 확률이 높다. 이제는 스포츠토토가 내 인생의 희망이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인생 한방’을 얘기하는 전세진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려야 할지, 맞장구를 쳐야 할지 망설여진다. 어쨌든 이 영화가 쉽게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발견한 것만은 확실하다. 서울액션스쿨 동기들과 영화를 본 관객의 바람대로 “<개그콘서트>는 전세진의 출연을 허하라!”

“타고난 운동실력의 소유자” _권문철

유망주. 권문철의 무술 시범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이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어설프고 서툴러서 큰 웃음을 주는 서울액션스쿨 8기 지원자들의 오디션 영상 속에서 높은 점프와 텀블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무술 실력은 단연 돋보인다. 알고보니 권문철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선생님들이 체조선수를 시키라고 부모님께 권유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이였다. 그는 “한번 시작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잦은 부상을 겪으면서도 운동을 단념하지 않았고, 이러한 집념은 중학교 3학년 때 우슈(중국의 전통무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시작한 지 1년 만에 부산지역 우슈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나아가 부산대표 우슈 선수로서 고등학교 3년 내내 각종 대회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권문철이 운동선수가 아닌 스턴트맨을 꿈꾸게 된 까닭이 궁금했다. “우슈가 올림픽 공식 종목이 아니고, 비인기 종목이라는 사실에 진로를 고민했다. 마침 동네 형이 서울액션스쿨 7기로 활동하다가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형은 힘든 일이라고 말렸지만 스턴트 일에 관심이 갔다. 몸을 쓰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아홉살이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서울액션스쿨에 지원하게 된 이유다. “우린 스물다섯, 스물일곱에 들어왔는데 열아홉에 스턴트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다니 대단하다”는 동기 전세진의 말처럼, 일찍부터 사회에 뛰어든 그는 “사회생활은 원래 다 그 정도로 힘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조숙한 청년이다. 스턴트맨으로 활동했던 3년 동안 세번의 인대파열과 세번의 수술을 경험한 권문철은 “두렵지는 않으나 무릎에 대한 걱정 때문에 나약해질” 자신이 싫어 스턴트 일을 그만뒀다. 지금은 “처음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일은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심스럽게 밝은 미래를 전망하는 중이다.

최종 목표는 연기도 잘하고 액션도 잘하는 ‘액션배우’가 되는 것이지만, 청춘을 마음껏 누려본 적이 없는 그는 현재 청춘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4개월 된 연인이 있다. 이름은 전예진이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친구다. 나와 만나줘서 고맙고 정말 사랑한다고 꼭 좀 써달라.” 동기(형)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인터뷰 내내 연인과 문자를 주고받던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