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명백히 할리우드의 안정된 시스템 안에서 흥행을 해보려는 속셈에 불과하다.’ 2003년 뮤지컬 <맘마미아!>의 일등공신인 프로듀서 주디 크레이머와 작가 캐서린 존슨, 감독 필리다 로이드 삼인방이 제작자 톰 행크스, 게리 고츠머와 손잡고 <맘마미아!>의 영화화를 발표하자 그간 영화화할 기회를 엿보던 일각에서는 비난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50살 동갑 세 여성의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향하는 ‘장거리 여행’은 오랜 준비기간만큼이나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7월18일 같은 날 북미 개봉한 <다크 나이트>가 박스오피스 역대 2위에 오르며 할리우드 흥행사를 새로 쓰는 동안, <맘마미아!>는 개봉 첫주 2위에 올라 원작의 명성을 지켜냈다. 비록 강적 <다크 나이트>의 아성에는 못 미치지만 개봉 첫주 성적은 뮤지컬 원작을 가진 영화로는 최고 개봉 기록. 영화의 배경이 된 그리스와 아바의 고향 스웨덴에서는 역대 최고 흥행성적을 경신했다. <다크 나이트>의 어두운 포스를 참아내지 못한 관객에게 <맘마미아!>는 틈새를 파고 든 단비 같은 존재였다.
그간 영화화는 <맘마미아!>에 내려진 숙제였다. “다들 <맘마미아!>를 영화로 만들지 못해 안달나 있었다.” 크레이머는 <맘마미아!>를 영화화하자는 끊임없는 구애에 시달려야 했다. “사람들은 전세계인들이 아바를 좋아하니 영화를 만들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예상했다.” 십대부터 할머니까지 즐겨듣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아바의 ‘이지 리스닝’은 누가 봐도 영리하고 합리적인 대중문화 상품이었다. 게다가 1999년 런던 초연 이후 160개국 도시에서 3억명 이상이 관람하며 뮤지컬의 기록적인 박스오피스 성적으로 상품성이 입증된 상태였다. 어느 누구도 스크린에서 벌어들일 ‘Money Money Money’의 행진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간 크레이머는 이 뜨거운 관심에 제동을 걸어왔다. “우리에겐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 뮤지컬의 성공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인 그녀는 <맘마미아!>가 북미를 석권하고 유럽과 아시아로 진출하며 전세계에서 입지를 굳힐 때까지 끈질긴 인내심을 발휘했고 2003년 마침내 영화화에 착수한다.
침체된 웨스트엔드에 새바람 일으킨 뮤지컬
뮤지컬 <맘마미아!>가 기획될 당시만 해도 이 작품의 파급력을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80년대 이후 세계 뮤지컬계를 이끌어왔다고 자부해온 런던 웨스트엔드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극장은 노후했고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카메론 매킨토시가 이끄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같은 대작들은 명성만을 유지한 채 지루한 돌림노래를 반복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브로드웨이는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처럼 화려한 시스템을 자랑하는 뮤지컬로 역공을 가해왔다. <맘마미아!>는 이렇게 침체된 런던 뮤지컬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킬 따끈한 ‘신상’이었다. 크레이머의 아이디어가 출발이었다. 그녀는 기존의 뮤지컬처럼 시나리오에 의존해 노래를 만드는 주류 뮤지컬의 흐름을 탈피, 아바의 노래에 맞춰 시나리오를 쓰자는 역발상을 꾀했다. 경쾌하고 신나는 첫사랑의 심정을 고백한 노래와 이별의 아픔을 표현한 섬세한 노래를 함께 가지고 있는 아바의 곡들은 스토리를 만들기에 딱 어울리는 대상이었다. 게다가 아바는 볼보 다음으로 스웨덴을 상징하는 상품으로, 전성기 시절 아바는 자국 스웨덴에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는 일등 공신. 그들의 노래는 누구나 즐겨듣고 부르는 대중가요였다. 크레이머는 팀 라이스 프로덕션에서 인연을 맺게 된 아바의 멤버 베니 앤더슨과 비요른 울바에우스를 이 ‘무모한’ 도전에 끌어들였다. 곧 영국 극작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캐서린 존슨에 의해 제대로 된 뮤지컬 시나리오가 완성됐고, 오페라와 뮤지컬 연출 경험이 풍부한 필리다 로이드 감독이 가세했다.
당시 이 새로운 뮤지컬이 불러들인 효과는 엄청났다. 어린아이들까지 흥얼거릴 정도로 대중화된 아바의 노래는 관객에게 숨겨져 있던 복고의 향수를 건드렸다. 매회 공연은 입석이라도 좋으니 공연을 보겠다고 몰려드는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관객은 화려한 복장을 한 배우들과 함께 ‘Dancing Queen’을 외치며 온몸을 들썩거렸다. 2000년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거쳐 2001년 10월,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한 <맘마미아!>는 초연 당시, 9·11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객석 점유율 90%를 넘는 기록을 세우며 <캣츠>의 뒤를 잇는 뮤지컬계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맘마미아!>의 성공은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장르의 발견이었고,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이룬 성과,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주크박스 뮤지컬’의 출발을 알린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원작 뮤지컬의 뼈대 고스란히 살린 영화 버전
“메릴 스트립과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같은 할리우드 호화 배우들이 출연하는 메이저 영화가 될 줄은 나조차 상상도 못했다.” 뮤지컬부터 영화까지 <맘마미아!>를 작업해온 로이드 감독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뮤지컬 제작 당시부터 그룹 아바의 멤버인 앤더슨과 울바에우스라는 커다란 장벽이 존재했다. “둘에게 허락을 받는 게 급선무였다. 그들에게 이 작품이 급조된 아바 헌정공연도 아니고, 실제 그들의 경험을 다루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처음 작업을 구상하고 제의한 지 거의 10여년, 크레이머의 끈질긴 설득으로 공연이 가능했지만, 런던 공연을 허락했던 둘은 이후 브로드웨이 공연을 반대했고, 또 브로드웨이의 성공 이후에는 영화는 절대 안 된다는 방침을 세웠다. <맘마미아!>의 영화화는 결국 ‘안 돼’라는 말을 ‘진행해라’라는 말로 바꾸는 지난하고도 어려운 과정이었다. 브로드웨이의 흥행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겨오는 데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뮤지컬의 본질을 흩트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영화는 원작의 뼈대를 그대로 스크린에 되살린다. 그리스의 작은 섬에서 모텔을 운영하는 도나(메릴 스트립)와 딸 소피(아만다 시프리드). 영화는 결혼을 앞둔 소피가 아빠를 찾기 위해 벌이는 하룻동안의 소동극이다. 생애 최고, 완벽한 결혼을 꿈꾸는 그녀는 결혼식을 앞둔 어느 날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자신의 아빠일지도 모르는 일기장 속 세 남자 샘(피어스 브로스넌), 해리(콜린 퍼스), 빌(스텔란 스카스가드)을 결혼식에 초대한다. 그러나 아빠를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볼 거라 믿었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갑작스런 옛사랑의 등장에 당황한 도나와 각자 자신이 아빠라고 주장하는 세 남자로 인해 결혼식 준비는 난장판이 된다. 소피가 첫 포문을 여는 아바의 노래 <Honey Honey>로 시작한 영화는 무대라는 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버린다. 아바의 고향 스웨덴은 너무 춥다는 이유로, 또 이탈리아는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사용했다는 이유로 로케이션에서 제외됐다. 최종 낙점된 것은 따뜻한 태양과 푸른 바다가 펼쳐진 그리스 소포라데스 제도에서 가장 작은 섬인 스키아토스 섬을 비롯해 스코펠로스 섬, 다무하리 섬. 무대에서 감춰졌던 부분들이 영화 속 열린 공간에서는 가시화된다. 낯선 외지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세 남자의 등장이 푸른 바다에 요트와 함께 펼쳐지며, 소피와 아빠(들)이 서로 친해지는 계기 역시 무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영화 속 장면이다.
영화에 사용된 아바의 노래는 총 17곡. 무대에서 쓰였던 <Under Attack> <Knowing me, Knowing You> <One of Us>가 빠지고 <When All is Said and Done>은 첨가되었으며, 영화에는 쓰이지 않지만 <Thank you for the Music>이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는 등 약간의 변화를 가져온다. <맘마미아!>의 음악을 총괄한 앤더슨과 울바에우스의 지휘 아래 모든 곡이 새롭게 편곡됐고 배우들의 음성으로 직접 녹음됐다. 물론 뮤지컬 작업 때부터 고수해온 ‘가사에 손을 대지 말라’는 앤더슨과 울바에우스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진 채다. 둘은 새롭게 작업을 했기 때문에 아카데미 O.S.T 후보에도 오를 수 있다는 주변의 권고에도, ‘이미 나온 곡들을 가지고 그럴 수는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앤더슨과 울바에우스는 아바에게 어떤 새로움을 부여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바를 기억하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고, 아바를 기억하고 스크린을 찾는 영화팬들을 위해서도 이 기본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코믹 연기로 제대로 망가지는 배우들
<맘마미아!>의 최대 관건은 관록있는 배우들이 얼마나 제대로 망가질 수 있느냐였다. 선뜻 하려는 배우가 나섰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 속 배우들의 코믹 변신은 놀라운 경지다. 특히 젊을 시절 히피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다 지금은 미혼모로 여행자를 위한 숙박업소를 운영하며 살림을 꾸리는 도나 역은 극을 이끌어갈 핵심이었다. 사실 도나 역을 캐스팅하기 전부터 제작진의 명단 첫줄엔 항상 메릴 스트립이 적혀 있었다. 사연은 이렇다. 9·11 직후 메릴 스트립이 딸과 딸 친구를 데리고 <맘마미아!>를 보러갔는데 그때 제작진에게 공연을 굉장히 잘 봤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크레이머는 “필리다와 캐서린, 나는 그 편지 복사본을 받아보고 정말 흥분했다. 나는 그 편지를 책상에 보관했고, 필리다는 냉장고에 붙여놓았다”며 사춘기 소녀 같은 감성을 드러낸다. <실크우드>에서 허밍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그리고 <프레리 홈 컴패니언>에서 잠깐 노래를 부른 적은 있지만, 스트립이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스트립은 아바의 대표곡인 <Dancing Queen> <Mama mia> <Super Trouper> 같은 경쾌한 음악을 춤과 함께 소화해내는 한편 <Slipping through My Fingers> 같은 조용한 선율의 노래까지 멋지게 소화해낸다. 특히 이제는 떠나버린 사랑을 향해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를 때, 관객의 감정은 최고조에 달한다.
세 아빠 역의 캐스팅도 예상외의 결과다. 제작진이 ‘첫날 학교에 등장하는 겁먹은 소년들 같다’고 했던 남자배우들은 춤과 노래라는 이질적인 요소 앞에 공포감을 숨기지 못했다. 특히 왕년의 로맨티스트이자 건축가 샘으로 분한 피어스 브로스넌은 변화한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축 처진 뱃살을 드러내며 인간미를 과시한 그는 ‘맘마미아’와 메릴 스트립의 출연이라는 두 가지 사실만으로 덥석 출연을 승낙했다고 한다. “공연을 보러갔는데 함께 간 아이들이 무슨 역을 맡냐고 묻더라. 그제야 내가 역할도 물어보지 않고 승낙했다는 걸 알았다.” 작은 섬에 가서 한가로이 있을 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말쑥한 ‘본드’는 그리스의 작은 섬과 우연의 일치인지 <맘마미아!>의 세트장으로 사용된 007 세트장을 오가며 춤과 노래에 매진한다. <러브 액츄얼리>와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로맨티스트 콜린 퍼스는 지금은 꽉 막힌 은행원이지만 젊은 시절 자유분방한 여행자로 등장한다. 극중 동성애 코드까지 내비친 퍼스의 변신은 다시 못 볼 파격이다. 여기에 <캐리비안의 해적>의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자유로운 여행가로 등장, 세 아빠를 완성한다. 영화가 끝난 뒤, 이들이 다 함께 70년대풍 형형색색의 반짝이 의상을 차려입고 아바를 세상에 알려준 1974년 유러비안콘테스트 대상 수상곡 <워털루>를 부르는 ‘보너스 공연’은 코믹의 절정을 이룬다. 다행인 건 로이드 감독이 이들에게 “매끄럽게 잘 부르는 기교의 노래와 춤은 필요없다”며 노래 실력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 뮤지컬영화지만, 숙련된 기교보다는 캐릭터에 맞는 감정을 실어줄 배우가 필요했다.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대중을 위해 맞춰진 영화”라는 로저 에버트의 말처럼, 다소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들의 연기는 예상했던 대로 큰 웃음을 생산해낸다.
아바 월드의 착한 정서로 채색된 동화
<맘마미아!>에 내려진 평가는 대부분 ‘아쉽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크게 트집을 잡기에 아바의 노래가 불러들인 긍정적인 파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아바 월드’가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로 영화는 아바의 노래에 꿰맞춰진 채 착한 감정선을 전달하기에 급급하다. 아바의 노래에 의해서라면 모든 고민과 걱정은 사라진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딸과 엄마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이탈리아의 <맘마미아!>로 비교되는 멜빈 프랭크의 <애인관계>(1968)는 이탈리아 한 마을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2차대전 중 미군 병사 세명과 섹스를 하고 미혼모가 된다는 내용. 섹스 심벌인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처녀적 비행을 두고 딸은 엄마를 창녀 취급하며 급격한 갈등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빠를 모르고 자란 <맘마미아!>의 딸 소피는 세 남자와 함께 동침했다는 엄마의 일기장을 보고 곧 엄마의 젊은 시절 사랑을 핑크빛으로 채색한다. ‘머니 머니 머니’를 외치며 작업복 차림으로 숙소의 갈라진 바닥을 수리하는 도나에게 현실은 힘겹게 그려지지만, 그 역시 잠깐뿐이다. 결국 그곳은 사랑을 실현시켜줄 비너스의 샘이 솟는 낭만적인 장소의 시초에 불과하다. 친구들 사이의 수다에도 <섹스 & 시티>의 적나라함 대신, 도나에게 “너 남자랑 그거는 하니?” 하고 묻는 정도에 그친다. ‘아바 월드’의 착한 정서 속에서 <맘마미아!>는 아름답게 채색된 한편의 동화다. 관객은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과거의 젊은 사랑을 실현하는 도나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그리고 향수를 자극하는 아바의 노래가 주는 정서를 함께 더해 소비한다. 그래서 <맘마미아!>는 굳이 가혹한 현실을 제시할 필요가 없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