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광기와 다중인격이 빚은 동정 없는 세계
2008-10-16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무자비한 세계를 환기하는 아주 특별한 광기 <매드 디텍티브>

두기봉은 제의로서의 집단적 죽음이라는 결말에 종종 매혹되는 것 같다(<익사일> <미션> <대사건>). 하지만 그가 위가휘와 공동 연출한 <매드 디텍티브>만큼 그 제의적 결말에 모든 것을 거는 영화는 없었다. 난반사하는 거울 조각들, 잘못 쥐어진 권총들, 다성(多聲)과 다중 이미지의 중첩이 시청각을 교란하며 현란한 총격의 몽타주가 시작되면 이것이 죽음의 제의인데도 너무도 아름다워 혼돈의 군무처럼 느껴진다.

여기엔 <와일드 번치>류의 손상되는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 대신 모종의 종교적 엄숙함이 있다. 어두운 무표정이 표정의 전부였던 미친 형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머금은 채 힘없이 쓰러진다. 지금까지의 어지러운 사건들은 오직 이 순간의 한없는 숙연함을 위해 봉사한다. 물론 제의의 끝은 죽음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살아 있다. 이 숭고한 제의로부터 이탈한 인물. 그는 당연히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성립될까. 되짚어보자. 번 형사는 미친 사람이다. 하지만 초능력이 있다. 피살자가 죽을 때와 비슷한 상황을 조성해주면 그는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다. 그 초능력으로 많은 살인사건을 해결했지만, 이상 행동 때문에 형사직에서 쫓겨났다. 결정적인 해고 사유는 명시되지 않지만, 서장의 정년퇴임식 때 벌인 일과 관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귀를 즉석에서 잘라 퇴임선물로 건네주었다. 그는 그런 미친 짓을 한 이유가 “서장은 유일하게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어서 그랬다”고 나중에 설명한다.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무시무시한 총의 네트워크

우리는 곧 번 형사가 한 사람이 지닌 여러 인격을 볼 수 있는 별도의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그가 아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데 있다. 왕 형사를 살해한 것으로 밝혀지는 호 형사는 7개의 인격이 있는데, 번 형사는 그 인격을 7명의 사람으로 본다. 숨겨진 인격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격의 육체가 별도의 인간으로 보일 때, 그에게 세계는 지옥일 것이다. 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가 지옥일 것이다.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을 그가 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문을 쇠사슬로 칭칭 감고 은둔한다. 동시에 이 쇠사슬은 세상이 마련한 그의 감옥이다. 그런데 여기에 몇 가지 중첩된 혼란이 차례로 등장해 사태는 좀더 복잡해진다.

첫 번째 혼란은 그가 대상이 없는 공간에서도 대상을 본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이혼하고 떠났지만 그는 아내를 본다. 완전한 환각이다. 이때 관객인 우리는 번 형사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도 그것이 환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그는 진짜 아내 앞에서 그 환각의 아내를 향해 “당신은 그녀 눈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라고 말한다. 그도 우리만큼 알고 있다. 두 번째는 그가 대상을 그 대상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속한 다른 인간으로 본다는 것이다. 번 형사에게 왕 형사 실종사건을 의뢰해온 하 형사가, 하 형사의 다른 인격인 겁먹은 소년으로 보이자 번 형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이때 그는 관객은 물론이고 극중 인물이 보는 것조차 보지 못한다. 세 번째가 가장 혼란스러운 것인데, 그의 시선으로 포착되지 않은 프레임에서도 그의 눈에만 보이는 감춰진 인격의 인간들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이다. 앞의 두 혼란은 번 형사의 능력의 불안정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대상과 무관하게 자신이 보고 싶은 것(환각의 아내)을 보거나,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하 형사)을 보지 못한다. 세 번째 혼란은, 그의 능력의 불안정성을 카메라의 불안정성으로 떠넘기는 것이다. 물론 <매드 디텍티브>의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번 형사의 시선보다 우월하다. 그의 혼란과 무관하게 실재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어떤 지점에서 확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본연의 완전한 능력과 번 형사의 불완전한 능력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간다. 우리는 그가 언제 관객만큼 보고, 언제 극중인물보다 보지 못하는지 알 수 없다. 예컨대 번 형사는 호 형사의 일곱 인격이 하 형사의 겁먹은 소년을 살해하는 장면을 떠올리는데, 그것은 일어난 일도 아니며 일어날 일도 아니다. 그의 초능력과 무능력은 확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광기와 능력은 연원도 동기도 없다. 그는 특정 인물이기 이전에 텅 빈 존재 혹은 서사의 얼룩이다.

그가 퇴임하는 서장에게 자신의 귀를 자르는 행위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것이 “유일하게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이 영화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인격의 소유자를 지금 찬미하고 있는 게 아니다. 퇴임하는 서장은 그 전에도 후에도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그리고 번 형사도) 서장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여기선 자른 귀를 건네받는 상대가 아니라 오직 자르는 행위만이 중요하다. 범죄영화에서 신체의 일부가 건네질 때, 그것은 그 조각난 신체의 주인이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잘린 귀는 시체의 환유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것은 일종의 경고이며, 선물이 아니라 저주다.

반복하자면 이 영화는 범주화할 수 있는 특정한 ‘광기’에는 완전히 무관심하며, 행위와 사건의 계열만을 진열한다. 그러므로 번 형사가 왜 자신의 귀를 선물로 주었을까라는 질문은 대답될 수 없다. 다만 그의 이 괴이한 행위로 그가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귀를 잘라 건넬 때 그는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얻었다. 그가 해고되자 귀를 잘랐는지 혹은 귀를 자른 행위로 해고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귀 절단, 해고, 쇠사슬이 사회적 자살 혹은 추방의 계열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가 인조 귀를 달고 있을 동안 이 추방은 잠정적이다. 그러나 인조 귀는 언제나 좀더 쉽게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잘린 귀의 상징적 계열이 중요해진다.

매혹적인 혼돈의 군무 같은 현란한 총격신

그리고 총의 네트워크가 시작된다. 번 형사를 사회 안으로 다시 불러들인 건 그의 인간적 감정과는 무관하다. 이 영화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동정 혹은 분노가 전혀 묘사되지 않는 범죄영화는 찾기 힘들 것이다. 번 형사가 “왜 내가 자네를 도와야 하지?”라고 묻자, 하 형사는 자신에게 지급된 권총을 내민다. 그 권총은 한때 번 형사의 것이었으나 이제 하 형사의 것이다. 번 형사는 인조 귀를 달고 식료품점에 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속했던 총을 다시 소유할 순 없어도 지금 만질 수 있다면 사회적 삶도 잠정적으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불러내는 건 권총이다.

이것은 위험한 거래다. 형사에게 권총은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그것을 잃어버리는 건 사회적 죽음이다. 호 형사가 왕 형사를 살해한 이유는 호 형사의 권총 분실 사실을 왕 형사가 보고하려 했기 때문이다. 호 형사의 총은 쫓기던 인도인이 습득했고, 호 형사는 죽은 왕 형사의 총을 가진 뒤 총의 일련번호를 자기 것으로 조작한다. 그러나 총 자체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인이 그 총을 범죄현장에서 발사하는 순간 호 형사의 총임이 발각될 것이다. 호 형사는 필사적으로 그 총을 회수하려 하며, 다른 한편 호 형사의 다른 인격들은 왕 형사의 총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건네진 귀는 상징일 뿐이지만, 건네진 총은 실재를 물리적으로 변화시킨다. 하 형사는 번 형사로부터 자신의 총을 돌려받으려 하지만 번 형사는 뿌리치고 떠나버리고, 하 형사의 손에 남은 건 인조 귀다. 번 형사가 자신의 죽음을 잠정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던 인조 귀를 마침내 포기했을 때 그는 사실상 영구적인 죽음을 택한 것이다. 남은 건 총이다. 총들은 모두 잘못 건네져 있고 잠정적 소유자들은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총들이 제자리에 돌아오기 위해선 죽음의 쟁투를 벌여야 한다. 마침내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렀다.

폐건물에 네명이 모인다. 애인이자 동료형사인 지지의 총을 든 하 형사, 하 형사의 총을 든 번 형사, 왕 형사의 총을 든 호 형사, 호 형사의 총을 든 인도인.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거울들이 총격전 끝에 모두 깨지자, 그들 모두가 비로소 한 프레임에 등장한다. 총은 서로를 향해 겨눠져 있고, 죽음 같은 정적이 흐른다. 바닥의 깨진 거울 조각들에 비친, 네 사내의 다른 인격들이 모두 총을 겨누고 있는 부감숏에서 번 형사의 환시는 카메라의 환시로 이전되고, 다시 총성의 연쇄가 시작된다.

마지막 총성의 연쇄가 일어나기 직전 그들은 이상한 대화를 나눈다. 번 형사가 호 형사에게 말한다. “그게 너의 총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러자 호 형사가 대꾸한다. “당신 총도 하 형사 것이잖아.” 그리고 다시 하 형사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럼, 당신이 들고 있는 총은 누구 거야?” 그들은 지금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정의의 관점으로는 이곳의 누구도 죽을 이유가 없다. 가장 악랄한 호 형사마저 그의 총알은 바닥났으므로 그를 향한 총성은 멈춰야 했다. 그러므로 죽음 직전의 번 형사가 호 형사의 머리를 향해 마지막 방아쇠를 당길 때, 그것은 분노의 응징이 아니다. 그것은 총이 잘못 전해진 순간에 예정된 운명의 명령이며, 번 형사는 그 명령의 최종적 수행자다. 그는 텅 비어 있고 그것만이 그 수행을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가장 난처해진 것은 예정된 죽음의 제의에서 홀로 살아남은 하 형사다.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은 대단원의 제의가 아니라 뒤따르는 에필로그다. 그는 지지의 권총을 썼으므로 1차 알리바이를 위해 지지를 현장에 부른다. 그리고 2차 알리바이를 위해 시체들의 손에 쥐어진 총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애쓴다. 자신이 자신의 권총을 썼다는 것을 거짓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권총을 되찾은 뒤, 지지의 권총을 제외한 다른 두 권총을 세 시체의 손에 몇번 번갈아 쥐어본다. 그러다 얼어붙은 듯 멈춰 선다.

그는 이제야 알아차린다. 잘못 전해진 총들의 연쇄에서 홀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알리바이는 성립되지 않으며, 그의 면죄는 불가능하다. 총은 결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한번 불려나온 순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무시무시한 총의 네트워크. 미친 형사는 처음에 귀를 바치고 빠져나왔고, 두번째 불려나왔을 때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사는 것(귀를 바치고 유폐되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매드 디텍티브>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 세계의 무자비한 작동방식, 그 공포와 죽음의 기운을 아찔하게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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