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 홍당무>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고.
=고민도 하긴 했는데, 음… 그냥 영화 보고 나면 쟤가 왜 저걸 했는지 알 것 같다. 섣부르게 판단하기에는 영화가 좀… 오묘하지 않나. (출연 결정하기 전에) 이 사람, 저 사람, 주변 몇명에게 시나리오를 읽어봐달라고 했다. 도연 언니도 읽어봤는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한번 도전해보라고. 난 걱정도 많고 그랬는데, 걱정 말고 한번 해보라 그러더라고.
-남에게 권유할 땐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인데, 전도연씨는 어떤 점을 맘에 들어했나.
=여배우에겐 모험을 할 수 있는 영화여서 그랬던 것 같다. ‘안전빵’이 아니고. 여자들한테는 그런 영화가 잘 없지 않나. 근데 드물게 그런 영화가 왔으니까 한번 해보라고 그랬던 것 같다. 뛰어넘어보라고.
-‘안전빵’이 아니란 말의 뜻은.
=물론 비주얼적으로 많이 망가져야 하는 것도 있었고, 캐릭터 자체가 굉장히 비호감이라…. 왜 많은 팬들은 어떤 작품을 보고 그 캐릭터를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있잖나. 그러나 미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영화) 보니까 별로더라, 재수없더라.” (양미숙은) 너무 비호감이다 보니 싫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관객이 (어떤 배우의 출연작을) 작품으로만 보고 배우의 행보로 봐주지는 않으니까. 우선 감정적으로 그 캐릭터를 느꼈을 때, 사랑스러운 사람 내지는 불쌍한 사람, 못난 사람, 잘난 사람, 그럴 때 양미숙이란 인물은 (고개 돌리며) “어후…” 이렇게 보기 싫은 사람일 것 같고. 그래서 모든 평범한 배우들이 겁내는 거 있지 않나.
-배우 본인에게조차 연민이 쉽게 생기지 않는 인물이었나보다.
=감독님은 나에게, 끝내는 이 여자를 사랑스러운 여자로 만들고 싶다고 그러셨는데 나는 처음부터 그건 힘들 것 같다고 얘기했다. 사랑하기 되게 힘들다, 이 여자는. 그냥 남 일 구경하듯 보고 들으면 재미있어도 내 주변의 사람이라고 하면 같이 다니고 싶지 않은 여자일 것 같다. 대놓고 옹호하기에는 좀 별로란 거다. 근데 모든 상황을 봤을 때 (누구라도) 이 역할을 하게 되면 분명히 얻는 건 있을 거란 생각을 할 거다. 이 역할이 갖고 있는 복합적인 면 때문에 배우가 할 게 많다. 여배우들은 연기할 게 많은 걸 찾는데 실제로 그런 건 잘 없지 않나. 근데 얻은 만큼 잃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했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조금 만들어놓은 여성미라든지 “예뻐졌다”라는 평판이라든지 패셔니스타 같은 타이틀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니까 나는 얼마든지 영화에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고 관객도 그렇게 믿어주지 않을까 싶다가도 워낙 뇌리에 깊이 박히면 떼내기도 힘든 거니까. 그만큼 강렬한 캐릭터였고…. 내가 너무 딱인가 싶기도 했고…. (일동 폭소)
-인정하는 건가.
=(한숨) 그래, 누가 이걸 하겠어…. 완전 나한테 왔네, 나한테 왔어…. 못살아, 내가. 나 몰라, 어떡해, 막 이러고. (웃음) 첨엔 막 거부하고 싶었다. 아 몰라, 난 못해, 못해! 내가 이걸 해야 해? 근데 계속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는 거다. 매니저들, (싸이더스HQ) 박성혜 이사님…. 아 몰라, 생각 좀 해볼게, 자꾸 물어보지 좀 마, 그러고선 계속 미뤘다. 양미숙과의 결판을 미루고, 그러니까 내가 얘와 사투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갖고 계속 미뤘다. 찰거머리처럼 얘가 나한테 딱 들러붙은 느낌이었다. 그걸 떼어버리고 싶었다.
-이경미 감독은 배우 공효진을 양미숙 캐스팅 1순위로 생각했나.
=아니다. (다른 후보가) 꽤 많았다. 근데 감독님은 그거 안 얘기하려고 하더라. 예쁜 여배우들 몇명 있었다. 그중엔 나랑 매우 친한 누군가도 있었고. 그리고 그 언니는 사실 굉장히 심각하게 오랫동안 출연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영화가 너무 쉬고 싶어서 다른 것들은 거들떠도 안 보던 당시에 이 시나리오를 놓고 진짜 고민을 오래했다. 근데 전작에서 워낙 이상한 캐릭터를 했던 터라 바로 맡기엔 부담이 있었나 보더라. 그래서 나한테 “네가 해보면 잘할 거 같은데, 어때?” 하더라. 그래서 “언니, 진심이야?”(웃음) 그랬다. 첨엔 아주 예쁜 배우들한테 (시나리오가) 갔을 거다. 근데 예쁜 여배우들이 했어도 아마 감독님이 나만큼 망가뜨리셨을 거야. (폭소)
-양미숙을 어떻게 접근해갔나.
=처음엔 나도, 내가 보면서도 ‘어우, 추하다’ 그랬다. 영화 초반에 양미숙이 학교 담장 아래에서 삽질하면서 하는 대사들, 그거 보면서 정말 미친 여자 같았다. 감독님이랑 영화 찍으면서 중간중간 열심히 확인하고 넘어간 부분이 있다. 얘는 첨부터 이상한 애고 성격이 공격적이라 앞으로도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쏘아붙이고 싸움을 걸 거다. 근데 그건 사실 뻔한 리액션이다. 어떤 타이밍에선 그걸 꺾어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리액션이 아닌 다른 리액션. 그런 흐름을 만들어주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다. 남의 말에 무조건 반대를 찍고, 화를 내고, 그럼 사실 양미숙은 어떤 캐릭터보다도 더 예상하기 쉬운 캐릭터가 된다. 그런 리액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솔직하고 당차고, 꽂듯이 리액션을 했다면 이번엔 약간 반쯤 꼬아서, 남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에게도 퇴보가 아니니까. 나도 머물러 있는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양미숙의 리액션 부분에서 감독님과 의견 마찰도 많았고, 그만큼 서로를 신뢰했기 때문에 서로의 의견도 많이 수용했다.
-첫 촬영 들어갈 때 심정은 어땠나.
=현장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짜 백지상태였다. 10회차 찍을 때까지도 전날 잠이 안 왔다. 원래는 안 그러는데…. 굉장히 낙천적이다. (현장) 가면 해결되겠지, 에라 모르겠다, 대사 못 외워도 내일 외우지 뭐, 난 즉흥적인 스타일이야, 그랬거든. 준비하고 대사 달달 외우고 가면 외우고 준비한 그대로밖에 안 되니까. 난 입에 배어 있는 걸 금방 떨쳐버릴 수가 없더라. 게다가 현장에 가서 내가 어떻게 서 있을지, 화면 위에 있을지 아래에 있을지, 이게 어떻게 찍힐지 모르는 상황에서 달달 외워버리면 연기가 그것밖에 안 되니까 잘 안 외우는 편인데 이번엔 대충 아우트라인을 잡아놔도 전날 잠도 안 오고, 시험 전날 같은 느낌이 10회차까지 갔다.
-현장은 어떠했나.
=예산은 적고, 촬영은 40회차로 끝내야 하니까, 매회 24시간씩 갔다. 3회차 될 때까지만 24시간을 안 찍고 그 이후부터는 27시간을 시작으로 한번도 빠짐없이, 마지막 회차까지 24시간씩 찍었다. 그러면 촬영한 지 12시간쯤 될 때까진 몸이 힘들다고 생각한다. 15시간쯤 지나고부터는 그런 감각도 없고, 그냥 닭장 속에 몰아넣어진 쌈닭들처럼 다들 변한다. 근데 감독님은 또 “아무 거나 해봐요” 이래. 그럼 24시간째 촬영하고 있고, 짜증은 나 있고, 몸은 힘들고 그런데 양미숙 같은 사람을 하려니까 나중엔 고민하고 생각하고 이렇게 할 것도 별로 없고. 그리고 우리 감독님은 왜 그렇게 인물들이 프레임에 걸리는 걸 좋아하는지, 조금이라도 걸고 찍어야 한다. 머리카락이라도 나와야 하고, 손가락 끝이라도 나와야 해. (웃음) 게다가 나는 거의 매 순간 흥분 상태에 있어야 하고, 별별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다 있어야 했다. 체력 소모도 컸고, 정신적인 소모도 컸다. 근데 그런 와중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상한 컷들, 서로 감정적으로 막 몰렸을 때 나올 수 있는 보석 같은 컷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양미숙이 이해되나.
=너무나.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된다기보다는 그의 고통이나 슬픔이 이해가 된다. 영화에 보면 양미숙이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에 가서 기념촬영하던 회상신이 모두 세번 반복해서 나온다. 기술시사 때 중후반부에 나온 수학여행신 보면서부터는 갑자기 울컥해서 어깨를 막 들썩거리면서 울었다. 그 여자가 너무 불쌍해서. 찍을 땐 되게 웃으면서 찍었는데 막상 보니 너무 맘이 아파서.
-본인이 지금까지 해왔던 캐릭터들의 주된 모습을 볼 때 양미숙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나, 그것을 벗어났다고 보나.
=음. 글쎄…. 마침표 정도? 아니, 쉼표 전에 있는 단어? 그동안 직설적이고 굉장히 솔직한 캐릭터들을 해왔다. 어디서 굴러 떨어져도 구김살 하나 안 갈 것 같은 그런 캐릭터들. 그런 것의 종지부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종류를 더이상 안 하려는 건 아니니까 그 와중이란 뜻의 쉼표. 쉼표 다음으론 정말 약한 역할을 하고 싶다.
-확실히 양미숙이란 인물은 어떤 면에서 지금까지 공효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모든 캐릭터들의 결정판이다.
=20대 연기의 마지막이다. 스물아홉이거든. 철없이 할 수 있는 연기의 마지막. (웃음)
-지금까지 본인이 주로 해왔던 역할들, 본인 표현대로 강하고 구김 잘 안 생기는 여성 캐릭터가 본인에게 왜 많았다고 생각하나.
=내가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고, 그런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진 내가 갖고 있는 무언가를 자꾸 발휘해서 세보려고 했던 것 같다. 설사 내가 맡은 캐릭터가 원래는 그런 게 아니었다 하더라도, 막상 하게 되면 그런 캐릭터로 변화되어갔다. 예를 들어 <눈사람>을 만약 수정 언니 같은 사람이 했어도 다른 식으로 어울렸을 거다. 약한 듯하지만 강한. 근데 난 완전히 소녀가장처럼 비치지 않나. 분명히 (동일한 캐릭터를 다른 배우) 누군가가 하면 달라진다. 왜냐하면 (배우가 하는 걸 작가가) 보면서 (대본을) 쓰기 때문이다. 특히 드라마는, 그런 촬영 상황에서 배우에게 디렉션을 많이 할 수가 없다. 배우가 흡수한 대로 갈 수밖에 없더라.
-그러니까 배우 공효진에겐 드라마쪽이 본인의 성격을 반영한 캐릭터를 만들기에 매우 좋은 매체였던 셈이다. 그 때문인가, 필모그래피를 보면 2001년 <화려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배우 공효진이 줄줄이 히트를 쳤던 작품은 영화쪽보다 드라마쪽에서 더 많았다.
=영화보다는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 바보가 아닌 이상은 몇 작품을 거듭하는 동안 계속 내 성격만을 보여줄 수 없다는 걸 안다.
-아까 대답 중에 현장에서의 감을 중시해서 준비를 많이 안 해가는 편이라고 했는데. 원래 배포가 좀 큰 편인지. (웃음)
=낙천적이다. (웃음) 나는 순발력이 있는 사람이야. 나 자신을 많이 믿었던 편이다. 대사를 달달 외워 가게 되면, 현장 상황을 직접 접했을 때 나한테 다른 생각이 생기면 그걸 바로 적용하는 게 잘 안 되더라. NG를 계속 낸다. 사실 <상두야, 학교가자> 때까지는 현장에 띵가띵가 놀러다녔던 것도 같고. 그 무렵부터였나, 내가 주연을 맡고 신인배우들이 주위에 보이면서 책임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돈을 받는 만큼 뭔가 해야겠다고 분명히 생각하기 시작한 건 <가족의 탄생> 때부터였다.
-확실히 그 무렵의 인터뷰들을 보면 영화 <가족의 탄생>과 드라마 <고맙습니다>를 통해 연기관도 많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다.
=연기관 자체가 변하진 않았다. 다만 그전까지는 연기라는 게 내게 놀이 같았고, 현장은 놀이터 같았고, 즐거웠다, 행복했고. 그래서 이 일을 해왔던 건데 어느 순간부터 이건 진짜 피흘리면서 싸워야 될 공간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금방 그만둬야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꽤, 꿰뚫어본다, 이런 생각? 내가 아무리 “열심히 했어요”라고 얘기해도 내가 진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단 생각.
-어떤 30대를 생각하고 있나. 최근 몇개의 인터뷰를 보면 본인의 여성적 면모를 보여줄 때가 된 것 같단 얘기도 많다. 그건 공효진이 지금껏 쌓아온 것과 상반된 방향으로 보인다. 물론 그런 게 일부러 버린다 해서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우린 이미 30대 여배우로서 갈 길이 쉽게 짐작되는 비슷한 이미지들의 20대 여배우들을 충분히 보고 있다. 그들과 비슷해지는 건 본인도 원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20대 때와는 달라야 한다는 고민도 있을 터다.
=내 자신이 원하지 않는 만큼 사람들도 ‘너까진 안 그래도 돼’라고 생각할 거 같다. 그런 생각, 저런 생각, 많다. 아직도 뭔가 새로울 것 같고, 돌파구가 있을 것 같고. 희망적인 나이이기도 하잖나, 30대 직전이.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자 한 대로 사람들이 다 봐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어쨌든 새로운 예를 만들어보고 싶다. 보자마자 반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사실은 <미쓰 홍당무>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반했다는 거. 내가 하고 싶었다는 거. 내가 이런 못난이가 어울려? 그러면서 사실은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시간을 벌고…. (웃음) 인간이면서 배우일 수 있는 배우였음 좋겠다. 30대에도. 평범한 사람인 것 같은데, 스크린 안에서는 딴 사람 같았으면 싶고. 지금으로선 내가 앞으로 뭘 하게 될지 나도 판단이 안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