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하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혀온 유하 감독의 <쌍화점>이 12월16일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동성애 코드, 파격적인 노출, 70억원이 넘는 제작비 같은 수사로 포장됐던 이 영화가 마침내 알맹이를 공개한 것이다. 고려 왕조의 은밀한 내실에서 벌어졌던 사랑과 배신, 질투와 분노의 치정극이라 할 수 있는 <쌍화점>은 마케팅 과정에서 강조된 요소보다는 인물들의 감정이라는 영화의 기본 요소가 돋보이는 고전적 스타일의 영화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유하 감독은 잔기교를 부리지 않고 묵직한 직구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12월30일 개봉을 앞둔 <쌍화점>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유하 감독의 이야기 또한 함께 들어본다.
사랑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질투를 부르며, 질투는 분노를 야기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흔한 이 감정의 흐름은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등장해왔다. 어쩌면 인간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존재해왔을 원초적인 욕망의 발로는 이후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거듭 보여졌다.
유하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쌍화점> 또한 사랑과 집착과 질투와 분노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인간사에서 가장 흔하디 흔한 이 감정의 밀물과 썰물을 어떤 영화가 품지 않고 있겠냐마는 <쌍화점>이 이를 다루는 방식은 요즘 영화들과는 다소 다르다. 이 영화는 지극히 보편적인, 그래서 통속적이라 부르는 부조리한 인간관계를 한눈팔지 않고 집요하고 노골적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왕-홍림-왕비의 기묘한 삼각관계
<쌍화점>의 배경은 고려 말기다. 원나라의 강력한 포스에 짓눌려 있던 당시 고려는 왕을 보위하기 위한 친위부대를 꾸렸는데, 그것이 건룡위다. 하지만 건룡위는 또 다른 존재 이유가 있었다. 여성과 성관계를 가질 수 없는 왕(주진모)의 성적 유희를 위한 ‘인재 풀’ 기능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총명하고 미모가 뛰어난 홍림(조인성)은 왕의 경호실장인 건룡위 총관이자 잠자리 파트너로서 총애를 받아왔다. 원나라에서 고려로 온 왕비(송지효)가 홍림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홍림만 곁에 두고 있으면 세상 시름을 다 잊는 왕이지만, 골치 아픈 일이 있으니 그건 원나라의 압력이다. 왕비를 빌미로 부마국을 자처하는 원은 왕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을 트집잡아 친원파 인사를 후계자로 내세우려 한다. 친원파 대신들 또한 왕권 찬탈의 기회만 노리고 있다. 왕은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홍림을 왕후와 은밀하게 관계를 맺게 해서 아이를 만들어 세자로 책봉하려는 것이다.
애증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도 여기서부터다. 홍림은 정사를 나눈 왕비에게 어느덧 애정을 갖게 된다. 10여년을 독수공방해온 왕비 또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챈 왕의 질투심도 서서히 달아오른다. ‘왕의 남자’였던 홍림은 이제 그 품에서 벗어나 하나의 수컷이 되려 하고 왕은 이를 저지하려 한다. 하지만 길을 떠난 마음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정욕에 눈뜬 육체가 평정을 되찾기란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이제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쌍화점>의 매력은 이 기묘한 삼각관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양성애자인 홍림을 사이에 둔 왕과 왕후의 성 쟁탈전이자, 왕후의 남편인 왕과 애인인 홍림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륜극이며, 왕의 신하인 홍림과 원나라 출신 왕후 사이에서 이뤄지는 권력 다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핵심에 자리하는 요소는 성 정체성이다. 유하 감독은 시나리오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쌍화점>은 멜로드라마다. 멜로드라마 속에는 늘 신분, 제도, 조건, 윤리 등의 장애물이 존재해왔다. 그러나 모든 사회의 통념과 가치가 해체되고 다원화된 지금엔 그러한 장애물들이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적 긴장을 더이상 지속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멜로드라마 속에 존재하는 최후의 장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성 정체성이 아닐까 싶다.”
“멜로드라마 최후의 장애물은 성 정체성”
결국 유하 감독에 따르면 <쌍화점>은 ‘성 정체성을 넘어서는 사랑’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왕의 곁에서 자라온 홍림은 궁 바깥은커녕 왕의 내실 밖에서 잠을 자본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남성과의 애정이란 지극히 당연한 천성의 영역이었을 것. 하지만 여자와 잠자리를 갖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이성애자로서의 성 정체성을 발견한다. <쌍화점>의 발상은 동성애 이야기에서 흔히 등장하는 코드를 역으로 뒤집는 셈이다. 홍림이 스스로가 이성애자임을 밝힘으로써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는 설정 또한 이 묘한 역주행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쌍화점>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 최대 화두인 성 정체성의 문제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라는 유하 감독의 말마따나 영화는 단단한 서브플롯을 통해 운명의 삼각관계를 보완해낸다. 홍림과 왕후의 애정이 싹트는 계기는 정치적 압력이 마련해주며, 두 사람의 관계가 위기를 맞는 데는 왕후의 오라버니가 연관된 역모 사건이 영향을 끼친다. 왕이 둘의 애정행각을 알아차리는 것도 건룡위 부총관인 승기(심지호)의 질투심과 출세욕 덕분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잔가지들이 초점을 흐리지 않고 세 남녀의 감정의 접합과 충돌이라는 영화의 핵심을 강화해주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은 <쌍화점>의 큰 장점이다.
여덟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애정신 또한 감정의 진폭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갑작스레 보여지는 왕과 홍림의 정사신이나 회를 거듭할수록 농도가 짙어지는 홍림과 왕후의 섹스장면은 수위 면에서 <미인도>보다 더 적나라하고 노골적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흥행을 고려한 결과물이겠지만, 남녀의 감정 변화를 포착해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씨내리’라는 실용적 목적이 앞선 초반 섹스신이 ‘피스톤 운동’을 강조한다면, 애정 또는 육체 그 자체에 대한 탐닉에서 비롯된 후반부 정사장면은 다양한 테크닉이 난무하게 된다. 또한 이들 장면은 유하 감독이 묘사하고자 한 ‘축제와 죽음의 이중주’에 부합한다.
<미인도>보다 더 적나라한 섹스장면
<쌍화점>의 미덕은 영화의 요소 중 가장 원초적이고 단순한 인물들의 드라마에 온힘을 쏟는다는 데 있다. 특히 왕과 홍림의 갈등이 증폭되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카메라는 인물들의 얼굴을 화면 안에 꽉 채워넣는다. 이글거리는 눈빛의 충돌이 긴장감을 고양하고 잠시 흔들리는 시선이 내면의 동요를 반영하는 식이다.
근본적인 내러티브에 집중하는 이 영화의 미덕은 동시에 볼거리와 가쁜 호흡의 내러티브가 득세하는 현대의 상업영화계에서는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70억원대의 제작비가 든 대형 사극’이란 꼬리표가 붙은 <쌍화점>에는 더욱. 실제로 이 영화가 초반의 액션신과 거대한 연회장면 말고는 별다른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은 흥행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그보다도 이 영화의 승부수라 할 드라마가 후반부에 가서 다소 늘어지는 느낌을 준다는 점은 더욱 큰 문제일 수도 있다. 시사가 끝난 뒤 유하 감독이 후반부를 재편집하게 된 이유도 그러한 우려 때문이다.
편집을 통해 ‘구질 조정’에 들어갔지만, <쌍화점>의 승부구가 강렬한 드라마라는 직구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일단 이 공의 속도는 꽤 빠르고 코너웍도 나쁘지 않으며 무게감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기교파 투구가 득세하는 흥행이라는 경기장에서 유하 감독은 승리투수가 될 수 있을까? <실미도> <왕의 남자> 같은 정통파 투구가 먹혀왔으니 그에게 승산은 있는 편이지만, 그건 꽤 오래전 일이다. <쌍화점>은 한국 관객의 변모하는 취향을 다시금 파악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