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침묵의 라스트신’을 다시 보라
2009-01-15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긍정적 전망을 찾는 시도에 동의하기 힘든 까닭

짐 호버먼은 <이스턴 프라미스>를 “기적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 스토리”라고 불렀다. 다른 국내외 평자들도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희망 혹은 구원에의 소망을 발견했다. 하지만 나는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에 대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근심을 읽어내는 평문에 동의할 수 없듯이(<씨네21> 2007년 10월15일자),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긍정적인 전망을 찾아내려는 시도에 동의하기 힘들다.

이 영화가 크로넨버그의 가장 선명하고 직선적인 영화임은 부인할 수 없다. 사건은 시간순서대로 명료하게 배치되어 있고, 인물들은 고정된 역할을 배당받아 한정된 태도 안에서 움직인다. 적어도 <스파이더>에서 <폭력의 역사>를 거쳐 <이스턴 프라미스>에 이르는 도정은, 크로넨버그에게 환각의 시인이라는 별칭이 더이상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크로넨버그가 타락한 현실을 근심하는 윤리적 태도에 이끌린다기보다는 <폭력의 역사>에 그랬듯이, 여전히 차갑게 관찰하고 은밀하게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연 애도의 신인가

물론 <이스턴 프라미스>의 선한 의지는 분명하다. 런던의 조산사 안나(나오미 왓츠)는 러시아계 마피아 두목 세미온에게 강간당한 14살 소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를 끝내 살리려 했고, 마피아로 위장한 러시아 경찰 정보원 니콜라이(비고 모르텐슨)는 그녀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결국 냉혹한 마피아 두목은 체포됐고(이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기는 안나의 품에서 밝게 자란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화사한 결말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마지막 장면은 니콜라이가 홀로 앉아 있는 숏이다. 그는 근심에 찬 얼굴로 침묵하고 있다.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현듯 등장한 어둡고 기나긴 침묵. 많은 평자들은 이 장면을 전 장면의 밝은 분위기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모호한 결말이라고 지적했지만, 나는 그 침묵으로부터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두 장면은 밝음과 어둠의 대립보다 훨씬 복합적인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침묵의 라스트신에는 아기의 죽은 엄마의 일기가 다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내 이름은 타티아나다. 아버지는 마을 광산에서 죽었다. 숨을 거둘 때 그는 이미 묻혀 있었다. 실은 우리 모두 거기에 묻혀 있었다. 바로 러시아의 흙 아래. 그래서 나는 떠났다.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이 내레이션은 영화의 초반부에 나왔던 죽은 14살 소녀의 일기의 첫 부분이다. 처음의 내레이션이 사건이 종결된 뒤 마지막 장면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애도의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애도가 왜 그 소녀를 본 적도 없는 니콜라이의 침묵과 동반되고 있는가. 나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이가 앉아 있는 장소는 ‘트랜스 시베리아’ 식당, 바로 마피아 ‘보리 브 사코니’의 본거지다. 그는 아마도 그의 계획대로 조직의 보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시간의 경과다. 침묵의 라스트신 직전 장면에서 안나의 가족이 그 불행한 아기를 “우리 귀여운 러시아 인형”이라고 부르며 정성껏 돌보고 있다. 그런데 아기는 꽤 자라서 돌이 지난 것처럼 보인다.

크로넨버그는 이 장면에서 시간의 경과를 은밀히 알려준다. 이 영화의 자연스러운 종결은 아마도 템스 강의 외진 둑에서 안나와 아기, 그리고 니콜라이와 키릴이 교차하는 그 직전 장면일 것이다. 아기는 마침내 구출되고 키릴의 아버지이자 마피아 보스인 세미온의 체포는 예견되며, 사건은 사실상 여기서 마무리된다. 그런데 굳이 1년이란 시간이 지난 시점의 아기를 보여준 뒤, 비로소 라스트신이 도착하고 침묵 속에서 죽은 소녀의 첫 내레이션이 다시 흘러나오는 것이다. 여기엔 어떤 사건도 없다. 그러므로 사족처럼 보이는 이 마지막의 두 장면은 일종의 도돌이표로 봐야 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원점으로의 회귀를 뜻한다기보다 관객에게 도대체 무엇이 변한 것인가라고 되묻는 질문에 가깝다.

크리스틴에게서 아기 예수를 읽는 시각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트랜스 시베리아’ 식당의 존재가 환유하는 마피아 조직은 그 자리에 건재하다. 다만 보스의 자리를 ‘착한 러시아인’ 니콜라이가 대체했을 뿐이다. 그가 침묵할 때, 그는 마치 왜 나는 이 자리에 여전히 있는 것인가, 라고 자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 압도적인 것이 그를 붙들어두고 있을 테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어린 창녀가 죽고 그녀가 낳은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서사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변화다. 더없이 낙관적으로 보이는 이 변화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고서 니콜라이의 침묵을 대면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우리가 긍정할 만한 해결이며 결말인가.

내가 읽은 이 영화에 관한 국내외 비평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장병원의 ‘장르의 철학자, 크로넨버그의 예수 탄생 스토리’(<필름2.0> 2008년 12월3일자)다. 그는 이 불행한 아기 크리스틴에게서 아기 예수를 읽어낸다. “태생의 비밀이 감춰진 사생아를 떠맡은 여인과 그녀의 조력자가 하늘의 뜻을 입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세력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낸다는 소략한 스토리 라인은 아기 예수를 제거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메시아를 지켜낸 자들을 기록한 성서적 사실과 정확하게 조응한다.”

이 비평은 <이스턴 프라미스>가 아기예수 서사의 느슨한 패러디라는 점을 적절하게 상기시킨다. 하지만 아기예수 서사와 크리스틴의 이야기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물론 위의 비평도 “우리가 사는 세계의 동정녀는 가련한 10대 매춘부다. 성서적 사실과 현실의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타락한 세계의 초상을 웅변하고 있다”라고 그 차이를 언급하지만, 나는 그 간극이 좀더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간극은 아기의 모태가 매춘부의 몸이라는 데 있다기보다 그 수태가 죄악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크리스틴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냉혹한 마피아 두목 세미온이 14살 소녀를 강간해 낳은 아기다. 물론 범죄자에게 강간당한 매춘부의 아기라고 해도, 그 아기에게 어떤 타락과 죄악의 표지를 보는 건 전적으로 부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신성을 부여하는 것도 과잉 해석이다.

우리가 이 아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 안에서의 내적 관계일 뿐이다. 범죄의 증거라는 이유로 살해당할 뻔했던 크리스틴은 이제 러시아의 피를 지닌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면에서 안나의 가족이 아기를 “우리 귀여운 러시아 인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안나의 삼촌 스테판이 영화의 초반에 안나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안나의 헤어진 애인에 대해 “흑인이니까 그래. 피가 나빠. 그러니 도망가는 거야”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피를 섞으면 안돼. 그건 옳지 않아. 아이가 너의 뱃속에서 죽은 것도 그 때문이야.” 그토록 무시무시한 말을 했던 이 늙은 러시아인은 지금 아기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다. 범죄의 증거였던 유전자가 이젠 지극한 보살핌의 이유가 된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표면적 플롯은 무구한 아기를 구하기 위한 선과 악의 대결이지만, 그 아래에선 순혈주의 혹은 오염된 피에 대한 공포가 무자비하게 작동한다. ‘보리 브 사코니’는 러시아 순혈주의 마피아 집단이다. 보스의 아들 키릴이 청부살해를 명한 건 그가 동성애자라고 놀림받았기 때문이다. 혈통의 계승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성애는 순혈주의자에겐 혼혈만큼 저주받을 짓이다. 세미온은 아들 키릴의 분별없는 청부살해를 책망하다가 그것이 키릴의 동성애 소문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입을 닫는다. 그에게 런던은 “창녀와 동성애자의 도시”이고 아들이 이 도시의 나쁜 피에 감염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경찰이 증거수집을 위해 그의 피를 뽑아가자 “동성애자와 마약중독자에게 꽂았던 주삿바늘을 썼을 거야”라고 주절거린다.

순혈주의의 은밀한 실현

크로넨버그의 많은 영화는 인간의 육체와 비인간의 육체와의 교접에 관한, 그러니까 기계 혹은 곤충과 인체가 뒤섞이는 순간의 매혹과 공포에 관한 영화다. 그는 그 공포를 그로테스크한 매혹의 양상으로 탈바꿈시키는 독창적 방식으로 정상성에 대한 관객의 감각을 충격한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사내들은 크로넨버그식 교접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이 빌어먹을 러시아놈” 혹은 “더러운 체첸놈들”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비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인종의 피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 마피아 집단의 전통인 문신은 피의 외연적 확장이다. 그 문신은 태어난 곳, 수감된 감옥에서부터 집단 내의 서열까지 표현한다. 육체에 새겨진 흔적인 문신은 육체를 더욱더 폐쇄시킨다. 니콜라이의 문신이 갈라져 피가 솟구치는 목욕탕에서의 나체 격투신이 심원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맨몸의 격렬한 육체성 때문이면서, 동시에 피와 문신의 중첩된 상징성 때문이다. 피와 물질적으로 결부된 장소인 그들의 고향은 그들 모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추위와 고통의 땅이지만, 그들의 육체는 낯선 땅에서 더욱 견고하게 닫혀 있다.

문제는 그 폐쇄성을 이 영화의 마피아들과 평범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의 많은 대사들은 두 세계를 구분짓는다. “여기는 우리 세계가 아니야. 우린 평범한 사람들이야”(안나의 어머니), “나 같은 사람 근처에 오시 마시오. 당신이 속한 착한 사람들한테 돌아가요”(니콜라이). 하지만 두 세계는 멀지 않다. 안나가 속한 세계의 삼촌 스테판은 자신이 전직 KGB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순혈주의자다. 고난의 아기는 마침내 ‘착한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와 러시아 인형으로 건강하게 자란다. 그런데 그곳은 얼마 전 검은 피가 섞인 태아가 죽었던 장소다.

이것은 잔혹한 자리바꿈이며, 순혈주의의 무자비한 소망의 뜻하지 않은 그리고 매우 은밀한 실현이다. 이 장면의 정상성과 선함의 화사함 속에는 제어되지 않은 독이 퍼져 있다. 그 반대편에서 마피아 조직은 나쁜 보스에서 착한 보스로의 자리바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조직은 지속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두 장면은 바로 두 자리바꿈의 대비이며, 오염된 피의 모티브와 아기 구하기라는 모티브의 지위는 여기서 역전된다. 사건이 종결된 뒤, 선한 세계는 은밀하게 악화되고 악한 세계는 미온적으로 개선된다. 그리고 니콜라이는 연원을 알 수 없는 침묵에 빠져 있다. 크로넨버그는 선한 의지의 승리처럼 보이는 이야기로 우리를 만족시킨 뒤,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더 깊은 불안에 빠트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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