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안젤리나 졸리] “하지만 끝은 내가 내겠어”
2009-01-16
글 : 정재혁
모성으로 무장한 철의 여인, <체인질링> 안과 밖의 안젤리나 졸리

브란젤리나의 절반. 안젤리나 졸리는 지겹다. 그녀의 기사는 타블로이드지의 단골 메뉴고, 일거수일투족은 기사를 넘어 파파라치 사진으로 매일같이 보고된다. 미디어 속 안젤리나 졸리를 보면 가십이 이렇게나 다양하고 많이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 싶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녀는 연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배우였다.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작인 <처음 만나는 자유>(1999)와 슈퍼모델 지아 카라니의 자전적인 삶을 그린 TV영화 <지아>(1998). 그녀는 20대의 한복판을 고민, 외로움과 함께 보냈고, 이후에도 바보 같아 보이는 액션물의 실패, 여전사의 이미지만 크게 심어준 <툼 레이더> 시리즈 사이에서 작가 감독들과 꾸준히 작업했다. 그리고 2008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만나 <체인질링>을 찍었다. 아들을 잃은 뒤 책임과 희망에 대해 고민하는 <체인질링> 속 그녀는 그 언제보다 스크린 밖 졸리의 모습과 가까워 보인다. 여섯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 유엔 친선대사이자 셀러브리티, 그리고 배우인 안젤리나 졸리. 온갖 희비를 다 겪어, 이젠 철의 여인처럼 되어버린 그녀는 어떤 삶을 지나온 걸까.

“2001년 <툼 레이더>에서 존(존 보이트,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과 함께 출연한 뒤 2002년 7월 법정에 이름을 바꾸는 신청을 했다. 그리고 12월 공식적으로 내 이름에서 보이트를 없앴다.”

안젤리나 졸리 보이트. 안젤리나 졸리의 본명은 그녀의 아버지 이름 보이트까지 포함한다. 배우인 존 보이트와 역시 배우가 되고 싶었던 엄마 마셸린 베트란드 사이에서 태어난 안젤리나 졸리는 ‘보이트’란 이름 때문에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76년 부모가 결별한 뒤 오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졸리는 아빠인 존 보이트를 ‘항상 멀리 있는 존재’라 생각했다. 있다가 사라진 그 이름의 자리에서 그녀는 고독에 빠졌고 자기 세계 안에서 혼돈을 거듭했다. LA로 이사가 스트라스버그 시어터 인스티튜트에 등록해 연기를 배우면서도 그녀는 “베버리힐스의 풍부한 가족들 사이에서 고립을 느꼈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 엄마의 모습과 헌옷을 입었다고 따돌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졸리는 도망가지 못했다.

독일계인 아버지, 프렌치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 덕에 얻은 ‘독특한 외모’도 어릴 땐 모두 콤플렉스였다. 안젤리나 졸리는 모델 일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이후 자괴감에 빠졌다. 칼과 날카로운 도구들을 모아 자해도 했다. “나를 자르며 고통을 느끼면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 편안했다. 그건 일종의 치료였다.” 연기 학교를 나와 한때 장의사가 되려고도 했다. 검정색 옷을 입고 머리는 보랏빛으로 염색하고 동거 중이던 남자친구와 춤을 추며 지냈다. 그녀에겐 어두운 현실보다 보이진 않지만 편안해 보이는 죽음이 더 가깝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엄마와 함께 지내면서 연기에 대한 꿈은 다시 잡았지만, 안젤리나 졸리는 수편의 뮤직비디오, 저예산 B급영화 <싸이보그2>, 첫 할리우드 데뷔작인 <해커스>를 찍기까지 ‘음침함과 어둠’에 파묻힌 생활 속에 있었다.

“나를 배부르게 한 것들은 나를 파괴한다.” _졸리의 문신 중 한 구절

졸리가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빛을 받기 시작한 건 1997년작 <조지 월러스> 이후다. 졸리는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의 일대기를 담은 TV영화 <조지 월러스>에서 조지의 두 번째 아내를 연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에미상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고, 다음해 또 다른 TV영화 <지아>의 주인공을 꿰찼다. 섹스, 마약, 에이즈 등이 뒤섞인 슈퍼모델 지아 카라니의 삶을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는 이 영화로 자신이 겪었던 젊은 시절의 혼돈을 모두 털어놓았다. “나와 공유하고 있는 게 많았다. 그냥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온몸을 떨며 긴장과 안도, 광기와 침울 사이를 오가는 졸리는 매우 강렬했고, 그녀가 연기한 지아는 스크린 속에서 아름답게 무너져내렸다.

이후 안젤리나 졸리는 “더이상 보여줄 게 없다”며 뉴욕대학에서 영화 연출과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내 자신을 컬렉트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그 충전이 끝난 뒤 그녀는 갱스터영화 <헬스 키친>, 숀 코너리, 라이언 필립과 함께한 <플레잉 바이 하트>, 마이클 뉴웰의 코미디 <푸싱틴>, 제프리 데버의 소설을 옮긴 <본 콜렉터> 등을 쉴 틈 없이 찍었다.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지만 ‘일종의 공부와 시험’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1999년 안젤리나 졸리는 <처음 만나는 자유>를 만났다. 수사나 카센이란 여자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에서 졸리는 정신병자 리사 로웨를 연기했다. 현실과 도피, 망상과 환상을 오가는 또 한번의 경험이었고, 졸리는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와 스크린 액터스 길드 어워드,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창백한 공간 속 졸리의 모습은 <버라이어티>의 평처럼 “현란하지만 무책임한 소녀로서 완벽하고 훌륭했다”.

“졸리는 라라 크로프트를 연기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녀는 액션 그 자체다. 감독이 그녀의 여행을 단순한 프로거 게임으로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졸리는 훌륭하다.” _<슬란트 매거진>의 기사 중

브란젤리나 이전까지 안젤리나 졸리는 그냥 할리우드의 새로운 여전사였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를 잇는 그냥 육체파 여자 배우였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옛 여자친구 역할로 출연한 2000년 여름 블록버스터 <식스티 세컨즈>는 세계적으로 2억3700만달러를 벌어들였고, 안젤리나 졸리는 단숨에 액션스타 대열에 들어갔다.

다음해 개봉한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는 안젤리나 졸리가 액션스타로서 탄탄한 입지를 챙길 수 있게 도와준 결정적 히트작이다. 비평들의 만장일치 악평에도 <툼 레이더>는 박스오피스에서 2억7500만달러를 챙겼고, 비중이 작아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던 <식스티 세컨즈> 때와 달리 졸리는 마셜 아츠와 영국 악센트를 훌륭하게 구사하며 여전사로 완벽하게 새로 태어났다. 1편보다는 못했지만 2003년 발표된 <툼 레이더> 시리즈 2편 <툼 레이더: 판도라의 상자>도 전세계적으로 1억56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스타로서의 졸리의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했다.

<지아>(1998)
<툼 레이더>(2001)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2005)
<마이티 하트>(2001)

안젤리나 졸리의 여전사 캐릭터는 이후 에단 호크와 함께 출연한 스릴러물 <테이킹 라이브즈>의 FBI 요원을 지나 2005년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2008년 마크 뮐러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원티드>로 이어진다. 현재의 배우자인 브래드 피트와 함께 출연한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는 첩보물과 코미디를,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라는 두 스타를 적절히 섞어 큰 흥행을 맛봤고, 졸리는 무엇보다 큰 수확인 브래드 피트를 얻었다. 그리고 관객은 <오리지날 씬>(2001), <어느날 그녀에게 생긴 일>(2002)로 주춤하던 안젤리의 건재함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 사이에서 졸리는 진지한 작품에 대한 고민도 계속했다.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한 <굿 셰퍼드>, 그리고 마이클 윈터보텀 영화인 <마이티 하트>. 배우로서 안젤리나 졸리가 돋보인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미세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졸리는 이후에도 자신의 관심사를 영화로 표현했다. 2007년엔 27곳의 장소에서 일주일간 벌어지는 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 영화도 한편 만들었다. 제목은 <A Place In Time>이다.

“<비욘드 보더스>를 하면서 나는 많이 긴장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때까지 몰랐던 공간의 사람들, 그들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나는 그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훌륭하게 서로를 돕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나는 20대보다 지금 더 와일드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릴(Reel) 라이프가 리얼(Real) 라이프가 되었다.” 안젤리나 졸리가 난민 구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툼 레이더>를 촬영하면서다. 캄보디아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그녀는 난민 캠프를 방문했고 촬영 도중 시에라리온과 탄자니아를 다녀갔다. 2001년 여름엔 유엔 난민기구의 친선대사로 임명됐고 이후 수도 없이 전쟁으로 황폐화된 지역의 난민들을 찾아다녔다.

<비욘드 보더스>(2003)
<알렉산더>(2004)

2003년엔 영화 <비욘드 보더스>에 출연해 구호 요원이 되기 위해 평온한 삶을 포기하는 여자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녀는 캄보디아에 두 번째 집을 두고 “그동안 몰랐던 곳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그곳의 암울한 현실을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시에라이온에서의 일주일을 그녀의 “삶 전체를 바꾼” 시간이라 떠올리고, 까마득해 보이는 이 지구촌 문제를 두고 “이젠 돈을 버는 목표를 발견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유엔 친선대사로 일하는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은 흡사 할리우드의 마더 테레사 같기도 하다. 2006년 만든 졸리/피트 재단은 국경없는 아이들을 위해 매년 전세계적으로 100만달러를 기부하고 있고, 졸리는 ‘아이들 분쟁을 위한 교육 파트너십’의 공동회장이기도 하다. 이들의 기부 목록은 끝이 없다. 할리우드 스타의 엄청난 자선 활동은 빈민 국가들의 큰 환대를 받는다. 안젤리나 졸리는 첫 번째 아이를 낳으면서 나미비아 정부의 엄청난 지원과 경호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셀러브리티로서의 생활과의 간극을 이유로 비난도 피하지 못한다. 빽빽한 가십 속에서 졸리의 선행은 또 하나의 신선한 타이틀일 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어쩌면 안젤리나 졸리 자신을 괴롭혔던 가족에 대한 결핍의 결과물인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다녀간 캄보디아, 에티오피아, 베트남에서 맺은 새로운 인연을 책임이란 단어로 설명했고, “과거엔 내 드라마에만 집중했는데 이젠 시야가 넓어졌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졸리의 스크린 안, 그리고 밖에서의 모습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그녀의 노력일지 모른다.

“매독스가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 인터넷으로 내 이름을 찾고 몇몇 섹시한 사진들을 볼까 사실 겁난다. 또 매독스에 대한 거짓 기사들을 볼까 두렵다. 설명해줘야 할 게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DVD를 함께 보는 즐거움은 참을 수 없다. 엄마, 아빠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웃음)”

<체인질링>의 초반 한 장면. 안젤리나 졸리가 연기한 크리스틴 콜린스는 아들 월터에게 말한다. “싸움을 먼저 일으키진 마. 대신 끝은 너가 봐.” 크리스틴 콜린스는 자식이 태어났단 사실이 두려워 집을 떠난 자신의 남편을 돌아보며 아들에게 책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책임이란 덕목은 이후 콜린스를 강하게 만든다. 콜린스는 뉴욕 경찰과의 싸움을 아들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간다. “이 싸움을 시작한 건 내가 아니라 신이야. 하지만 끝은 내가 내겠어.” 이 대목은 안젤리나 졸리의 실제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뉴욕에서 열린 2007 클린턴 세계 정상 컨퍼런스에 참석한 안젤리나 졸리.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그녀는 두 번째 남편 빌리 밥 손튼과 살면서 캄보디아 출생 아들 매독스를 입양했고, 그와 헤어진 뒤엔 에티오피아에서 딸 자하라를 데려왔다. 세 번째 배우자 브래드 피트와는 2006년 여름 딸 실로 누벨 졸리 피트를 낳았고, 다음해 3월엔 베트남에서 남자아이 팍스를 입양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졸리는 쌍둥이 녹스 레온 졸리 피트와 비비안 마셸린 졸리 피트를 낳았다. 캄보디아에서 찍은 영화 <툼 레이더> 이후 시작된 난민문제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졸리는 어느새 여덟 가족의 안주인이 되었다.

스크린 밖으로 확장되던 그녀의 영화 속 삶은 이제 가족에게 그 자리를 내어줬다. 졸리는 영화든 현실이든 모든 걸 가정이라는 가치에서 판단한다. 그녀가 <체인질링>을 시작하며 가장 크게 매달린 건 촬영을 시작하기 얼마 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였다. 졸리는 <체인질링>의 콜린스에게서 힘들게 가정을 이끌었던 어머니 마셸린을 보았고,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보았다. “크리스틴과 내가 엄마에게 동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아마 엄마는 소리 지르기조차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도 몰랐던 자기의 힘을 발견했다.” 졸리는 한마디 지시없이 카메라를 돌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현장에서 “고갈되었고, 뭔가를 간절히 원했던 자신”을 풀어놓았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감정적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들을 맞이하면서 졸리는 본인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강한 어머니를 완성했다. 안젤리나 졸리에 대한 기사에서 그녀는 여자배우들과 비교되는 일이 거의 없다. 졸리의 커리어는 오히려 알 파치노, 잭 니콜슨과 함께 설명된다. 그녀는 단 한번도 미국의 연인이었던 적이 없고, 대신 책임과 믿음으로 무장된 철의 여인이었다. 스스로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책임, 나아가 세계의 문제들을 공유해야 한다고 믿는 안젤리나 졸리의 모성은 수많은 가십과 노이즈를 뿌리치고 그녀를 할리우드에서 가장 강한 여인으로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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