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모래 알갱이로 뒤덮인 구릿빛 등. <마린보이> 포스터 속 김강우는 시선을 맞추려는 두 배우와 달리 뭔가를 감추려는 듯 혼자 뒤돌아 서 있다. 마약을 몸속에 숨겨 운반하는 신종 마약운송책, 마린보이. 국내 최초의 본격 해양액션물이라 할 만한 이 영화는 애초 주연배우의 육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얼핏 성실한 인상에 은근히 고집스러운 이목구비의 소유자가 30대 첫 영화로 결정하기엔 무리수 아니었을까 싶은데 김강우는 자신의 성품이 천수처럼 가볍다고 주장하고 싶은 눈치다. “어떤 상황에서든 쿨함을 유지하고 싶었어요. 말투도 평소대로 했어요. 저는 정말 착한 역할을 하기가 힘들어요. 정말로요.”
뱃사람들도 안심하지 못하는 바다가 주된 놀이터였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고난의 연속이었음은 뻔한 일. 그럼에도 제 나이의 매력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싶어 끌렸다니 자맥질 꽤나 했겠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수영을 하나도 못해 발차기부터 시작했”단다. “갓난아이가 걸음마부터 배워서 3개월 안에 100m 달리기를 해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광기어린 선임병에 맞선 겁없는 군인(<해안선>)으로 데뷔한 청년은 <실미도> <태풍태양> 등을 두눈 부릅뜨고 관통하면서 하늘 같은 선배들과 맞붙는 와중에도 자기 것을 잃지 않는 방법을 일찍이 터득했다. 장동건, 설경구, 정재영, 최민식, 임원희 등을 두루 거쳐 맞닥뜨린 적수는 강 사장 역의 조재현. 마약계의 큰손인 강 사장은 유리(박시연)를 마음에 두고 있기에 천수와 대적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김강우 역시 중심을 잡아가는 건 자신과 “재현이 형”이라고 했을 만큼 두 수컷 사이의 화학작용이 중요했다. “강 사장은 강하면서도 노련하게 저를 옥죄는 캐릭터잖아요. 15살 많은 그런 남자와 붙었을 때는 은근슬쩍 패기를 보여줘야 해요. 천수는 젊음이 무기인 캐릭터니까.”
취미가 없다고 반복해 답하던 김강우는 의아하게도 무언가를 마스터해야 하는 역할에 자주 낙점되곤 했다. <마린보이>가 그를 수영장 깊숙이 밀어넣었다면, <식객>은 그에게 식칼을 쥐게 만들었고, <경의선>은 어두컴컴한 지하 터널 속으로, <태풍태양>은 뜨거운 인라인스케이트의 세계로 그를 안내했다. 익숙한 길을 가도 괜찮겠다 싶을 때마다 <태풍태양>에서 <경의선>으로, <식객>에서 <가면>으로 걸음을 옮겼고, 새로운 표정들을 건져올렸다. 그런데 정작 그는 자신이 “그렇게 똑똑한 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매번 떨리고 매번 자신없고 매번 힘들고. 요즘엔 예민함이 있기에 배우 생활을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변함없이 완고한 이 남자의 다음 선택은 <오감도>. 에로스라는 소재 아래 다섯 감독들이 함께 모인 옴니버스영화다. “남편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아내가 숨어버려요. 몽환적이고 몽롱한 이미지가 좋았어요.” 폐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바다를 유영하던 그 사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오감도>의 기억까지 마저 털어낸 김강우가 인사를 건넨 뒤 두터운 코트 주머니에 두손을 밀어넣었다. 문득 내년 겨울엔 그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들지 즐거이 상상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