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다큐멘터리
2009-02-12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잔상과 여백의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지아장커의 <24시티>

무너져가는 공장 안에서 혹은 곁에서 8명의 노동자가 공장에 얽힌 사적인 기억을 말한다. 마오쩌둥의 전술적 배치로 1958년에 건립되어 50년 동안 지탱해왔던 청두의 군수공장 ‘팩토리420’은 이제 곧 철거되고, 그 자리엔 ‘24시티’라는 이름의 현대적 주거 타운이 조성될 것이다. 노동자들의 말을 듣는 것 외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이 아찔한 변화의 한가운데 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작업에서의 핵심은 주관적 판단”

<24시티>는 지난해 8월에 열린 시네마디지털서울의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감독 지아장커는 이 영화제의 국제감독 심사위원단의 일원이기도 했다(이 영화제에는 ‘국제감독’, ‘국제비평가’, ‘국내비평가’, ‘관객’의 네 심사위원단이 있다). 감독들의 수상작 선정회의가 끝난 뒤에 회의에 동석했던 정성일 집행위원장로부터 지아장커가 한 말을 전해 들었다. 네 심사위원단 회의에서 모두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된 두 중국 다큐멘터리에 대해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이렇다. “다큐멘터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다림(waiting)의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making)의 다큐멘터리이다. 두 중국 다큐멘터리는 기다림의 다큐멘터리이다. 두편 모두 기다림의 끝에 훌륭한 장면들을 찍었지만, 나는 구축의 다큐멘터리를 보기 원했다.”

이 견해에 누군가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이 말은 적어도 지아장커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방식에 대해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 그는 다큐멘터리가 대상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를 함께 기록하기 때문이다. 전작인 다큐멘터리 <무용>을 찍고 나서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핵심은 주관적인 판단이다. 현실은 가까이 놓인 카메라의 출현으로 왜곡될 수 있다… 픽션을 찍을 때, 나는 언제나 배경 속에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어떤 객관성을 유지하길 원하다. 그러나 내가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나는 현실 속의 고유한 드라마를 포착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의 주관적인 인상이 충실히 표현되기를 원한다.”

<24시티>가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아장커의 다큐멘터리론의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될 것이다. 그 시도는 이미 <스틸 라이프>에서 부분적으로, 그리고 <무용>에서,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씨네21> 655호 ‘어떻게 대상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24시티>에 이르면 지아장커는 주관적 인상조차 명료한 의미로 전달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그는 대상의 명료성을 교란하거나, 말하기를 멈추거나, 프레임을 비워둠으로써, 대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상에 대해서도 모호성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것 같다.

우리에게 다르게 보기를 요청한다

지아장커의 주관성 옹호를 문자 그대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24시티>를 만들기 위해 그는 130명의 노동자를 인터뷰했고, 1년의 시간을 현장에서 보냈다. 그는 이 다큐멘터리의 출발점이 ‘역사적 호기심’이라고 말했다. 지아장커는 여전히 굳건히 기록자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는 역사가가 아니다. 그가 관심을 지닌 대상은 정리된 관점의 역사가 아니라 복수로서의 사적 기억들이다. 지아장커는 기억들을 기록한다. 그러나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기억들 사이로 빠져나간 삶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나아가 공간의 기억과 표정을 새기려 한다. 이 시도가 <24시티>를 잔상과 여백의 다큐멘터리로 부를 만한 어떤 경지로 이끈다.

<24시티>는 얼핏 보기에 단순한 다큐멘터리이다. 여기엔 각 세대와 계급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8명의 노동자의 인터뷰가 차례로 등장한다. 이들의 구술에만 주목한다면 <24시티>는 매우 심심한 다큐멘터리가 될지도 모른다. 50년의 역사, 문화대혁명 그리고 전 중국을 뒤흔든 숙청과 처형과 하방, 중국-베트남 전쟁과 천안문사태, 자본주의를 향한 미칠 듯한 질주에 이르는 그 숨막히는 소용돌이의 시간을 감안하면 이들의 구술은 오히려 지나치게 담담하거나 사소한 편이다. 더 중요한 건 그 8명 중 4명은 배우라는 사실이다. 누구보다 가슴 아픈 기억을 전한 하오다리 역시 배우 루리핑이 맡았다. 실제 노동자들 틈에, 널리 알려진 배우가 노동자를 가장하고 나와 드라마가 아닌 구술로 자신을 고통스런 기억을 말할 때, 우리는 그의 눈물에 감정적으로 동화되기 힘들다.

설사 루리핑과 진건빈과 자오타오가 배우임을 모르는 관객이라도 조안첸을 몰라보기는 힘들다(지아장커는 외국 관객이라도 이중에 배우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할 목적으로 그녀를 기용한 것 같다). 이때 희생되는 것은 가짜 노동자가 아니라 진짜 노동자다. 브레송의 말대로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을 때, 가짜가 진짜처럼 믿어지는 게 아니라 진짜가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이다. 지아장커는 오히려 그 의심 안에서 그들의 말을 듣기를 권유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말에 담긴 절절한 사연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혹은 누구를 향해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가의 문제, 즉 발화 행위의 물질성이다. <24시티>는 <인간극장>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르게 보기를 요청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왕조장을 향한 카메라의 결단을 찬미함

이 다큐의 독법을 알려주는 초반 장면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허시쿤, 1954년생, 정비공. 공장을 소유한 청파그룹과 뉴타운을 건설할 화룬기업간의 토지양도식이 거행되고 있을 때, 카메라는 공장의 어두운 계단을 올라오는 그를 비춘다. 명백히 연출된 이 장면은 공적 역사와 사적 기억의 대비를 암시하는 장면쯤으로 여겨질 수 있다. 정작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건 그 다음 숏이다. 창문 앞에 선 허시쿤은 카메라를 심각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불안한 현악이 돌출한다. 이것은 이후에 계속 등장할 기념사진 숏의 첫장이 아니다. 이 장면은 <무용>의 1부에서 화남의류공장의 한 젊은 노동자가 카메라를 적대적인 눈빛으로 쏘아보던 장면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지아장커는 인물이 카메라의 존재를 잊고 본심을 말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다. 그에게 웨이팅은 위장된 메이킹이다. 이 장면은 카메라의 현존 그리고 인물과 카메라의 주관적 거리라는 <24시티>의 방식 가운데 하나를 일러준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허시쿤의 구술은 주로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와 젊은 시절에 영향을 준 어떤 조장에 관해서다. 그는 지나가듯 그 조장의 성을 ‘왕’이라고 말했다. 다음 신은 어떤 병실이다. 할머니가 산소호흡기를 하고 누워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고 가족들이 그녀를 위로할 때, 할머니의 남편인 듯한 초라하고 왜소한 노인이 꾸부정한 자세로 무언가를 본다. 이 신의 첫숏은 허시쿤의 정면숏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카메라를 경계하듯 바라보는 모습이다. 노인은 벌떡 일어나 무언가를 발견한 듯 혹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프레임 밖을 뚫어져라 보지만,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혹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쯤에서야 그 노인이 왕 조장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노인은 다음 숏에서 주전자를 들고 길을 걸어가고, 뒤이은 숏에서 허시쿤의 식탁에 앉아 있다. 그는 귀가 어두운 듯 허시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력이 형편없다고 말한다. 그의 구술은 일요일에도 명절에도 밤낮없이 일했다는 것밖에는 없다. 우리가 더 오래 듣는 건 그의 신음소리이다. 그는 말을 멈추고 있을 때, 울음소리와도 같은 구슬픈 신음소리를 쉼없이 낸다. 두 사람은 더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로의 손을 쥐고 있다. 카메라는 왕 조장의 얼굴에서 허시쿤의 연민에 가득 찬 얼굴로 패닝한 뒤 멈춘다. 놀랍게도 더이상의 리버스숏은 없다. 이 장면의 쓰라림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인은 긴 구술의 시간을 할당받은 8명의 노동자 중 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 그는 정말 죽도록 일했다는 것 외엔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아장커는 노인을 기록하지 않았고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는 이름도 나이도 경력도 새기지 못한 채, 프레임 밖에서 처량한 신음소리로만 존재한다. 이 장면에서의 카메라의 결단을 찬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노인의 리버스숏을 생략할 때(초기의 지아장커라면 그의 침묵을 롱테이크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를 프레임 밖의 신음소리로 내버려둘 때, 지아장커의 카메라는 자신의 무능력을 위장하지 않고 수긍한다. 다큐멘터리의 혹은 영화의 무능력을 수긍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해진 것뿐만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것,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명료한 음성뿐만 아니라 뭉개지고 짓눌린 웅얼거림에 귀기울이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프레임 밖 노인의 신음소리는 그러니까 아무리 많이 말해도 끝내 말해지지 않을, 언제나 결국 말해진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중국 인민의 삶의 환유이다. <24시티>의 또 다른 방식은 구술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구술된 것과 구술되지 않은 것의 대위법이다.

구술을 평평하고 밋밋하게 만들어라

말해지지 않은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더 구체적으로 역사에서 배제되고 누락된 인민(이것은 예컨대 켄 로치의 소외되고 억압된 하층민과 다른 층위에 있다. 켄 로치의 하층민은 담론적 질서에 주변화를 경유해 포섭된 존재이며, 주변에서나마 말해지고 보여진다)의 육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나의 방법은 드라마 안에서 배우가 그들의 복화술사가 되는 것이다. 지아장커의 극영화들 특히 초기작들은 그러했다. 지아장커는 그것을 통해 초기의 허우샤오시엔이 그러했듯 침묵하는 것, 혹은 무언가 사라져가는 것을 응시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최근작 4편 중 3편(<동> <무용> <24시티>)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을 때, 그리고 <스틸 라이프>조차 다큐멘터리의 토대 위에서 만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이전에 만든 극영화들에 어떤 결여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런 자기 성찰의 우회적 표현이 전작인 <무용>의 2부에 담겼다고 나는 생각한다. 삶의 체취, 흙의 기억, 자연의 시간이 새겨졌다고 믿어진 옷이 인민에게 돌아가지 않고 파리의 화려한 전시장에서만 상찬될 때, 그는 그 옷에서 자신의 영화를 겹쳐본 것 같다. 인민의 미학화로 벌이는 엘리트들의 자족적 향연들, 그 속에서 추상화되어 사라져가는 인민들.

그의 카메라는 복화술사가 아닌 일상의 인민들에게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그는 다큐멘터리로 회귀했고, 최근작으로 노동자의 육성을 담은 구술다큐멘터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곧바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점은 대상이 말하기를 거부하거나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아장커가 선택한 길은 말해지지 못하는 것을 연출을 통해서라도 굳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침묵과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침묵은 소리가 존재할 때 체험되고 여백은 무언가 채워졌을 때 감지된다. 마찬가지로 구술되지 않은 것은 구술된 것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러나 구술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의 뿌리 깊은 관람 습관으로 인해 구술되지 않는 것은 구술에 가려진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지아장커는 구술을 평평하고 밋밋하게 만드는 쪽을 택한다. 구술은 사실적이되 최대한 전형적일 것, 또한 감정적 몰입을 허용하지 말 것, 그리고 말해지지 못한 것의 존재를 끊임없이 환기시킬 것. 지아장커의 작업의 중심은 배우를 동원한 페이크다큐식 구술 연출이 아니라 구술의 여백 연출이다. 구술자들은 개별적인 캐릭터라기보다 대표적인 체험의 사례를 전하는 메신저이며(우리는 8명의 구술자들이 노동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대신 화면 속에서 노동하는 이들은 말하지 않는다), 또한 침묵과 여백에로의 안내자이다.

검은 화면들은 감독과 관객의 메모장

그러므로 <24시티>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영화이다. 구술은 자명한 것이어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해지지 못하는 것은 체험될 뿐, 언어로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장소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끊임없이 등장하는 무지 화면들. 주로 구술이 진행되는 동안 수시로 출몰하는 무지 화면은 편집의 흔적이거나 무성영화의 자막 화면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내겐 감독의 메모장이라고 느껴진다. 일정한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그 메모장에는 무언가 기입되거나 기입되지 않는다. 그곳에는 구술자의 이력, 혹은 그의 사원증과 같은 구술의 보충 자료, 혹은 구술이 연상시키는 구절(예이츠의 시, 마오쩌둥의 어록 등), 혹은 구술에서의 인상적인 말(호우리우쥔 편의 “일을 하면 천천히 늙는다”), 심지어 구술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소리(하오다리 편의 뱃고동 소리와 나팔소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종종 구술자의 한마디가 걸쳐지거나, 혹은 인터뷰 장소의 소음만 기입된다. 이때 무지 화면은 동시에 관객의 메모장이 된다. 말해지는 것 혹은 보여지는 것이 사라진 검은 화면에 무엇을 기입할지 혹은 기입하지 않을지는 오직 영화를 보는 이에게 달려 있다. 다만 말과 피사체의 침묵은 그곳에 부재로서 존재한다.

더 중요하게는 8명의 구술자들을 제외한 인민의 모습들이다. 그들은 노동하거나 노래하거나 마작을 할 뿐 구술하지 않는다. 왕 조장은 구술하지 못하고 신음소리의 이명을 남겼다. 혹은 공장의 마지막 나날에 일을 하는 두 남성노동자. 어떤 기록도 새기지 않은 채 호우리우쥔 편 다음에 나와 땀흘리며 아마도 마지막 주물 작업을 했던 두 사람은 송웨이동 편 다음에 다시 나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들은 지금 어깨를 걸고 빙긋이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자세로 카메라 앞에 서 있다. 많은 기념사진 숏 중에서도 이 장면은 말할 수 없이 뭉클하다. 기념사진은 언제나 과거에 정박된 순간의 이미지이며, 그들은 그 순간에도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뒤이은 장면에서 익명의 경비가 빈 공장을 돌아볼 때 흘러나오는 엽천문의 <천취일생>(淺醉一生)은, 아마도 감독이 이 두 사내의 말없는 노동에 바치는 최대의 경의일 것이다. 그 노래는 지아장커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 한편인 <첩혈쌍웅>의 주제가이기 때문이다.

<스틸 라이프>가 회화적이라면 <24시티>는 사진적, 그것도 기념사진적이다. <스틸 라이프>는 싼샤의 수몰이 일어난 뒤에도 보는 이에게 초시간적인 귀기의 아름다움으로 돌아오겠지만, <24시티>는 과거의 한순간에 정박된 이미지와 사운드의 복합체, 혹은 침묵하는 과거 그 자체로 남을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건물이 헐리기 직전 어떤 노동자가 마지막으로 공장 안을 돌아보고 있을 때 도래한다. 바깥 세상에의 동경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포크 <Outside World>가 배경음악으로 울려 나온다. 이때 갑자기 누가 던졌는지 알 수 없는 돌이 바깥에서 날아와 이미 반쯤 부서진 창문을 깨트리자, 음악은 돌연 중단된다. 이 장면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놀라움을 안겨준다. 한숏 안에서 외재의 음악을 내재의 파열음이 돌연 중단시켰을 때(이 장면의 감각적 충격은 여기에서 온다), 미래에의 들뜬 동경을 과거의 파괴가 멈춰 세웠을 때, 미래는 과거를 침묵시키고 폭력적으로 행진한다.

말을 들을 것인가 침묵을 들을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8번째 구술자인 1982년생 수나(자오타오가 연기했다)의 말을 수긍할 수 없다. 그녀는 팩토리420 공장이 마침내 붕괴되고 뿌연 먼지가 전 프레임을 뒤덮은 숏에서 디졸브되어 등장한다. 노동자가 되기 싫어했고 가족을 멀리했던 이 바람기 많은 여인은 고통스럽게 노동하는 노모의 모습을 우연히 보고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연을 전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꼭 성공해서 부모님을 ‘24시티’에 살게 할 거예요. 힘들겠지만 할 수 있어요. 나는 노동자의 딸이니까요.” 수나는 지금 노동자의 이름을 ‘24시티’를 향한 자본주의적 욕망(그녀는 부유층의 쇼퍼로 살며 폴크스바겐을 몰고 있다)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공장에 나부끼던 오성홍기(五星紅旗)와 ‘24시티’의 오성(五星)호텔의 거리만큼이나 먼 것이다. 자신이 말하는 언어와는 달리, 그녀는 낡은 공장 유리창을 깨트린 돌과 같은 존재다. 그녀에겐 오직 사적 탐욕의 미래만 있다.

새로 건설된 청두 시가지를 비추는 마지막 장면에는 빠른 비트의 현대음악이 흐르고, 마지막 화면에는 ‘너는 점점 사라지지만 나에게 찬란한 삶을 주었다’는 시구가 떠오른다. 찬란한 삶? <24시티>는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그 사이로 빠져나간 침묵을 듣고 여백을 볼 것인가의 질문이다. 지아장커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았지만, 그의 대답은 그 질문 속에 있다. 단 한 개관에서 개봉했지만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다큐멘터리 가운데 하나가 지금 우리 곁에 왔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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