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아이를 애도하는 두 가지 방법
2009-02-19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체인질링>과 <레저베이션 로드>, 이스트우드와 테리 조지의 세계는 어떻게 다른가

누가 봐도 너무나 사랑스럽던 한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그 아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엄마, 아빠가 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 날 그들의 삶에서 사라져버렸다. 경찰은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지만 엉뚱한 짓으로 시간낭비를 하거나 무기력하게 대응할 뿐이다. 이제 엄마, 아빠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비슷한 시기에 극장에 걸린 <체인질링>과 <레저베이션 로드>는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죽은 아이의 흔적을 좇는 엄마와 아빠의 물리적, 정신적 행보를 좇는다는 점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띤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를 찾아서 혹은 그들을 애도하며 걷는 길은 전혀 다르다.

경찰과 싸울 것이냐, 권총을 구입할 것이냐

<체인질링>에서 아이를 데려간 범인은 사이코패스 같은 연쇄살인범이고 <레저베이션 로드>에서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뺑소니범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살인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가해자를 찾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에서 두 영화 속의 아이들은 일종의 연쇄살인의 피해자처럼 그려진다. 특히 <레저베이션 로드>에서 에단 러너(와킨 피닉스)가 뺑소니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 사이트에 가입하여 정보를 수집하며 동일한 범죄의 희생자로서의 유대감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게 된다. <체인질링>의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와 에단은 모두 경찰을 믿지 못한다. 그들은 사고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범인을 검거하는 데 전혀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은 경찰에 의한 철저한 조사와 과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순전히 ‘우연’으로 밝혀진다.

바로 그 점이 우리를 끔찍하게 만든다. <CSI>나 <성범죄수사대: SVU> 시리즈가 사건의 잔혹성에도 시청자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는 것은 아무리 사악한 범죄라도 철저한 수사와 수사관만 있으면 밝혀지고 그로 인해 ‘중지’될 수 있다고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수사관들은 일종의 판타지이며 실제로는 미궁에 빠지는 사건들이 더 많고, 무능한 경찰력이 방관하는 사이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날 수 있다는, 불편한 사실들을 상기시켜준다(정말 불행하게도 우리는 현재 그 사실을 TV를 통해 매일 확인한다). 우리를 지켜달라고 권력을 위임해준 이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되는 계기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제시한다. 일련의 감정과 행위의 집합체를 지칭하는 모성, 부성은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대부분의 추상어들이 그러하듯이 아무런 실체가 없다. <체인질링>과 <레저베이션 로드>는 몇몇 장면에서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안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아이를 찾는 것이 모성이라고 생각해서 경찰을 찾아가지만 경찰은 그녀가 힘없는 소년을 모른 척하려는 모성을 상실한 여성이라고 몰아붙이며 비난한다(물론 경찰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어버리기 위해 일차적으로는 가짜 아이를 진짜라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그 아이가 가짜일지라도 모성이 있다면 측은하게 여겨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언중에 숨겨 강요한다). 에단은 부성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으려 하지만 부인인 그레이스(제니퍼 코넬리)는 그가 가장과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유기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니까 모성, 부성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행위들은 서로 모순될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다고 볼 만하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동일한 요인으로 촉발된 크리스틴과 에단의 행보는 그들이 누구를 적으로 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무능함을 권위로 억누르려는 경찰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에단은 자신의 아이를 죽인 범인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그러므로 싸움에 임하는 태도도 다르다. 전자는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그것을 바꾸겠다는 것이고, 후자는 ‘법정에 정의는 없고 법만 있다’면 스스로 정의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틴이 두개의 법정을 오가며 경찰청과 범인의 재판과정을 보는 동안에 에단은 범인인 자신의 변호사를 기소해줄 다른 변호사를 찾는 대신 권총을 구입한다.

지금 절실한 건 크리스틴 콜린스의 방식

그들의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에단의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생사가 불분명했던 크리스틴의 아이는 평생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애도하느냐에 따라 그 아이들은 다른 모습으로 귀환한다. <체인질링>에서 크리스틴의 아들은 다른 아이를 살린 훌륭한 아이로 그리고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레저베이션 로드>에서 에단은 죽은 아들의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발버둥치는 동안 살아 있는 딸과 함께할 수많은 시간을 잃었고 결국엔 아들마저 영영 잃은 채 절망에 빠진 얼굴로 아내의 가슴에 묻혀 흐느낀다. 이런 결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아들을 죽게 방임한 무능한 경찰로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빼앗고 책임자들을 조직으로부터 축출했다. 그녀는 범죄를 방조한 사회 구조를 바꾼 것이다. 반면 에단은 아들을 죽인 뺑소니범 하나를 잡는 데 주력했다. 뺑소니범에 대한 물렁한 규제와 희생자 가족의 분노라는 끔찍한 사슬을 끊기는커녕 느슨하게 만들지도 못한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현상에 분개했지만 경찰이 제 할 일을 하도록 만드는 어머니와 자기 스스로 경찰의 역할을 하기로 한 아버지가 추구하는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세계와 테리 조지의 세계가 갈라서는 지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눈물어린 모성을 통해 우리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테리 조지는 눈물어린 부성이 한없이 울도록 할 뿐이다.

정신병원에 들어간 크리스틴과 의사의 대화에서 확인하듯이 어떤 것이 정상인지는 그것을 보는 주체가 누군지에 의해 끊임없이 바뀔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어떤 것을 대변하는 권위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에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해지고 국민을 지키는 데는 무능력해진다. <체인질링>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전작들처럼 세계의 그런 면들을 예리하게 들춰낸다. 그럼으로써 무엇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잔인하게 만드는지를 폭로한다. 하지만 <레저베이션 로드>는 끔찍한 사고에 연루된 인간의 정서를 다루는 데 집중한다. 에단과 드와이트 아노(마크 러팔로)의 고통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에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물론 그 교훈도 의미있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슬픔이 에단과 드와이트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어떤 사회적 파장을 갖기는 힘들다. 그의 전작에서처럼 가족의 고통 앞에서 사회가 지워져 버리는 것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또 더 많은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이상한 공권력에 의해 실종되거나 유기되거나 혹은 불꽃 속에서 숨을 거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크리스틴 콜린스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현재 우리에게 더 급박하게 와닿고 절실한 영화는 <체인질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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