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우는 확실히 물 같은 배우다. 갈색빛이 어린 눈동자나 여릿한 얼굴 윤곽만으로 꺼낸 말은 결코 아니다. 부드럽다가도 눈썹을 찡그리면 가슴 철렁할 만큼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나 제멋대로 진로를 바꾸는가 싶더니 유유히 순항하는 필모그래피도 그렇다. 온건한 연인의 광채와 냉정한 범죄자의 그늘. 박용우가 껴안은 아이러니는 잔혹한 시대극 <혈의 누>에서 못 말리는 로맨틱스릴러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가파르게 항로를 꺾으면서 비로소 빛을 발했다. 세상사 삼세번이라고, 삼수 만에 대학에 입학하고 두번의 낙방 끝에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이 끈덕진 남자의 걸음은 그때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세상> <호로비츠를 위하여>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등 스릴러에서 드라마로, 또 멜로로 긴장어린 줄다리기가 끊이지 않았다. “있는 척, 멋있는 척, 잘생긴 척, 매력있는 척, 폼재”기 일쑤인 경성 최고의 사기꾼 봉구를 유들유들하게 뽑아낸 <원스 어폰 어 타임>이 바로 전작. 그 다음 뽑아든 카드가 김한민 감독의 스릴러 <핸드폰>이다. “핸드폰 바탕화면에 있는 사진, 본인 맞아요?” 수상쩍은 기운이 묻어나는 나직한 목소리, 핸드폰 저편의 정체불명의 수신자 정이규가 그가 맡은 캐릭터.
“사실 주목받고 싶어 배우가 되려 했다. 주변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싶고 얘기도 많이 하고 싶은데 옆에 사람이 없더라. 성격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워낙 내성적이었고. 사람들 반응에 신경도 많이 썼다. 그래서 정이규 역을 맡으면서 옛날 생각, 진짜 많이 했다.” 우연히 오승민의 핸드폰을 주워든 정이규는 저장된 동영상을 빌미로 그에게 영문 모를 악행을 강요하는 인물이다. 오승민의 아내 정연(박솔미)에게 “키가 대체 몇이에요?” 질기게 캐물을 땐 소름마저 돋을 지경이다. 장르의 공식 안에서 극단으로 치닫긴 하지만 박용우는 정이규의 본질이 ‘감정노동자’임에 있으리라 추측했다. 무수한 직장인에게 일터란 악담을 퍼붓는 입들로 가득한 지옥이요, 가정은 생계를 두고 사투하는 전쟁터 아니던가. 거대한 지구 위 한뼘 마음 둘 곳을 찾고 싶었을 뿐인 정이규에게 망설임없이 빠져든 것도, “이번 작품이 특히 더 아쉬”운 것도 같은 이유다. “후반작업 중에 봐서 완전히 봤다고 할 순 없지만 나는 조금 더 크고 거창한 주제를 생각했나 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부재를 다룬 영화이길 원했다.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이 감정노동자나 마찬가지다. 물리적이기보다 감정적인 측면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 클 거고. 그래서 정말 좋은 지점을 건드리는 영화, 역할이 아닐까 싶더라.”
유난히 풋풋한 인상에 속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박용우는 스스로 “반골 기질이 좀 있다”고 말했다. “누구 연기가 더 좋냐, 그럴 때마다 짜증나가지고. (웃음) 그걸 누가 알겠나. 나는 오히려 내가 높게 평가받은 작품이 있으면 그게 정말 좋았어, 묻고 싶다.” 뻔한 결론이긴 해도 연기란 정답이 없는 무언가 아니던가. <혈의 누>의 김인권도, <달콤, 살벌한 연인>의 황대우도 아닌, <조용한 세상>의 “이름도 없는 그냥 김 형사”에 애정을 표하는 것도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참 어려운 연기는 그런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그 신과 그 컷에 정확히 어울리는 연기. 아주 적절하고 조화로운 연기.” 그러니 폭발하지 않았다고, 내지르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마라. 어떤 카드를 숨겼는지 곁눈질할 필요도 없다. 욕심없어 보이지만 단단한 이 남자는 언젠가 자기 얼굴에 딱 맞는 마스크를 기어이 발견하고 말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