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의 감동적인 장면으로는 이런 것들이 포함될 것이다. 할아버지의 몸과 소의 몸을 보여주는 장면이 자주 교차한다. 마흔살의 소를 팔기로 한 날 밤 할머니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하는데, 그때 소의 눈에도 물이 맺혀 있다. 그리고 때로 늙은 소는 젊은 소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이때 감동적인 건 우리가 이런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는 저렇게 친밀한 것이구나, 할머니가 슬피 우니 소도 따라 우는구나, 저 늙은 소가 젊은 소를 볼 때의 심정이란 참으로 처량 맞고 구슬픈 것이구나. 마흔살을 먹은 동물이다 보니 인간과 교감하는 영물이구나, 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럴까? 이 감동의 순간에는 영화의 작동방식이 개입해 있다. 그러니까 소가 감정을 드러낸 것일까, 소가 감정을 드러냈다고 영화적으로 믿게 된 것일까.
1920년대 소비에트의 영화감독 중 레프 쿨레쇼프는 당대의 유명한 모주힌이라는 배우를 등장시켜 실험을 한 가지 했다. 그것이 저 유명한‘모주힌 실험’또는‘쿨레쇼프 효과’라고 불리는 것이다. 쿨레쇼프는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주는 숏 다음에 각각의 숏, 수프가 든 접시, 관에 누워 있는 여인, 곰인형을 들고 노는 아이의 숏을 이어 붙였다. 그때마다 관객은 모주힌의 무표정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한번은 배고파하는 모주힌을, 한번은 슬퍼하는 모주힌을, 한번은 애정어린 시선의 모주힌을 보았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지만 모주힌은 무표정이었다. 이 실험이 정말 있었냐는 의견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것으로 입증된 결과는 지금까지 크게 의심받지 않는다.
모주힌의 무표정과 소의 무표정. 문제는 그들이 어떤 연기를 했느냐가 아니라 그 앞과 뒤에 어떤 내용의 숏이 붙을 것인가이다. 영화는 때로 등장인물(혹은 등장동물)의 연기 없이 숏의 결합만으로도 감정 창출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실은 동물이 등장하는 영화에서의 감정은 알게 모르게 이 쿨레쇼프 효과에 많이 의존한다. 그러니 <워낭소리>의 소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 하지만 동시에 소와 할아버지, 소와 할머니, 늙은 소와 젊은 소의 숏이 이어 붙을 때 만들어지는 마술도 중요하다. 이것은 영화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