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주째 이 지면이 두 다큐멘터리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최초의 영화들이 기록 필름이었으며 카메라와 피사체의 관계가 텍스트 내적인 문제로 새겨진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이야기에의 집중을 요청하는 극영화보다, 영화라는 매체의 기원 혹은 본성과 관계된 쟁점을 종종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24시티>와 <워낭소리>로부터 배우고 생각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다. <24시티>는 두 차례 다뤄졌으므로 여기서는 <워낭소리>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려 한다.
좋은 가짜인가 나쁜 가짜인가의 문제
<워낭소리>의 극영화적인 장치들에 대해선 이미 정한석이 재론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정교하게 분석한 바 있다(688호). 그리고 나는 그 다음에 <24시티>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적 성격에 대해서 썼다(689호). 둘을 모두 유사 다큐멘터리 혹은 조작적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조작’의 지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24시티>의 조작은, 유명 배우가 현장 노동자로 분장해 구술함으로써, 관객이 인지하도록 기획되었다. 그러므로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그 조작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조작 안에서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의 결정을 요청받는다. 반면 <워낭소리>의 조작은 관객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잊도록 기획되었다. 우리는 프레임에 등장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그곳에 정말로 있었던 것처럼 느끼도록 유도된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조작은 정당하고 스스로를 은폐하는 조작은 정당하지 않은 것일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편집과 사운드와 현장 연출이 전혀 없는 다큐멘터리는 상상하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다수의 방송 다큐멘터리들이 <워낭소리>보다 덜 조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지아장커의 말대로 카메라의 등장으로 현실이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다면, 조작의 탈피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 조작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슨 웰스의 <거짓의 F>의 유명한 대사 “이 세상에 진실과 허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있는 것은 좋은 가짜(good fake)와 나쁜 가짜(bad fake)뿐이다”를 인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 ‘좋은’이 넓은 의미의 ‘감동적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가짜는 ‘좋은 가짜’이다. <워낭소리>를 만든 이충렬 감독은 그렇게 믿는 것 같다. “연출이 얼마나 개입된 것인지를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표현되었느냐와 관객이 무엇을 느끼도록 하느냐가 아닐까요.” 이 작품을 보러 온 많은 관객도 그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양식의 인지’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작품 앞에 섰을 때 그것의 양식에 대한 일정한 인지 없이 그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895년 최초의 영화를 보기 위해 그랑카페에 모여든 관객이 스크린에 도착하는 기차를 보고 혼비백산해서 뛰쳐나간 것은 그 인지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객이 많게는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재난영화를 보고도 즐거울 수 있다면, 실제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다큐가 실재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약속’
그런데 그 인지에는 일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그 약속은 창작가가 감상자에게 공식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기대하고 그 약속 안에서 작품을 감상하며 그 약속이 깨졌을 때 혼란에 빠지거나 때로 배신감을 느낀다. 재난영화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죽었다고 가정해보면 그 후유증을 짐작할 것이다. 좀더 간단한 사례가 있다. TV 오락프로그램인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공개되었을 때 시청자 사이에 논란이 일었다. 그 프로그램은 ‘리얼 버라이어티’로 소개되었고 그것은 세밀한 각본 없이 출연자들의 즉흥적인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양식이라고 인지되고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다 연기였던 말인가”라고 배신감을 토로한 사람들은 인지된 양식의 약속 안에서 그 프로그램을 즐겼던 사람이었다. 물론 “재미있으면 되지. 대본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라는 견해도 있었다. 이 견해는 <워낭소리>를 두고 “감동적이면 되지. 연출이 얼마나 개입되었든 무슨 상관인가”라는 견해와 통할 것이다.
누구나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어느 쪽이든 선택할 권리가 있다. 더구나 많은 ‘감동적’ TV다큐멘터리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엄격한 잣대가 애초에 방송용 다큐멘터리로 기획된 <워낭소리>가 극장에 걸렸다고 해서 갑자기 적용되어야 할 근거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한쪽 편에 설 수밖에 없다. 반복하자면 이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약속의 문제이다. 다큐멘터리가 실재하는 삶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물론 그 기록에는 작가의 주관적 반응도 포함된다. 사견으론 <송환> 이후 최고의 한국 다큐멘터리인 최하동하의 <택시블루스>는 택시기사인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며 비루한 성매매에 자포자기의 태도로 이끌리는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약속 안에서만 시네마로서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이 극영화와는 다른 경로로 진리의 지평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옳을 뿐만 아니라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실질적으로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24시티>는 약속이 근원적으로 지켜질 수 없다는 자각을 전경화하며 자기만의 독법을 제시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다큐멘터리의 약속, 어쩌면 그에겐 영화 그 자체의 약속에 대한 지아장커의 필사적인 질문이다. 그를 통해 지아장커는 역설적으로 약속을 지킨다.
리얼리즘에 충실할수록 환영성은 강화
그렇다면 <워낭소리>는? 이 특별한 다큐멘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단정하기에 앞서 그것의 방식에 대해 먼저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워낭소리> 역시 다른 독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독법은 너무나 혼란스러워 차라리 일정한 규칙이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물론 가장 중심적인 건 극영화의 독법이다. 이것에 관해선 정한석이 이미 세밀하게 지적했으므로(그는 “이 작품을 차라리 비전문 배우들을 동원한 극영화라고까지 부르고 싶어진다”고 했다) 여기선 한 가지만 덧붙이려 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할아버지는 젊은 소를 사기 위해 소시장에 나온다. 할아버지의 정면숏 다음에 어떤 소의 숏이 이어진다. 그런데 카메라는 갑자기 빠른 패닝으로 약간 떨어진 곳의 소를 잡는다. 이것은 명백히 카메라가 할아버지의 눈이 되어 움직이는 주관적 시점숏이다(단순히 두 소를 보여주려는 의도였으면 이런 스위시패닝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시점숏은 등장인물의 시점과 관객의 시점을 일치시켜 동일시하도록 만드는 극영화의 방식이다. 별다른 기능이 없어 보이는 이 시점숏이 초반부에 등장했을 때, 나는 감독이 관객에게 이 영화를 극영화의 방식으로 보기를 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태는 더 복잡하다. 다큐멘터리의 어떤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컨대, 할머니의 인터뷰 장면들. 할머니는 카메라를 보고 할아버지와 소의 오래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할머니의 진술은 장면이 바뀌어서 할아버지가 소와 밭을 갈고 있을 때도 계속된다. 그런데 그 말들은 묘하게도 할머니의 구시렁대는 혼잣말과 이어져 극영화의 방식으로 슬며시 이행한다. 게다가 할머니가 말하고 있지 않은 장면에서도 혼잣말이 나올 때는 방울이 흔들리지 않아도 방울소리를 내는 것처럼 어느 쪽도 아닌 일종의 환청이 된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워낭소리는 그 음원이 소리를 내지 않아도 우리 귀에는 들리는 것이다. 정한석은 이것을 환영성의 강화라고 표현했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망설여진다. 판타지는 말 그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칭하지만, 영화와 연관돼 말해질 때 환영은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를 뜻하며 영화의 본질에 속한다. 현실적으로 보일수록 그러니까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영화일수록 환영성은 더 강화된다.
따라서 할머니의 입과 목소리가 맞지 않을 때, 환영성은 오히려 훼손된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워낭소리는 다르게 작용한다. 음성과는 달리 음향의 경우 음원과의 시청각적 동시성에 관객이 덜 주목하기도 하지만 방울이 눈에 띄게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를 내며 그것이 비교적 흔한 소리이기 때문에 새 소리나 바람 소리와 같이 일종의 주변음(앰비언스)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워낭소리는 환영성을 해치지 않으며 때로 보완한다. 목소리와 소리에 관한 한 <워낭소리>의 방식은 엉성하고 뒤죽박죽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개별적 캐릭터이자 내레이터인 할머니가 자신의 심경을 효과적이고 때로 유머러스하게 전하는데다 필요한 정보를 적절하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객은 방식의 혼재 자체로는 감상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혼성적 양식(주로 방송 예능프로를 통해)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차라리 ‘환청의 영화’라는 편이…
이 영화의 수사학이 있다면 그것은 환청의 수사학이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그러나 매우 조작적인 순간의 하나는 죽은 소를 묻고 나서 방에 누워 있는 노인을 비추는 끝에서 두 번째 장면이다. 화면 밖에서 워낭소리가 들리고, 끙끙 앓으며 눈을 감고 있던 할아버지는 눈을 뜨고 고개를 (아마도 마당쪽으로) 돌리려 한다. 우리는 노인이 귀가 매우 어둡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워낭소리에 반응하고 있다. 워낭소리는 정말 그때 울렸을까. 울렸다 해도 노인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는 환청을 들었을 것이다. 주변음에 묻혀 있던 워낭소리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특별한 소리, 바로 소의 목소리의 환유로 관객에게 지각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소가 울리던 워낭소리를 식별하지 못했지만, 소가 죽은 뒤 환청으로 비로소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대목에선 <워낭소리>를 차라리 환청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수긍하기 힘든 것은 소의 눈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의 눈물이 놓인 자리, 즉 편집의 문제다. 소는 두번 눈물을 흘린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소를 팔기 위해 소시장에 끌고 나가려 할 때이며 다른 한번은 잠시 뒤 소시장에서 소 거래인이 할아버지에게 소를 도로 끌고 가라고 소리칠 때이다. 나는 소가 코를 뚫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들었지만, 슬픔 때문에 우는지는 알지 못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이상하다. 소의 눈물장면은 두번 모두 소의 얼굴이 프레임을 꽉 채운 클로즈업 숏으로 커트된다. 이 편집은 할아버지와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에 소가 슬퍼했고 소시장에서 이젠 소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욱 슬퍼한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정작 소가 우는 숏에서 공간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과연 소는 그때 그 장소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만 감독에게 묻기 두렵다. 대답을 모른 채 나는 이 편집에 반대한다. 고백건대 내가 <워낭소리>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바로 이 소시장 장면이다. 왜소한 80살 노인이 삐쩍 마른 40살 소를 데리고 와서 팔려고 한다. 사람들은 빈정대고 한 상인은 “이런 소 있으면 다른 소도 안 팔리니 빨리 데리고 가라”고 차갑게 쏘아붙인다. 이젠 고기값도 받을 수 없는 노쇠한 소, 30년을 함께 산 그 소를 더 먹일 기력조차 남지 않아 마지못해 시장에 끌고 온 병들고 휘어진 노인, 무지막지한 노동으로만 채워진 생의 마지막 문턱에 선 두 비루한 육체를 향한 세상의 냉소와 멸시. 우리는 노인과 소에겐 어떤 연출도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두 늙은 육체를 그 자리에 이끈 건 고단하고 힘겨운 삶 혹은 가혹한 운명밖에 있을 리 없다. 이 한없이 쓰라리고 슬픈 장면에 마침내 이르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워낭소리>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기록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무표정에 인과관계를 덧입히지 마라
그러나 편집된 소의 눈물이 거기 놓이지 말아야 했다. 소가 정말 눈물을 흘렸다 해도, 그 장면은 편집 없이 그때 그곳에서 보여졌어야 했다. 이 편집은 정서가 풍부한 많은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슬픔을 전하는 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편집의 마술이 동시에 기만술이라는 것을 아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이전까지 어긴 약속을 곧바로 상기시킨다. 정한석이 예리하게 관찰한 대로 이 영화에는 시선이 서로 맞지 않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상대 숏들, 그러니까 다른 시간대에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두 숏을 시간적으로 연속된 숏/역숏인 것처럼 이어붙인 장면들이 꽤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시점숏과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의 방식이 아닌 극영화의 방식이다. 소의 눈물 숏이 과연 정말 그때 그곳에서 찍혔을까, 그 눈물은 정말 슬픔의 눈물일까, 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떠오르는 의심은 약속을 어겨온 것에 대한 대가의 하나일 것이다.
또 다른 대가는 이 편집이 소시장 장면이 지닌 심원한 감정을, 상투적인 인과의 서사로 해소해버린다는 점이다. 노인과 소의 많은 공통점 중 하나는 그들의 무표정이다(노인은 한번은 사진 찍으면서 억지로, 다른 한번은 소 자랑하며 안쓰럽게 단 두번 웃고,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서 있기조차 힘겨운 몸으로 간헐적인 신음 외엔 어떤 불평도 없이 그들이 묵묵히 밭을 갈고 있을 때, 둘은 인간과 소의 경계를 넘어 운명적인 동반자처럼 보인다. 그토록 혹독한 노동의 세월을 다 보낸 그들을 맞이하는 시장에서의 비하와 멸시의 시선들 그리고 외로움. 좌절하고 슬퍼해야 마땅해야 할 그 상황에서조차 그들은 새겨진 듯한 무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다. 어떤 수사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아득하고 뼈저린 무표정. 이때 곧바로 이어진 소의 눈물이 전시하는 즉각적 감정 노출은 이 비애의 심연를 돌연 패턴화된 감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마지막의 환청장면. 여기선 노인이 환청으로 짐작되는 워낭소리를 듣고 언덕에 홀로 앉아 상념에 잠긴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 수사학적 재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편집을 마찬가지 이유로 신뢰하지 못하겠다. <워낭소리>는 종종 심금을 울리는 순간에 이르면서도 다큐멘터리의 약속을 깨고 극영화의 편집으로 패턴화된 감정의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려 한다. 정한석은 이 영화의 많은 단점을 지적한 뒤에 “잠시 망설인 다음 껴안는다”고 썼다. 나는 반대로 거부할 수 없이 마음을 적시는 장면들에 흔들리면서도, 결국 껴안지 못하겠다.